성막·

성막에 나타난 복음

제이비젼 2014. 10. 4. 07:31




 



                                                               
성막에 나타난 복음

 


 

 

제목 : 말뚝과 줄

출애굽기 27:19; 35:18

성막은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광야는 기후가 좋지못합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40년동안 한번도 사고를 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40년동안 성막을 향하여 폭풍우도 쳤을 것이며 그러나 성막은 움직이거나 넘어지지 않고 견고하게 이겨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이 성막이였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생각하면서 지은시가 시편91편입니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편 91:7,9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여기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란 ?

곧 전능자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한다는 것은 그룹천사들의 날개아래 거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소의 천장은 4색실로 짠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안의 제사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천사의 날개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질병과 위험에서 완전하게 보호를 받았으며 편히 쉴수가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막안에 있는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안의 제사장이 영원한 보호를 받았듯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는 이 땅위에서 또한 영원히 보호와 평화를 누릴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를 헤칠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막의 견고성에서도 볼수가 있습니다. 성막의 견고성은 지난주에 공부하셨듯이 뜰의 울타리와 성소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울타리만 해도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무려 48개에 달하는 널판에(한개의 널판에 두개의은받침을 받침) 96개의 은받침위에 세워졌으며 또한 밖으로 조각목에 금을 입힌 4개의 띠를 띠우고, 안으로 역시 조각목에 금을 입힌 1개의 띠를 띄웠기 때문에 견고하기가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견고하게 세운 벽위에다가 네겹으로 지붕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의 기후나 아무리 억센 비바람도 방지할수가 있었습니다.

 


 

말 뚝

이렇게 성막을 견고하고 안전하게 붙들어 주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말뚝과 줄입니다. 그것들은 성막 주변에 깊숙히 박혀서 줄을 맬수 있도록 해주는 노출되어 있지 않는 말뚝과 이 말뚝에 줄을 단단하게 묶어서 성소의 지붕과 성막뜰의 울타리를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 주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그래서 성막은 말뚝과 줄의 역활로 40년동안 사막의 어떤 강풍이나 폭풍이 성막을 사정없이 몰아쳤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자체가 안전하고 견고했기 때문에 성막안에 있는 제사장은 안전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처럼 안전한 것입니다. 말뚝의 사명을 가진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제자리를 지킬수 있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얻어쓰고 갚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어느날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거기서 빚주인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대낮에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벌거벗고 도망을 할수가 없어서 꼼짝못하고 잡혀서 돈을 갚아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나중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는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도망할수가 없습니다.

 

1) 안전한 이유 ?

 

이 천막의 말뚝을 영어성경은 *핀* *못* *말뚝*등 여러가지로 사용합니다. 이사야22:23-24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단단히 박힌 못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2:23-24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예수님은 잘박힌 단단한 말뚝과 같습니다. 이 말뚝에 나를 메고 살면 결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의 특성중에 하나는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초원에 양들을 풀어 놓으면 제각기 마냥 흩어지기만 합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지 않으면 한없이 흩어지고 돌아올줄을 모릅니다. 양들은 한 여름철에도 떨어져서 눕지 않고 서로 붙어서 눕는다고 하니 얼마나 단순한 짐승인지 상상이 됩니다. 미련하고 아둔한 짐승이 양입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양의 또하나의 특성은 양은 미련하지만 양이 사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줄 안다는 것입니다. 양은 미련하여 제갈길로 가다가도 목자의 음성이 들리면 그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양입니다.

 

요한복음 10:4-5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미국 시골에 가면 목장에 소나 양들을 키우는데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시골에 가면 미국처럼 넓은 땅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짐승을 줄로 메고 말뚝에 묶어 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제각기 딴길로 가버리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마치 울타리 없는 목장과 같고, 말뚝에 메여있지 않는 짐승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정욕을 헤메이며 따라 살다가 고통을 받고 결국에는 멸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있는 인생은 울타리가 있는 목장과 같고 말뚝에 메여 있는 짐승과 같아서 주인의 보호와 돌보심 가운데 인도함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울타리와 같고 말뚝과 같습니다.

 

(복음성가)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정처없는 나그네 길.

 

말뚝의 사명이란 ?

 

자신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말뚝임을 알고 무슨일이 있어도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합니다.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남을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교회에서 세례식을 하는데 목사님께서 한사람씩 차례대로 세례문답을 하였습니다. 그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집에 있는 못된 며느리 년 때문이죠....* *내 며느리는 죄를 많이 짖는 사람이랍니다...

 

아직 말뚝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할머니이십니다. 주님은 이웃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기 보다 먼저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을 때 비로써 교회를 굳세게 하는 말뚝이 될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시급한 일입니다.

 

성막에서 말하는 *줄*은 성막의 여러 부분들은 서로 든든하게 묶어서 요동하지 않게 하는 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줄*의 의미는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이 되고 있는 *사랑*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호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신자들이 세가지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1) 믿음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소망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3) 사랑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도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누릴수도 없고 축복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축복을 모두 놓치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한 소망이 없이는 결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기쁨이 없습니다. 육적인 기쁨은 한계가 있고 완전한 기쁨이 아닙니다. 춘향이가 이도령을 만나야 온전한 기쁨이 있고, 견우가 직녀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소망중에 온전한 기쁨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줄은 약해서 끊어지기 쉽고 두줄도 쉬 끊어지기 쉬우나 삼겹줄은 단단하여쉬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결줄을 붙들어 믿음에서, 소망에서, 사랑에서 덜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

 

 (출애굽기 28장)

육신은 일시적인 존재다. 하루살이... 아마도 수명이 제일 짧은 생물 중 에 하나가 아닐까? 수명이 단 하루뿐이니까, 이 하루살이는 인간의 수명에 비해서 단 하루만 살지만 그 하루 동안에 인간이 하는 짓 다 한다. 유아기, 유년기, 청장년과 노년기를 다 경험하고 이 하루 동안에 초등, 중등, 고등, 대학과정을 다 경험하고 결혼 생활, 직장 생활을 다 경험한다. 하루살이 그 자신은 혹시 자기가 꽤나 오래동안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는지 모른다. 가 끔 "애고...! 내 인생 왜이리 힘드냐? 빨리 가고싶다..." 라고 생각할는지 모르 지만 그에겐 내일이라는 개념이 없고 그가 보고 있는 저 태양은 내일 다시 볼 수 없는 짧은 수명이다. 어떤 하루살이는 그 일생 내내 비가 오기 때문에 태양이 뭔지 모르고 수명을 다 할꺼다. 이 하루살이의 수명에 비해 사람은 꽤나 오래 산다. 7,80년을 살고 어떤 이는 100년도 넘게 산다. 그러나 하루살 이의 수명이나 인간의 수명이나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이다.

 

인간은 하루살이를 위해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들의 수명을 좀 더 연장시킨다든지 아니면 그들에게 먹을 걸 준다든지 아니면 무엇이든지 하루살이와 대화를 하고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며 그들의 짧은 수명을 안타 까워해 주든지... 머 그럴 수 있을까? 이상한 소리 같지만 사람들은 하루살이 에 대해 관심도 없다, 그저 눈에 뵈니까 볼 뿐이지... 죽으면 죽나부다, 살면 사나부다, 병들면 병드나부다, 병이 드는지 죽는지 사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관심이 있다고 해도 도움을 줄 수 없다. 근데...

 

영원하신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루살이 같은 인간에게 관심이 크신 걸 까? 하루살이의 수명이 인간에 비하여 지극히 짧은 것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비하여 너무 짧다.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하루살이나 사람이나 그 수명의 장단은 그게 그거다. 인간은 하루살이를 지극히 단순한 한 미물로 취급하여 상대도 하지 않는데 우째 하나님께선 인간을 특별 대우 하시는지... 생각해 봤냐, 만득아? 왜 인간에게 관심이 있으시며 왜 인간과 함께 대화를 하시며 왜 인간에게 계명을 주시기도 하고 벌과 상을 내리기도 하시냐 그거지, 도대체 뭐하러 인간 따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지극 정성을 다 하시는지 몰러...

 

성막을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 성막엔 뜰, 번제단, 물두멍, 성소, 지성소 로 구성되어 있고 법궤, 장, 떡상, 등불, 향단의 가구가 비치되어 있다. 이 중 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면 뭘까? 번제단? 왜, 이 번제단이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하니까... 말 됀다 그치? 그럼 물두멍은 어떻고? 물두멍 은 예수의 말씀을 상징한대며? 그러면 말씀을 빼놓을 수도 없는 거자너, 번 제단과 물두멍 뿐만 아니라 성소와 지성소에 있는 모든 가구들도 하나 하나 가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제외될 수가 없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법궤와 장과 등불, 향단, 떡상이 모두 다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어, 그건 바로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 성막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제사장이라는 특권을 위임하시고 이 제사장에게 하나님과 인간을 서로 연결 하는 직분을 담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렇게 대우하신 거야.

성막은 하나님을 상징하지만 제사장은 사람을 상징한다. 성막 안에서 사람과 하나님이 서로 인격적인 만남을 체험한다. 이런 체험을 위하여 하나 님은 제사장에게 특별한 옷을 입히셔서 거룩하게 그리고 영화롭게 또한 아 름답게 치장하시기를 원하셨다. 하루살이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다면 그게 뭘까? 하루를 더 살게 해 주면 어떨까? 하루살이가 하루를 더 살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될까? 인간에게 가장 큰 선물이 뭘까? 영원히 살게 해 준다는 거 다. 그래서 영원한 규례를 주시고 거룩한 옷에 영화롭고 아름답게 제사장을 꾸미시는 거다(1, 2절). 어디 그 뿐이냐? 하나님께선 사람들에게 지혜로운 영 을 채우시고 제사장의 입을 거룩한 옷들을 만들게 하시는 거야, 사람이란 원 래 아름답고 깨끗하고 거룩했었는데 그 원래의 모습을 다시 찾아 주시겠다 고 제사장을 이렇게 꾸미는 건데 그 아름다운 모습을 맹구와 만득이도 찾아 야 하는 거다.

 

출애굽기 28장은 제사장을 위한 옷, 보석, 흉패, 움림, 둠림, 관, 띠를 만드는 기록이다. 제사장은 사람의 대표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교 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담당한 자다. 그러나 이 명분 좋은 제사장 직분을 사람들은 결국 마귀의 도구로 전락시켜서 섬기는 직분이 아닌 섬김 을 받는 직분으로 변질시켰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제사장의 비 리와 타락에 대한 폭로이며 경고이다. 말라기 뿐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타락 이 기록된 사무엘서를 비롯하여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제사장의 타락상이 문제시 되어지고 있다. 물론 제사장 그 본래의 자세를 갖춘 진짜 제사장에 대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이 전반적으로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수께서도 제사장들의 타락 을 드러내셨고 이 때문에 점수를 깍인 예수는 체포되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신 거다.

 

하나님은 원래 이 세상을 보기에 좋게 지으셨는데 지금 인간은 환경 문제가 심각한 오염된 더러운 세상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하나님은 제사 장과 제사장 제도를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인간에겐 아무리 좋은 제도를 주어도 그를 본래의 의도한 대로 운영할 능력이 없다. 반드시 타락시 키고 만다. 모세의 주도로 만든 성막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보존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타락이 그 원인이다. 성막을 보존하려면 우선 외세의 침략을 제 압할 실력이 있어야 하고 또한 내부적으로도 건전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 들은 성막을 만들 땐 하나님의 채워 주신 지혜의 영으로 만들고 또한 아름 답고 영화롭게 만들었는데 결국은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진 타락으로 인하여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였고 이 때문에 법궤를 이방인들에게 탈취 당하지를 않나 별 짓을 다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는 건설비용보다 그 유지비용 이 훨씬 더 많댄다, 성막도 잘 유지하려면 만들 때 보다 더 많은 노력과 비 용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요아스 왕 때에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는 기록이 있는데(왕하12장) 요아스 왕 이전 성전의 관리 상태가 오죽이나 했으면 수리 좀 하자고 하기까지 했을까? 성전을 보수 관리할 비용도 없거니와 제사장들 이 관리비용을 개인적으로 쓱싹 해 먹었기 때문이라는 짐작을 지울 수 없다. 결국 성막이든 성전이든 몽땅 없애버렸으니 그 타락이 얼마나 심각하냐 그 거야, 유지비용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외세에 의한 파괴도 모두 제사장들의 타락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이 그 원인이다. 이게 인간 의 모습이다.

 

오늘의 교회, 제사장...? 좀 난가? 만인 제사장이 어쩌구 저쩌구 디따 말들은 잘하는데 하는 짓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르지 않다. 정말로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갖춘 목회자와 교인들을 찾아 봐, 그게 쉬워? 그럼 그 반대를 찾아 봐, 매니매니 닥상이다. 어디에서 섬기는 자세를 갖춘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 사람의 관심이 지극히 적은 곳, 질병과 가난과 무식이 있는 곳에나 가야 간신히 찾을 수 있을 꺼야, 성막이 파괴되는 걸 방관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엔 교회가 파괴되는 걸 또한 내버려 두신다. 과거에 성직을 돈 받고 팔았던 천주교의 타락이 오늘 교회에서 되풀 이되고 있는 거 아슈? 목사 안수를 받기 위해선 줄을 잘 서야 하고 돈도 뿌 려야 하는 거, 이게 여의치 못하면 교단을 옮겨서라도 안수를 기여코 받으려 고 하는 싸이코들, 인간적인 대우를 잘 받는 교회로 발령받는 게 관심인 놈 들, 이를 이용해서 매직 행위하는 교단 왕초들, 이게 모두 관행적으로 행해 져 왔다. 한심한 건 이런 일들이 일부분이 아니고 대부분이며 점차 개선되어 가는 게 아니고 점차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 개혁, 재벌 개혁만 요란하게 떠드는데 왜 교회 개혁에 대해선 침묵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 다. 그거 하자고 하면 천벌이 떨어진다는 협박 땜시 겁먹어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으로 삼으셨다. 왜냐하면 성막이 광야에만 있는 게 아니고 맹구의 마음속에 있어야 하며 교회란 건물이나 인간적인 조직이 아니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 의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진 개인이라는 사실을 지식이 아닌 삶으로 실천해 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동성인 성막도 없어졌고 고정성 성전도 없어졌거 니와 진정된 교회도 이미 없어졌고 세상 자체도 다 없어지게 될 것이다. 남 는 건 뭐냐? 사람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진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 모두가 없어진 후에도 영원히 남는다. 그래 서 우린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육신이란 영혼을 잠시 담는 그릇이요 육신이라는 기회가 지속되는 동안에 하나님의 지혜의 영을 체험하 여 우리의 영혼이 아름답고 영화롭게 꾸며져야 한다.

 

죽을 넘들은 지 인생 지가 살았고 지가 지 고집을 피우다가 글케 됐으 니 어쩔꺼냐, 할 수 없지, 그러니 맹구야, 닌 니 인생 니가 살아야 하니까 니 맴을 니가 잘 다스려라, 그러면 하루살이에게 또 하나의 하루가 선물로 주어 지는 것처럼 니에게 영원이라는 선물이 주어질 것이다. 쳇! 하루살이 출세하 네...!!!

 

 

성막을 세우라

성막을 세우라

 

(출애굽기 26장)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너희들은 네 하고 싶은대로 해라, 우상을 만들거나 말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말거나 부모를 존경하거나 말거 나 간음이나 도적질을 하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을 꺼니까 좌우지간 네 마 음속에 하고 싶은 짓이 있걸랑 어떤 짓이라도 상관이 없으니 니가 하고 싶 은 걸 다 하면서 살아라" 라고 말씀하신다면 인간을 무슨 마음을 먹고 무슨 짓을 하고 살까? 우상을 만들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존경하고 간 음이나 도적질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대로 살까? 아니면 그 반대 로 살까? 돈 선거 타락 선거하지 말자... 고 그렇게 신문에서 외치고 지역감 정 부축이지 말자고 그렇게 악을 써도 결국은 이익을 위하여 할 짓 다 하고 야 마는 심통들... 제발 나쁜짓 좀 하지 말자고 해도 악착같이 하는 인간들인 데 아무짓이나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마다 할 넘들일까?

 

인간들이란 본래 죄의 유혹을 당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죄가 접근하 면 죄에 맛서서 대항하기 보다 죄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죄를 범하고 죄를 즐기고자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양심이라는 게 있지만 그 양심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이다. 돈의 유혹이 오면 받아들이고 쾌락의 기회가 있으면 거절하지 못하고 명예가 부르면 예...! 하고 달려가고 싶어하 는 게 사람들의 본 마음이유, 그래서 인간들은 선을 택하기 보다 악을 택하 는 게 보다 수월하단 말이지, 아니... 선을 택하려면 대단한 결심과 무언가 이익을 포기를 해야하는 희생의 각오를 해야 하지만 악을 택하려면 택하고 자시고 없이 자연적으로 악을 향하여 몸과 마음이 음직인다. 악을 택하려는 의지나 결심 그 조차도 필요없다. 물이 아래를 향하여 흐르듯이 인간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인간들은 저절로 악해진다. 스승들이 선하게 살라고 목이 쉬어라 외쳐도 사람들은 악하게 살거든 하물며 악하게 살아도 된다, 니 조꼴 리는 대로 살아라 고 한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래서 인간들을 천국에 가게 하려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독생 자께서 직접 출동하셔야 했지만 지옥에 가게 하려면 아무런 노력이 필요없 다, 구태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출동할 필요없이 그냥 냅두면 돼, 인간은 원래가 쓰레기이니까...

 

이러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고 율법을 주시고 이제는 성막을 지으라는 명을 내리신다. 그래서 인간들이 십계명대로 살았어? 율법 대로 살고? 성막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어? 아니자너... 선하게 살아라, 하나 님의 성품과 인격을 닮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면서 살아라 고 가르쳐도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사람들, 인간의 대표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십계명과 율법을 통하 여 드러내시고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을 계시하시면서 인간들 에게 동참하도록 명하시는 중이시다. 쓰레기 인간들을 쓰레기 취급하지 않으 시고 금 은 보석으로 취급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시 는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시려는 계획을 지금 베푸시는 중이다. 이 거룩하 신 하나님의 명에 몸과 마음으로 동참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인데...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 님과 함께 40일 40야를 보내면서 한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성막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하나님의 보이시는 성막의 식양을 보는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의 공포심으로 느꼈다. 하나님의 임재가 구름이 빽빽 하고 번개가 번쩍이고 우뢰가 천지를 진동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모세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구름 속으로 홀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며 하나님의 보이시는 식양을 홀로 보고 있는 거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이냐? 책이나 신문을 보고 T.V. 나 영화를 보라면 쉬워도 하나님의 보이 시는 식양을 보라면 그게 쉽게 봐 지는 거냐?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으로 가 득 차있지 않으면 그게 어디 그렇게 봐 지는 거겠냐고...? 어림도 없다. 하나 님의 임재와 함께 있다는 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가 된다. 세상 을 멀리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임재와 가까와 질 수 없는 거다. 사람 이 세상과 벗하여 살면 하나님과 원수되는 거고 세상과 원수를 맺어야 하나 님과 벗되는 거야, 지금 모세는 세상과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과 벗하여 하나 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보이시는 식양을 본다는 거 아니냐!

 

그 넓고 황량한 광야가 다 쓸모없는 땅이지만 한 뙈기 성막이 차지하 는 땅은 거룩하게 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로 사는 쓰레기들이고 마귀의 자식 들이지만 한 웅큼의 극소수 인간들은 지금 하나님의 명을 듣고 성막을 만드 는 일에 동참하려는 중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일하고 무 엇인가 만들고 사람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뭔가를 생각해 왔지만 눈에 보이 지도 않는 하나님을 위하여 생각하고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해 봤던가? 항상 땅과 아랫것만을 생각하고 일시적인 땅의 것들에게만 가치를 두고 살던 사 람들이 이제 하늘의 것과 위엣 것, 영원한 것들을 생각하고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지금 모세와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어넣어지 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의 보이시는 식양, 곧 모세가 보고 있는 성막의 식양은 아주 구 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성막을 덮는 앙장(7절), 성막과 광야를 구분하는 널판 (담, 18절), 성막을 서로 지탱해 주는 띠(26절),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장 (33절) 등을 실제로 만들어져야 할 모습과 똑같이 보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재료와 색갈 크기와 용도까지 하나님은 모세에게 꼼꼼하게 모두 보여 주시 고 또한 일일히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중이다. 나는 바로 이런 모세의 경험이 제일 부러워... 모세가 자기의 육신의 눈으로 지금까지 봐 왔던 건 세상이다, 지겨운 사람들이고 양들 혹은 다른 짐승들이다. 세상의 것들만 항상 보아왔 고 세상의 것들에만 익숙해 왔던 모세가 지금 세상과 전혀 다른 것들, 지금 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해 오지 않았던 새 것 즉 성막을 영상과 음성이 조합 된 비디오로 지금 보는 중이다. 육신의 눈으로? 아니...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다른 눈?으로 본다는 거다.

 

야, 만득아! 넌 지금까지 뭘 보면서 살아왔냐? 세상 것과 육신의 것들 만 보면서 살아 왔쟈? 단 한 순간, 단 1초라도 육신의 눈이 아닌 다른 눈으 로 세상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본 적이 있냐? 환상을 본 적이 있다구? 그러나 환상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것들이라고 할 수도 없지, 환상을 봤 다고 떠들다가 삼천포로 한 참을 빠진 사람들이 어디 한 둘 이래야지? 만약 에 니가 하나님의 보이시는 것을 한 순간이라도 본 경험이 있다면 넌 그 경 험때문에 세상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할 것이며 이 경험이 네 평생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붙는 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더니 이번에 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보이 시는 식양을 보는 중이다. 모세는 이 경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40년간 인도할 수 있었고 많은 역경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 경험으로 모세는 생명과 힘과 지혜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창세기를 비롯한 모 세오경을 저술하기까지 한 거다. 모세가 본 건 불 타는 떨기나무, 성막뿐 아 니라 에덴 동산의 모습, 아담과 하와의 모습 아니 그 보다 먼저 하나님의 세 상을 창조하시는 모습과 음성을 모두 목격하고 경험한 것이다.

 

성막이 사람의 손을 통하여 광야라는 세상에 세워 지듯 똑같은 성막이 만득이 니 맘속에 새겨져야 한다. 성막이 광야에 세워지는 건 성막이 맘 속 에 세워지는 걸 예표한다. 성막이 광야에만 세워지고 맘속에는 새겨지지 않 는다면 광야에 세워지는 성막은 단순한 종교적인 형식과 우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성막이 맘속에 새겨지는 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이시는 식양을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 옛날에 만득이가 당구에 미쳤을 때 그 당구대가 맘 속에 새겨져서 버스를 타도 사람 대가리가 당구공으로 보였고 식탁을 봐도 당구대로 보여서 쓰리쿠션을 돌리는 그림이 항상 떠올랐었걸랑, 바둑에 미친 사람은 바둑판이 없어도 그 맘속에 바둑판이 새겨져서 바둑알이 왔다갔다 한대는데 그처럼 성막이 맘속에 새겨져봐라...

 

성막을 광야에 세우는 일은 기술과 노력과 시간과 재료 등등이 필요하 지만 성막을 마음속에 세우는 일은 깨닫는 게 필요하다. 그건 시간이나 노력 그리고 기술을 초월하는 일이고 그것은 사람이 세우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성막을 마음 속에 세운다는 건 예수를 경험하고 예수를 깨닫고 예수를 사랑한다는 거다.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하나 님의 것이라고 해도 없어져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막을 지금까지 간직하지 못했다. 어디 모세의 성막만 그런가? 솔로몬이 지었던 화려한 성전 역시 모두 파괴되어 그 원래의 모습은 지금 없거든, 이 없어질 것들을 하나 님은 왜 갖은 폼을 다 잡아가면서 세우라고 하셨냐? 외세의 침략에 노출되 면 없어질 껄 뻔히 아시면서..., 인간의 강제적인 파괴 행위가 아니더라도 그 까짓 나무나 금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세월이 가면 자연적으로 변 하고 썩고 없어지는 건데 그딴걸 왜 만들라고 하셨을까? 건 나도 모르겠고 하여간 성막은 마음 속에 세워져야 한다는 거 하나는 확실하게 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광야에는 세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세우질 못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목격하면서도 그 예수를 죽이고 말 았다. 예수를 목격했다는 건 모세가 하나님의 보이시는 식양을 봤다는 것 보 다 훨씬 더 큰 특권인데 이 특권을 누리지도 못하고 성막을 보존하지 못하 듯 예수를 보존하지 못했고 아담이 에덴을 지키지 못했듯 이스라엘은 그들 의 율법과 성막을 지키지 못했다. 못할 수밖에 없고... 오늘도 똑같은 이스라 엘 후예들이 교회에서 난리를 벌이고...

 

   

성막과 복음

하나님을 만나는 길

1.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본래의 인간은 아닙니다. 고장난 인간입니다. 고장난 자동차는 정비공을 만나야 하듯이 고장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고장난 물건을 누가 가장 쉽게 고치는가? 물건을 만든 사람입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병원의 의사를 찾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완전하게 모든 병을 고칠수 없습니다. 또한 의사는 모든 병의 원인을 다 알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사가 사람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리에 중심에 있는 명문공원에 대형시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루는 시계가 고장이 나서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아쉬워 했고 빨리 고쳐 달라고 아우성이였습니다. 시당국은 기술자를 보내서 시계를 고치려 했지만 아무도 고장난 시계를 고칠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많은 기술자들이 동원이 되었지만 고치지 못하고 나중에 시계를 만든 사람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잠시 조사하더니 그 자리에서 간단하게 시계를 고쳐버리고 만것입니다.

고장난 것은 그 물건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고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병들었을 때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잘 고치실수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공부하고 연구해서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오묘하고 신비한 인간의 구조를 다 공부할수 없고 완벽하게 알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의사가 고칠수 있는 병은 극히 제한 적입니다. 한정되어 있습니다. 발달한 현대의학으로 고칠수 없는 병이 훨씬 많습니다.

 

성경 욥기 11:7절이하에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사람이 사람을 다 파악할수도 없고 알수도 없습니다. 사람의 신체구조와 정신구조만 하더라도 엄청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조사결과를 보면 참으로 인간의 신체 구조란? 신비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너무 신묘하게 창조하셨습니다.

 

(1) 몸의 열생성의 신비 : 전자동 냉, 온방 조정장치로 하루 평균 2,500칼로리의 열을 발하는데 25잔의 커피를 끓일수 있는 열량입니다. 신체의 각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 뇌는 자율성 온도 조정장치요, 몸이 덮거나 추우면 대뇌에서 혈액 순환과 땀으로 열의 발산량을 자동으로 조정합니다. 약 천만개의 신경 세포로 된 뇌는 0.07볼트의 전기를 자동 생성한다고 합니다.

 

(2) 눈의 오묘함 : 눈은 30만개의 회로로 대뇌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꽃을 보면 수천개의 회로가 즉시 작동해서 꽃의 크기, 꽃의 모양, 꽃의 색갈을 구분해서 대뇌에 *아름답다*라고 보고한다고 합니다. 눈은 자동조절입니다.(완전자동, 반자동이 아님) 아무리 세밀한 카메라도 눈처럼 자동조절되는 것이 없습니다. 안구에는 약 1억만개의 신경 세포가 잇어서 거리와 광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며, 색상을 구별해 주기도 합니다.

 

(3) 청각의 오묘함 : 피아노의 건반은 88건반이지만 귀는 1,500개의 키보드가 있다고 합니다. 청각 신경은 극도로 예민하여 방음 장치를 잘하면 혈괸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도 들을수가 있다고 합니다.

 

(4) 심장의 오묘함 : 심장에 연결된 혈관을 한줄로 연결하면 1만 마일이 넘으며(미국에서 한국의 거리보다 더 길다) 하루 평균 10만번 이상 고동친다. 과로할 지경입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하루에 10만번의 일을 계속하게 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장은 1초단 15분지4초씩 휴식을 취하므로 하루에 6시간씩 쉬는 꼴이 꼴이 됩니다. 결국은 사람이 하루에 6시간만 휴식해도 살수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5) 조직의 신비 : 얼굴의 생김새를 보십시요! *머리카락이 없다면? 비가 오면 비에 머리가 적시고, 눈이 오면 눈에 적시고, 겨울에 춥게되고, 태양이 뜨겁게 비추이면 가장 중요한 머리가 뜨거워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눈섭을 보십시요! 땀이 나거나 비를 맞으면 눈안으로 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사전에 눈위에서 차단하여 양쪽으로 흐르게 한 것입니다.

*눈의 오묘함을 보십시요! 만약에 눈이 뒤에도 하나 달렸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사람은 겁이 많기 때문에 뒤에서 적이 죽이려고 쫓아오는 것을 보고는 도망칠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 잘 도망할것 같지만 정반대라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뒤통수에도 눈을 하나더 달아 놓을법도 한대 앞에만 눈을 두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은 앞만 바라고 살아야 될줄로 믿습니다.

*코도 그렇습니다. 콧구멍이 밑을 향하고 있음을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할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코가 하늘을 향했다면 비가 오면 빗물이 코로 들어갈 것이고, 눈이 오면 눈이 들어가서 재체기 하느라 아무일도 못할것입니다.

*코와 입을 가까이 붙어 놓은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입 바로 위쪽에 코가 있어서 음식을 먹을때 코가 먼저 냄새를 맡습니다. 독한 냄새를 내는 것은 좋지 않는 것이니까 코가 냄새를 맡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5) 마음의 신비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가 없습니다. 그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알게하고,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은 마음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알수 없고 진정한 사랑도,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느낄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13-14절에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우리가 성막을 공부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원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본래의 삶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본래의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고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는 삶이요 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데살로니가전서 5:16절이하에서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러한 본래의 삶을 회복하는 그 길을 발견하게 하는데 있어서 성막을 공부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축복받은 피조물이지만(창1:27-28절)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절)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죄악을 범하므로 그때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그 누구도 허물수 없는 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다투거나 할때 원수지고 담을 싼다고 하듯이 그리고 그 담이 허물지 않고는 서로 화목할수 없듯이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 하므로 생긴 담이 허물어 져야 하나님과 화목할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었습니다.(히9:28)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사도행전 4:!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아담은 가죽옷을 지어입고 하나님을 만날수가 있었습니다(창3:21) 그리고 가인과 아벨은 제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4:1-4). 그후 노아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돌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창8:21-22; 15:12-21; 46:13). 그러나 모세 이후에는 하나님을 성막안에서 만났습니다.

출애굽기 25:22절에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이란 본래 "미시칸"이란 뜻으로 "거처한다*라는 뜻입니다. 성막에 하나님께서 계셨으므로 성막을 공부하면 하나님을 만날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약도*입니다. 처음 찾아가는 길은 필수적으로 약도를 소지해야 길을 헤메이지 않고 찾아갈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아갈수 있도록 그려놓은 약도와도 같습니다.

 

2.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활을 알수 있게 합니다.

 

성도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생활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성령의 존재를 획신하고 그를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시고 늘 인도함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가장 철저한 성령의 인도와 가장 분명한 성령의 인도를 성막을 통하여 발견할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동안 광야에서 무려 42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때 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자의로 옮겨 가거나 움직였던 것이 아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구름기둥이 하늘에 뜨는대로 나아가고, 불기둥이 버섯처럼 퍼져 있으면 안전하게 머믈수가 있었습니다.(출40:34-38) 성막 시대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오늘날 성령의 역사와 동일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성령은 다음과 같이 역사합니다.

 

1) 출발신호입니다.

출40:36-37절에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생활하면서 자유롭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약2,000명이나 되는 천부장 회의에서 떠날 날자를 다수결로 결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12명이나 되는 족장회의에서 결정하여 행동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의 공동체는 민주화되면 그때 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는 민주화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신본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좀더 쉬고 싶어도 구름기둥이 피워 오르면 떠나야 하고, 더 나아가고 싶어도 불기둥이 버섯처럼 피워오르면 머믈러야 합니다. 성령의 출발신호를 들어야 합니다.

 

2) 방향신호입니다.

출애굽기40:38절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리갈까 저리갈까? 전혀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 필요도 없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따라서 행동하면 그만입니다. 오느날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방황할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근심이나 걱정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3. 영혼의 종합진단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성막은 영적 종합병원과 같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슨병인지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성막에서 이러한 영적인 도든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신앙생활의 전체를 한눈에 파악할수 있게 하고 믿음생활의 완벽한 모형을 보여주는 것이 성막입니다. 마치 주부가 식단을 짤때 여러가지 음식으로 다양한 영양가를 섭취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듯이 영적인 양식을 다양하게 섭취할수 있게 해주는 곳이 성막입니다.

1) 성막문에서?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2) 번제단에서? 나의 죄는 무엇인가? 나의 죄를 예수 피로 씻음받을수가 있는가? 그리고 용서함 받아서 의인이된 확신을 가질수 있는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수가 있습니다.

3) 물두멍앞에서? 나는 죄를 버리고난후 성결된 삶을 살고 있는가?

4) 촛대앞에서? 나는 빛된 사명을 다하고 있는가? 아직도 어두움에서 살고 있는가?

5) 떡상 앞에서? 나는 헌신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의 양식으로 삼고 있는가?

6) 분향단 앞에서? 나는 기도를 잃어 버리지 않았는가? 기도하면 응답된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7) 법궤앞에서?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부활할것을 믿고 있는가? 마른 지팡에서도 싹이 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가? 나는 날마다 영혼의 만나를 먹고 있는가?를 알수 있게 합니다.

 

 

 

결론

성막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도가 성막을 잘배우고 알아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하여 보여 주시고자하는 진리를 알아 오늘날 악하고 음란하고 어려운 광야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성막은 성경에서 50장을 활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하나님께서 성막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천지창조가 중요하지만 고작 11장만을 활애해서 기록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겨우 14장만 기록하고 있음을 보아서 *성막"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목 : 울 타 리

출애굽기 27:9-19

성막의 울타리에 대한 기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규빗*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울타리를 공부하기전에 먼저 "규빗과 히브리사상"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1 . 규빗과 히브리 사상?

 

"규빗"의 정의는?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손가락 끝에서 팔끔치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규빗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각 개인마다 다릅니다. 개인에게 맞도록 길이가 *규빗*으로 정해졌습니다. 1규빗이라 함은 사람마다 적용되는 것이 다릅니다. 44Cm-55Cm까지 입니다.

예를 들면 가로,세로,높이 각각 1인치의 상자를 만들어 오라고 학생들에게 과제를 냈다면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크기의 상자를 만들어 올것입니다. 그러나 규빗의 적용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각자 상자의 크기가 다를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팔길이가 다르게 때문입니다.

 

개인을 중요시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김서방에게 가로 100규빗, 새로200규빗만큼 땅을 차지하라. 그렇다면 김서방의 팔끔치 만큼의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한 박서방에게도 역시 하나님게서 똑같이 말씀하셨다면 박서방의 팔끔치만큼 차지하게 됩니다. 박서방의 땅이 김서방의 땅보다 작았다면 그 이유는 박서방의 팔끔치 탓이지 하나님의 편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대로 채워주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각자의 신앙철학이 다를수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개인의 신앙철학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시골 청년의 오해

 

경상도 시골에서 취직하려고 서울에 올라온 돌쇠가 취직은 생각대로 되지 않고 가져온 돈은 떨어져 가고 배는 채워야 되겠기에 호떡짐에 들어가서 "아저씨 호떡 퍼뜩 주이소" 호떡집 아저씨 왈, "호떡은 여기 있고, 퍼떡은 없는데" 하더라는 것이였습니다. 호떡을 빨리 달라는 말을 잘못 알아 들었습니다.

울타리의 모양

 

성막의 울타리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의 높이가 약2.5미터(5규빗)가 되어 사람이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성막안의 모습을 볼수없게 되어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밖에서 보면 울타리만 보이게 됩니다. 성막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수가 없는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성막안이 보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놓은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막암을 넘겨다 볼수 있도록 보통 사람의 키보다 머리하나 정도 높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울타리를 넘겨다 보는 것은 뭔가 수상한 사람임이 틀림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삼하11:1-3절에 보면 아름다운 미모의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다윗이 그만 울타리 넘어로 엿보게 된것이 화가 되어 간음 죄를 범하고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이며 다윗 자신에게는 충직한 부하인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죽이게 되고 사람을 죽이는 죄를 범하므로 나중에 그의 인생의 최대의 희망이였던 성전건축을 할수없게 된 것입니다. 울타리는 넘어가거나 넘겨보면 화를 당합니다.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도둑도 대부분이 담을 넘어 침범합니다. 성막은 예수의 모습인데 울타리 안에 들어가야만 예수를 볼수가 있습니다. 성막의 울타리는 동쪽의 문외에는 모두 세마포로 둘러 쳐져 있습니다.

 

울타리의 재료

 

울타리의 60개의 기둥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놋받침이 있습니다. 고리는 은고리입니다. 성경에서 놋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세우고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하는 말은 모두 예수를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하셨습니다.(요4:46-47) 예수를 구원의 구주로 바라보는 사람은 다 구원을 얻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모두 예수를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외예가 있는데 장님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않됩니다.

예를 들면 당시에 요즘 사람들처럼 눈이 나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미하게나마 장대위의 놋뱀을 본 사람은 고침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까이서 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나 상관없이 고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밖에서 볼때 세 부분이 보이게 됩니다. 성막을 둘러 싸고 있는 세마포가 보이고, 세마포를 지탱하고 있는 놋기둥입니다. 또한 은고리입니다. 세마포는 성결을 의미하고 놋기둥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또한 금이나 은은 변하지 않는 믿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울타리가 주는 영적 의미는 십자가에서 만이 믿음으로 성결하게 될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울타리의 의미

1)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울타리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안은 보호를 받지만 밖은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방주안에 있던 노아의 식구들은 보호를 받았고 방주밖에 있는 이는 모두 죽었습니다. 성경은 *도피성*라는 성이 나오는데 죄인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성입니다. 비록 살인자라 할찌라도 도피성 안으로 도망하면 아무도 손을 못대도록 보호합니다(민35:26-28)

 

2) 울타리 안은 안전합니다.

 

울타리 안은 안전하지만, 밖은 언제나 화가 미치는 곳입니다. 울타리의 기둥은 40년간 단 한번도 고장을 일으키지 않고 안전했습니다. 말세에는 3대 화가 있겠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8:13 >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1) 죽고 싶어도 죽을수도 없는 화(계9:6)

(2) 성전밖 마당만 밟는자의 화(계11:1-2)

(3) 불신자에게 오는 화(계13:8-9)

울타리 밖에서 구원받지 못한자들에게 있을 화 화 화입니다. 울타리 안이 안전합니다.

 

얼마전에 죽어서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철스님을 잘압니다. 죽은 그의 시신을 화장시켰는데 *사리*가 130개나 나와서 불교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10년동안 장좌불하 했습니다.(앉아서 잠을 자는 것)

*20년을 생식만 하고 살았습니다.(삼지 않고 음식을 먹음)

*옷한벌로 50년 생활했습니다.

*이쑤시게 하나로 30년 사용했다고 합니다.

세상과 죄를 이겨 보려고 고행과 절제의 생활을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한 말은 충격과 경악입니다.

 

"내가 고행을 많이 했는데 나의 해결되지 않는 죄가 *숭의산*보다 더 높구나" (참고:숭의산? 불교에는 숭의산이라는 상징적인 산이 있는데 그 높이가 112만 Km나 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죽게 되면 내 몸이 천갈레 만갈레 찢어져 *아비규환*지옥에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참고:불교에는 8가지의 지옥이 있는데 *아비*와 *규환*이라는 지옥이 가장 무서운 지옥입니다) *이 글은 공개적으로 발표된 글입니다.

 

이것은 울타리 밖에 있는 구원받지 못한자의 당한 *화* *화* *화*입니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 있는 구원받은 자들은 안전합니다. 앉아서 잠자지 않고 침대에 누어자도 천국갑니다. 건강을 위하여 생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러지 않고 고행을 위하여 생식하지 않고 진수성찬을 먹어도 됩니다. 옷 한벌로 50년을 살지 않고 여러벌옷을 갈아 입고 살아도 됩니다. 밥 먹을때 마다 이쑤시게 갈아도 천국갑니다. 천국은 행위로 얻는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롬3:28).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를 가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크나큰 축복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3) 울타리는 소유를 의미합니다

 

울타리안의 모든 것은 주인의 소유입니다. 주인은 자기 땅에 울타리를 두르게 됩니다. 주인의 것과 주인의 것이 아닌 것의 경계가 바로 울타리입니다. 성막의 울타리안은 모두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므로 울타리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요 밖에 있으면 마귀의 식구입니다.

 

이사야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구원받은 성도는 그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눅15:10)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의 생명과 바꾸었습니다.

 

4) 공급 : 울타리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공급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7절말씀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결론

 

성도의 마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막에 아무도 넘겨보지 못하게 하고, 또한 보호하기 위해 성막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보호했듯이 성도는 마음의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밭*에 비유했습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릴때 옥토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린다고 했습니다. 밭과 길은 다릅니다. 밭은 울타리가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지만 길은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아무나 다닐수가 있습니다. 사람, 소, 개, 자동차등등 아무나 다 다닐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옥토같아야 할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리게 됩니다. 성도들은 마음의 울타리를 쳐서 아무나 지나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고전4:20)

 

 

 

 

 

 

 

 

 

 

 

 

 

 

 

 

 

 

 

 

 

 

 

제목 : 말뚝과 줄

출애굽기 27:19; 35:18

성막은 광야에 세워졌습니다. 광야는 기후가 좋지못합니다. 날씨가 변화무쌍한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야에 세워진 성막은 40년동안 한번도 사고를 당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40년동안 성막을 향하여 폭풍우도 쳤을 것이며 그러나 성막은 움직이거나 넘어지지 않고 견고하게 이겨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이 성막이였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생각하면서 지은시가 시편91편입니다. 시편 91: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시편 91:7,9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여기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란 ?

곧 전능자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한다는 것은 그룹천사들의 날개아래 거한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성소의 천장은 4색실로 짠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안의 제사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천사의 날개아래 있기 때문에 모든 질병과 위험에서 완전하게 보호를 받았으며 편히 쉴수가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그리스도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막안에 있는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안의 제사장이 영원한 보호를 받았듯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성도는 이 땅위에서 또한 영원히 보호와 평화를 누릴수가 있게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를 헤칠자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막의 견고성에서도 볼수가 있습니다. 성막의 견고성은 지난주에 공부하셨듯이 뜰의 울타리와 성소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세웠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울타리만 해도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무려 48개에 달하는 널판에(한개의 널판에 두개의은받침을 받침) 96개의 은받침위에 세워졌으며 또한 밖으로 조각목에 금을 입힌 4개의 띠를 띠우고, 안으로 역시 조각목에 금을 입힌 1개의 띠를 띄웠기 때문에 견고하기가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견고하게 세운 벽위에다가 네겹으로 지붕을 올려 놓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의 기후나 아무리 억센 비바람도 방지할수가 있었습니다.

 

 

 

 

말 뚝

이렇게 성막을 견고하고 안전하게 붙들어 주는 것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말뚝과 줄입니다. 그것들은 성막 주변에 깊숙히 박혀서 줄을 맬수 있도록 해주는 노출되어 있지 않는 말뚝과 이 말뚝에 줄을 단단하게 묶어서 성소의 지붕과 성막뜰의 울타리를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 주는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그래서 성막은 말뚝과 줄의 역활로 40년동안 사막의 어떤 강풍이나 폭풍이 성막을 사정없이 몰아쳤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막 자체가 안전하고 견고했기 때문에 성막안에 있는 제사장은 안전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자들도 그처럼 안전한 것입니다. 말뚝의 사명을 가진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제자리를 지킬수 있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찾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얻어쓰고 갚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어느날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거기서 빚주인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대낮에 용빼는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벌거벗고 도망을 할수가 없어서 꼼짝못하고 잡혀서 돈을 갚아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하면 나중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되는 날이 있습니다. 그때는 용빼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도망할수가 없습니다.

 

1) 안전한 이유 ?

 

이 천막의 말뚝을 영어성경은 *핀* *못* *말뚝*등 여러가지로 사용합니다. 이사야22:23-24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단단히 박힌 못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2:23-24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예수님은 잘박힌 단단한 말뚝과 같습니다. 이 말뚝에 나를 메고 살면 결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의 특성중에 하나는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는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초원에 양들을 풀어 놓으면 제각기 마냥 흩어지기만 합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지 않으면 한없이 흩어지고 돌아올줄을 모릅니다. 양들은 한 여름철에도 떨어져서 눕지 않고 서로 붙어서 눕는다고 하니 얼마나 단순한 짐승인지 상상이 됩니다. 미련하고 아둔한 짐승이 양입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러나 양의 또하나의 특성은 양은 미련하지만 양이 사는 것은 목자의 음성을 들을줄 안다는 것입니다. 양은 미련하여 제갈길로 가다가도 목자의 음성이 들리면 그 소리를 듣고 순종하는 것이 양입니다.

 

요한복음 10:4-5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미국 시골에 가면 목장에 소나 양들을 키우는데 울타리를 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시골에 가면 미국처럼 넓은 땅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짐승을 줄로 메고 말뚝에 묶어 놓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제각기 딴길로 가버리고 말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마치 울타리 없는 목장과 같고, 말뚝에 메여있지 않는 짐승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정욕을 헤메이며 따라 살다가 고통을 받고 결국에는 멸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있는 인생은 울타리가 있는 목장과 같고 말뚝에 메여 있는 짐승과 같아서 주인의 보호와 돌보심 가운데 인도함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울타리와 같고 말뚝과 같습니다.

 

(복음성가) 멀고 험한 이 세상길 정처없는 나그네 길.

 

말뚝의 사명이란 ?

 

자신을 알고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말뚝임을 알고 무슨일이 있어도 자기의 자리를 지켜야합니다.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남을 탓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교회에서 세례식을 하는데 목사님께서 한사람씩 차례대로 세례문답을 하였습니다. 그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 한분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십니까?* *예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집에 있는 못된 며느리 년 때문이죠....* *내 며느리는 죄를 많이 짖는 사람이랍니다...

 

아직 말뚝의 사명을 깨닫지 못한 할머니이십니다. 주님은 이웃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기 보다 먼저 나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을 때 비로써 교회를 굳세게 하는 말뚝이 될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이러한 문제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할 시급한 일입니다.

성막에서 말하는 *줄*은 성막의 여러 부분들은 서로 든든하게 묶어서 요동하지 않게 하는 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줄*의 의미는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이 되고 있는 *사랑*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에 관하여 호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신자들이 세가지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1) 믿음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 소망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로마서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3) 사랑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성도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누릴수도 없고 축복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축복을 모두 놓치고야 마는 것입니다. 또한 소망이 없이는 결코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기쁨이 없습니다. 육적인 기쁨은 한계가 있고 완전한 기쁨이 아닙니다. 춘향이가 이도령을 만나야 온전한 기쁨이 있고, 견우가 직녀를 만날 때에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을 만나고자하는 소망중에 온전한 기쁨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줄은 약해서 끊어지기 쉽고 두줄도 쉬 끊어지기 쉬우나 삼겹줄은 단단하여쉬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결줄을 붙들어 믿음에서, 소망에서, 사랑에서 덜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제목 : 번 제 단

출애굽기 27:1-8절.

성막의 동쪽문으로 통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이 번제단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여러가지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드렸던 제사를 구분해 보면 크게 5가지의 제사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등입니다.

 

번제단의 뜻

*단*은 *미쯔바하*라는 말로써 *동물을 학살하다* *죽이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번제*는 *오라*라는 말로 *올라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전체적인 의미는 *동물을 죽여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단의 재료

 

조각목을 놋으로 입혀서 만들도록 했습니다. 조각목은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합니다. 놋은 물론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버림받은 조각목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아니면 도져히 구원 받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사람이 브라질에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미국대사가 아무리 간청해도 국가법에 의해 사형을 시켜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대사는 사형수에게 미국 국기를 씌웠습니다. 그리고 "죽일테면 죽여 보아라"고 외쳤습니다. 저들은 차마 미국 국기를 쏠수 없었습니다. 국교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국기를 씌웠기에 살았습니다. 버림받은 인간도 십자가로 싸야 생명을 얻을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불이 쉬 타버리고 물에 쉽게 썩어져 버릴 조각목을 놋으로 싸서 불과 물에도 견딜수가 있게 되듯이 유한한 인간은 십자가의 튼튼한 능력으로 쌀때 비로써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크기

 

가로 세로 각각 5규빗(2.5미터)이며, 높이가 3규빗(15.미터)입니다.

성경에서 5는 고통의 숫자입니다. 온갖 병신들이 몰려드는 솔로몬 행각은 5기둥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 있었습니다. 번제단은 가로도 5규빗, 세로도 5규빗입니다. 죄와 이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고통의 경험입니다. 짐승이 죽여서 불에 타는 것은 고통의 모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고통의 절정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와 사망과 공통과 저주를 짐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처리해 주셨으므로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는 사망과 저주의 노예에서 영원히 해방되었습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믿으면 그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라 살면 그만인 것을 가지고 의심하고 짧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쪼개고 분석하고 계산을 하다가 그만 스스로 포기해 버리고 신앙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고대 시인 호머의 자살동기는 지금까지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전설이 그의 자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전해져 오고 있다. 시인이 길에서 서너명의 낚시를 다녀오는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시인이 물었습니다.

"고기를 얼마나 잡았느냐?"

한 아이가 대답합니다

"잡은 것은 다 버렸고 잡지 않는 고기는 바구니에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자 보십시요"

시인은 이 아이의 말을 밤새도록 생각을 했지만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아이의 말 한마디도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이 살아서 무얼하느냐며 자신의 우둔함에 너무나 실망하여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의 이말은 단순한 농담이였다고 합니다. 고기를 한마리도 못잡았다는 말을 시인을 놀려 주려고 농담으로 한말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 스스로 고민에 빠져 죽어갔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전하고 단순 할 때 진리는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단의 모양

4군데 4개의 뿔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생명의 뿔*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에 반역한 아도니아가 도망가서 제단뿔을 부여 잡고 있었습니다. 아도니아는 반역하는 즉시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이때 솔로몬의 병사가 아도니아를 잡으려 왔습니다. 그러나 아도니아가 제단뿔을 붙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왕기상 1:51

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 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하기를 솔로몬 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

 

제단뿔은 생명의 뿔입니다. (시18:2; 롬1:16; 눅1:68-69). 이러한 생명의 뿔은 동 서 남 북에 한개씩 4개의 뿔이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은 동서남북으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Good News)은 N(북쪽) S(남쪽) W(서쪽) E(동쪽) 복음만큼 큰 뉴스는 없습니다. 이 복음의소식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야 합니다

 

 

번제단의 특징

 

피가 있습니다

 

번제단은 언제나 피가 뿌려졌고 피로 물들어 있는 곳입니다. (레4:18,30). 또한 성경은 피훌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9:17-22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불이 있습니다

 

불이 없는 제단은 없습니다. 성막의 번제단의 불은 꺼뜨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불씨가 있었고 언제든지 불을 땡겨서 제물을 태워 드릴수가 있게 했습니다. 성경에 단의 시작도 불이였고, 성막의 시작도 불이였고, 교회의 시작도 불이였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을 받았을때 하나님은 가시떨기 나무에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출3:2-4)

 

번제물을 제단에 올려 놓으면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주셔서 제물을 태우셨습니다.(레9:24) 불이 내린다는 것은 응답과 용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에 성막의 번제단의 불을 인의적으로 만들어서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즉시로 진노를 내리십니다. 아론의 아들 나담과 아비후가 다른불로 제사를 지내려 하다가 하나님이 2명을 죽여 버리셨습니다.(레10:1-2절) 인본주위가 망하는 장면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신본주의여야 합니다. 인본주의는 망합니다. 잘되는 것 같지만 종말은 비참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 같아도 종말은 비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자녀 답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나폴레옹을 태운 말이 갑자기 이리저리 뛰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위험한 순간이였습니다. 이때 지켜보고 있던 한 병사가 목숨을 걸고 달려나가 그 말을 진정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진정시킨 병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너는 위대한 장교다"

라고 그자리에서 선포했습니다. 그 병사는 그 즉시로 장교석에 가서 앉았습니다. 한 장교가 와서 "너는 사병이니 사병석으로 가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장교입니다 !"라고 소리칩니다. "누가 그러드냐 ?"고 물었습니다. "황제 페하가 그랬습니다" 그러자 꾸짖던 장교가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사람이 바꿀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다 말할수 있는 근거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할렐루야 !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의 의롭다함을 여기시는 곳이 번제단이요, 또한 번제단의 불입니다. 교회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강단도 불이 있는 강단이여야 합니다. 또한 성도도 불이 있는 성도여야 합니다.

번제단의 기구

 

번제단에서 번제를 드릴때 5가지의 기구가 있습니다.(출27:3)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하고 또한 없어서는 않될 필요한 기구입니다.

 

재를 담는 통

 

재를 담는 통은 청소하는 통입니다. 번제단에서 태우고 남은 찌꺼기를 다로 담아서 진밖에 버리는 통입니다. 만약에 재담는 통이 없다면 성막안은 온통 재가 날려서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아니 수백번, 수천번의 번제를 드려야 하는(역사가 죠셉푸스에 의하면 하루에 성막에서 약2000번의 제사가 드려졌다고 함) 성막안에 재담는 통은 그야말로 성막안을 깨끗케 하는 귀중한, 그리고 꼭 필요한 도구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안의 부정적인 요소, 가정에 부정적인 요소를 꼭 안고 있다가 혼자 조용히 어디에 가져다 버리는 마치 재담는 통과 같은 아름다운 교인이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재를 긁어내는 부삽

 

번재단에서 탄 모든것의 재를 긁어내는 도구가 부삽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다 생기는 찌꺼기 공동생활을 하다가 생기는 고통, 시험을 모두 긁어내고 교회의 분위기, 속해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그야말로 부삽과 같은 성도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부삽과 같은 성도는 교회에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삽이였습니다. 심령속에서 병을 긁어내고, 귀신을 긁어내고, 못된것을 긁어내는 부삽이였습니다.

 

대야

 

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뺀후에 번제단에 올려 놓기 위하여 고기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 대야 입니다. 이는 전도를 의미합니다. 영혼구원을 하는 성도는 제물을 대야까지 나르는 대야 입니다.

 

고기 갈고리

 

고기 갈고리는 대야에 담아온 고기를 찍어서 제단에 넣고 타는 동안 다른곳에 떨어지지 않도록 연결을 시키는 기구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사랑의 고리를 의미합니다. 전도한 다음 교회의 공동체 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갈고리 같은 성도가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갈고리입니다.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갈고리가 되셨습니다.

 

전쟁중이였습니다. 전선이 폭탄으로 끊어져 통신이 두절되고 이제 모두 전멸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한병사가 끊어진 전선을 양손으로 붙잡았습니다. 전기가 몸으로 통하여 새카맣게 탔고 무전병은 그 시간동안 SOS를 쳐서 모두가 구출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본받는 갈고리 교인이 필요합니다.

 

그릇을 옮기는 그릇

 

불은 성령의 불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불이 언제나 있어야 합니다. 불같이 뜨거운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난후에 불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불은 실제적이여야 합니다. 그림속에 있는 불은 결코 사람을 따뜻하게 할수 없습니다. 그림속에 있는 불은 나무를 태울수도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이와같은 그림속에 있는 불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제목 : 물 두 멍

출애굽기 30:18-20절말씀

 

성막에 들어가면 제일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번제단은 제물이 있어야 하고 번제단의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까지는 여러가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까지의 과정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창22:1-14)

 

번 제

 

첫째 : 수족을 묶어야 합니다.

 

창세기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결박되지 않는 제물은 제단에 올려 놓을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을 묶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지식이 결박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결바되고 욕망이 결박되고 손과 발이 결박되어 포기할때 비로써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야곱을 보더라도 그가 속임수와 꽤와 인간적인 모든 수단이 묶여져서 지렁이 같이 되었을때 비로써 태산을 티끌로 만들어 날려 버리는 엄청난 힘을 발휘할수가 있었습니다(이사야41:13-14)

 

둘째 : 칼을 받아야 합니다.

 

창세기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묶이지 않으면 칼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수족이 묶이고 난 다음에 칼을 받는 것입니다. 칼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받는것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셋째 : 불을 붙여서 태워져야 합니다(창22:6-7)

 

불은 성경에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받아주시는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수족이 묶여져야 하고, 그리고 칼을 받아야 합니다. 칼을 받고 난후에는 불로 태워져서 재로 남아야 합니다. 결국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자아가 묶임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술을 받고 난 후에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것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 것이라"(갈2:20)

 

제주도 처녀와 육지총각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합니다. 육지 총각은 제주도는 여자가 먹여 살린다더라, 또한 제주도 처녀는 생각하기를 육지에는 남자가 책임진다더라 그래서 결혼한 부부는 서로 밀어놓고 먹여 살리라고 주장하다가 헤여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번제단은 갈보리 십자가를 의미하고, 번제단의 제물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 묶이고 창과 칼을 받고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사 하나님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십자가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십자가 위에서 시작되나 거기에서 모든것이 끝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새로 거듭난 신자들은 다음 단계로 발걸음을 옮겨가야 합니다. 그것이 물두멍입니다. 번제단에서 흘린 피로 단번에 의롭다함을 얻게 되며, 이곳 물두멍에서는 이제 구원받고 난후에 세상에서 더러워진 부정한 것을 날마다, 시간마다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은 하나님의 칭의를 말해주고 있는 대신 이곳 물두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결하게 되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물두멍의 재료

 

 

 

물두멍의 재료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보는 거울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출38:8). 여인들이 유월절 저녁에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으로 당시에는 거울을 유리로 만들지 못하고 놋쇠를 닦아서 거울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 놋거울을 바쳐서 물두멍을 만들었습니다.

 

거울은 인간의 허영과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인들이 길을 가다가도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들고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거침없이 머리를 만지고 얼굴에 화장을 하며 입술에 연지를 칠하는 모습을 볼때 거울이 이 세상의 허영을 위해 사용되는 것임을 봅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 거울을 모두 포기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모두 바쳐서 정결하게 씻는 물두멍을 만드는데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두멍은 육신과 세상의 허영, 교만 정욕과 죄로 부터 분리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거울이 처음 들어왔을때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비가 한양에 다녀오는 길에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연판장에 들어 갔더니 처음본 거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아내가 보면 깜짝놀랄 것이라는 설레인 마음으로 거울을 사가지고 집에 와서 보니 아내가 마실을 가고 집에 없습니다. 그래서 잠시 거울을 벽에 걸어두고 안방에 누어 있는 사이에 아내가 들어와서 보니 벽에 이상한 물건이 걸려 있는데 그속에 어여쁜 색시가 있거든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아내는 남편이 한양을 다녀 오면서 요망스런 계집을 데려 왔다고 생각을 하고 거울을 산산 조각내 버렸다고 합니다.

 

물두멍은 이스라엘 여인들이 거울로 사용했던 놋거울로 만들어 졌고, 또한 그 안에는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더러워진 모습을 볼수 있어서 깨끗케 씻는데 매우 중요하게 쓰여졌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3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한말로 이미 깨끗해 졌다"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아 육신은 물로 씻지만 마음은 주님의 말씀으로 씻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역시 엡5:26에서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물두멍의 위치

 

 

 

물두멍의 위치는 번제단과 성소 사이에 놓였습니다.

일단 죄를 번제단에서 피로 용서를 받은 이후에 물두멍에 올 수가 있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9:22). 번제단에서 피로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를 영접하므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범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또 범죄하게 됩니다. 그래서 물두멍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때 베드로는 주님의 발씻기심을 완강히 거부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8-10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0절에 보시면

"이미 목욕한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다마는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목욕"을 영어*Wash* 헬라어*Louo*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은 "washing to cleanse blood out of wounds" 잡아서 피를 뽑는것을 의미합니다. 이로 보건데 *목욕*의 의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심으로 깨끗하게 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얻은 성도는 이제 날마다 물두멍에서 씻듯이 하루에도 더러워진 부분을 계속 씻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두멍은 제사장이 더워질때마다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물두멍은 늘 반복해서 계속 반복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제사장이 제단이나 성막을 접근할때마다 그는 반드시 놋쇠 물두멍에 멈추어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씻는 일은 아마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주님께 묻기를 형제가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용서하리이까.라고 물었을때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마18:21-22).

 

 

물두멍의 결과

 

만일 성소에 들어갈때 수족을 씻지 않고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출30:20-21) 물두멍에서 성결해진 자만이 들어 갈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두멍에서 씻은 자들은 다음과 같은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1) 하나님의 산에 오를수 있습니다.

 

시편 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이는 물두멍에서 손을 닦는 것을 연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산에 오를수 있는 자격은 물두멍에서 손을 씻는 자만이 자격이 있습니다.(약4:8)

 

2)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욥기 17:9 그러므로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이도 역시 물두멍을 연상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손이 깨끗한자는 능력있는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만만하기 때문에 큰소리도 칠수 있고 할말을 다할수가 있습니다.

 

3) 마귀가 도망을 가게 됩니다.

 

성경에 하나의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속에는 귀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쫓겨난 귀신이 다니다가 쉴곳을 얻지 못하고 다시와 보니 그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7귀신을 더 데리고 들어와 전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마12:43-45) 나쁜 귀신을 쫓은 다음에는 성령이 임하게 하여 마귀가 다시 틈타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단을 통과한 마음은 물두멍으로 지켜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보상이 따릅니다.

 

사무엘하 22:21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내 손의 깨끗함을 쫓아 갚아 주시마고 약속합니다. 이제 물두멍에서 성결케 되었으니 성소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셈입니다. 발걸음을 성소로 옮기면 휘황찬란한 황금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성소로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해서 번제단과 물두멍을 통과해야 합니다.

 


제목 : 성막의 덮개

출26:1-14절말씀

 

성막의 *덮개*에 대하여 공부합니다.

"너는 산에서 보인 식양대로 성막을 세울지니라"(출26:30). 성막의 덮개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20개씩의 널판 40개와 그리고 서쪽 벽 6개, 모퉁이에 개를 합하여 모두 8개가 필요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붕을 받치고 있는 널판을 총48개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널판에 각각 2개씩의 은 받침이 들어 갔으니 모두 96개의 은 받침이 성막의 덮개를 받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각널판은 보이는 4개의 띠로 둘러져 있으며 안으로 보이지 않게 한띠가 둘러져 있어서 모두 5개의 띠가 있었습니다

 

1) 널판의 재료

 

널판은 조각목에 금을 입혔습니다. 인간(조각목)은 믿음(금)으로 입혀져야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성소)는 믿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나라입니다. 버림 받았던 삭게오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기생라합, 요나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성막을 받치고 있는 널판은 오직 금으로 입힌 것이였습니다. 교회의 기둥도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사용됩니다.

 

2) 널판의 띠역시 조각목을 금으로 덮은 것

 

널판의 띠는 널판을 연결시켜 움직이지 않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여 견고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교회도 오직 믿음으로 연결되어야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성막의 널판은 조각목을 사용하는데 오직 금을 입혀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만 사용합니다. 믿음의 사람만 축복합니다.

 

3) 널판의 받침

 

널판의 받침은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은은 금처럼 믿음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믿음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받침은 2개입니다. 두개의 받침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롬1:17)

이렇게 견고하게 세워진 널판위에 지붕을 씌웠는데 그것이 <덮개>입니다. 이 지붕은 피난처와 같은 것으로 제사장이 이 아래에서 자기들의 사역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지붕의 덮개는 4겹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지붕(덮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 보십니다.

 

제 1 덮개

 

출애굽기 26:1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그 첫번째 덮개는 안쪽에서 볼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이 덮개는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짠 앙장이였습니다.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짠 앙장으로 성소의 천장이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단과 물두멍을 거쳐서 성소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예배자만이 볼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성막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성소안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전혀 볼수가 없으며 그들이 밖에서 고작 볼수가 잇는 것이라고는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피가 튀기는 번제단의 처절함과 그로인한 물두멍의 씻음과 볼품 없는 거무스름한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있는 성막의 지붕 뿐입니다.

 

성소의 천장은 구성하고 있는 4가지의 색상이 주는 영적인 의미 ?

 

청색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며,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권위를 나타내며,

홍색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며,

흰색(베실)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완전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그룹천사가 수놓아져 있는데 천사는 마치 성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사장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환상을 보고 말하기를 이 그룹은 네가지 얼굴을 가졌으며, 하나는 *사람*의 얼굴이고, 하나는 *사자*의 얼굴이며, 하나는 *황소*의 얼굴이며, 하나는 *독수리*의 얼굴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4중적인 특성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얼굴을 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신이십니다.

 

사자의 얼굴을 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능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사자를 능가할만한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황소의 얼굴을 했다는 것은?

그분의 온전한 희생과 봉사와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는 순종과 헌신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4) 독수리의 얼굴을 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전능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원거리에 있는 것도 놓치지 않고 관찰할수 있는 좋은 눈을 가졌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성소안에서 볼수가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능력을 누릴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든 것은 그리스도안에 철저히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황홀한 기쁨을 누릴수가 없습니다.

 

제 2덮개

 

제 2덮개는 염소털로 만들어 짠 덮개입니다.

출애굽기 26: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앙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 한폭을 만들지며.

 

성경에는 이 염소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는 그리스도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1년에 한번 있는 대속죄일날 제사장은 염소 두마리를 취하고 한마리는 제단에서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리고 다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다 염소에게 담당시켜서 사막지대로 끌고가서 거기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놓아줍니다(레16:19-22) 이렇게 성소를 덮는 2번째 덮개는 염소털로 만들어 덮었음을 생각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또한 그의 희생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사53:6; 히9:28; 고후5:21)

 

제 3덮개

성소의 지붕을 형성하고 있는 3번째 덮개는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출애굽기 26:14

붉은 물 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웃덮개를 만들지니라

 

창세기 22장에서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한 예증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단의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수풀에 수양 한마리를 미리 준비해(여호와이레) 두셨다가 이삭 대신 번제로 드리도록 배려 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제 4덮개

 

원래 이 *해달*이라는 것은 *돌고래* *물개*등으로 불리워 집니다. 이 돌고래 가죽으로 성소의 맨 겉쪽을 입혔습니다. 이 돌고래는 나일강과 홍해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그 가죽의 색깔이 우중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소안에 들어가면 홍색, 자색, 청색, 베실로 짠 휘황찬란한 색상과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장면의 천정과 떡상에 12개의 떡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왼쪽편에 7개의 금촛대에 불이 켜져 있고, 또한 휘장 바로 앞에는 금향단에서 아름다운 향이 계속해서 피워오르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게 되지만 막상 밖에서 보면 우중충한 돌고래 가죽으로 만든 덮개로 둘러 놓았기 때문에 볼품이 없습니다.

 

1) 성소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겉에서 보면 힘이 없고 아무런 능력도 없으며,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교회안에는 만왕의 왕되신 예수가 주인으로 계십니다.

 

2) 성소는 주의종의 모습입니다.

 

주의 종의 겉모습은 초라한 돌고래 가죽 같습니다. 이리 당하고 저리 당하는 것 같습니다. 왼빰을 맞고도 오른 빰을 돌려 대야 하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어야 하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도 벗어 주어야 하는 나약한 것이 주의 종입니다. 이렇게 주의 종은 나약하게 보이지만 그속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도와 주시며, 천사가 따라 다니는 굉장한 존재 입니다.

 

고린도후서 6:8-10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성경에 모르드개를 죽이려다가 하만이 도리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다윗을 죽이려던 골리앗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를 죽이려던 바로가 도리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다니엘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도리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3) 성소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세상 사람들 보기에 배우지 못하고 초라하고 힘이 없어 보이지만 신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신자는 약한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구하여 얻을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결 론

 

이스라엘백성은 성소의 지붕을 덮는 물건을 모두 헌물하여 만들었습니다. 그중에서 성소의 제 4덮개로 쓰여졌던 돌고래 가죽은 저들이 애굽에서 나올때 신발을 만들어 신을려고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성소의 제 4덮개를 돌고래 가죽으로 만들어야 했을 때 기꺼이 드려서 성소의 지붕을 만드는데 사용토록 했습니다. 사실 험한 광야를 여행 할 때 신발이 튼튼하지 못한다면 고생은 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돌고래 가죽이 대단히 중요한 물건이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신명기 29:5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느헤미야 9:21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제목 : 떡 상

출 25:23-30; 레24:5-9절 말씀

 

성소에 들어가면 왼편에 등대의 환한 빛이 천정의 구룹천사의 모습을 밝혀주고, 또한 성소 안의 금으로 만든 도구들을 눈이 부시도록 빛나게 하고 있음을 볼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분향단에서 향연이 계속해서 피어 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보면 12개의 떡이 6개씩 두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떡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부터 떡상에 대하여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떡상의 모양

 

가로 100cm,(2규빗) 세로 50Cm,(1규빗) 높이 75Cm(1.5규빗)의 크기입니다.(출25:23) 만든 재료는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채의 재료도 동일하게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12덩이의 떡을 6개씩 두 줄로 나란히 놓았습니다. 떡 위에는 유향 두 그릇이 각각 놓여져 있습니다. 떡상 4면에는 떡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턱을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떡상 위에는 대접, 숟가락, 병, 유향잔 등도 보조 기구로 놓았습니다.(출25:29) 이 보조 기구들은 모두 정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릇들은 각각 용도가 있었습니다. 어떤 그릇은 향을 담는데 사용되었고, 어떤 그릇들은 소금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떡상과 떡상에 부속된 그릇들을 가리켜서 "순결한 상"(a pure table)이라고 하였습니다. 떡상과 그것에 부속된 모든 기구들이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순결한 상*에서 제사장들은 떡을 떼어 먹었습니다. 이 떡은 오직 제자장들이 서서 먹었습니다.

 

떡상의 의미

 

떡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John 6:47-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더욱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떡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번제단에서 죄사함을 받았고 물두멍에서 성결함을 받았다 하더라도, 등대의 빛의 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성소의 밑바닥은 마루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의적으로 또한 타의적으로 언제나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영생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날마다 먹으며 더욱 새롭게, 더 뜨겁게, 좀더 강하게 영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을 위해서 음식을 먹듯이, 혼을 위하여 지식을 취하듯,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바된 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떡상의 떡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로마시대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으로써 노예의 머리를 깎습니다. 그리고 난후에 바늘로 노예의 머리에 전할 메시지를 문신처럼 박습니다. 그래서 노예의 머리가 길게 되면 노예를 보내서 원하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밀속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 것입니다. 승리의 비밀이 있고, 성공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에 문신처럼 박혀져야 비로써 그리스도를 바로 전할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신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인 그리스도 예수를 메신져가 바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떡의 특징

떡상위에 아무 떡이나 올려 놓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진설병만 올려 놓습니다. 그렇다면 진설병은 어떤 떡입니까? 진설병의 특징을 알아보겠습니다

 

레마의 원칙

 

성소안의 떡상에 올려 놓아야 하는 떡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레24:5)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부서 뜨리고, 깨뜨리고, 완전히 가루로 떡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만든 떡이라야 성소의 떡상위에 올려 놓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로고스와 레마입니다. 성경전체 66권은 로고스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내게 힘을 주고 능력을 주는 말씀만이 레마입니다. 세상에 자동차가 아무리 많아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등록된 차만이 나의 소유입니다. 세상에 물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그릇으로 떠 먹는 물만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책을 수십권 가지고 있으면서 수백번 읽어도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로고스가 레마가 되어야 합니다.

 

 

 

 

로버트 슐러

 

로버트 슐러목사님이 수정교회 예배당을 지을 때 너무나 힘이 들어 포기 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쟁기를 잡고 뒤고 돌아 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눅9:62)라는 말씀이 레마로 들려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붙들고 끝까지 승리해서 아름다운 예배당을 완성할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는 레마의 말씀이 슐러목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아름다운 수정교회당은 볼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틴 루터

 

종교개혁을 했던 마틴루터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온갖 협박과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몇번이나 포기하려 했을 때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로 들려오는 것이였습니다.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히10:38)라는 말씀이 능력이 되어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서 믿음으로 일어나 당시 부패하고 썩은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이길수가 있었습니다.

 

조 용기 목사

 

조용기목사도 "너희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원하노라"(요한3서2절)라는 말씀이 레마가 되어 그에게 다가 왔을때 그가 확신을 얻어 삼박자축복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세게에서 가장 큰교회로 성장시킬수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레마로 먹어야 합니다. 고운 가루로 진설병을 만들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맷돌을 성령으로 갈아서 그 틈 바구니에서 나온 고운 가루가 되어 나온 것으로 떡, 즉 말씀을 먹어야 그것이 진짜입니다. 레마로 먹지 아니한 말씀은 먹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먹는 첫 법칙, 레마의 원칙입니다.

 

진설병은 증가의 원칙이..

떡상위의 떡은 혼자 먹는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떡상은 여러사람이 함께 둘러 앉아서 먹는 사랑의 교제의 장 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하고 떡을 떼는 것이였습니다.(행2;46-47)

 

5병2어의 역사는 5000명이 같이 떡을 나누었습니다. 떡 다섯개를 나누니까 5,000명의 성인과 부녀자들이 함께 먹을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레마가 되면 *증가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사람을 먹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1:8) 나누어 먹어서 증가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떡상위의 떡은 반드시 증가의 능력이 있습니다.

 

항상의 원칙이..

(1) 항상 떡상위에 차려져 있어야 합니다.

 

진설병은 하루 24시간 1주 7일, 1년 365일 늘 떡상위에 차려져 있어야합니다. 잠시도 떡상의 떡이 비워 있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잠시라도 우리에게서 떠나면 안됩니다. 복음은 영원합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영원하십니다. 오늘 먹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떡상위의 떡은 늘 차려져 있어야 합니다.

 

(2) 항상 등대앞에서 떡을 먹어야 합니다.

 

이떡은 아무데서나 먹는것이 아니고 등대 앞에서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빛이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캄캄한 곳에서는 음식을 먹을수가 없습니다. 떡상위의 떡은 등대의 빛으로 인하여 자유롭게 먹을수가 있다는 영적 진리의 말씀입니다. 빛된 생활을 하며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같은 아침 이슬을 먹으면서 꿀벌은 꿀을 만들지만, 뱀은 독을 만듭니다. 같은 뽕잎을 먹으면서 다른 벌레는 똥을 만들지만 누에는 비단을 만들어 냅니다. 같은 말씀을 먹으면서 마귀는 반역을 만들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빛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3) 항상 떡 위에는 유향이 놓여져 있습니다. (레24:7)

 

떡 위에는 유향이 항상 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유향과 함께 먹었습니다. 유향은 성령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떡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진설병은 기름과 함께 반죽하여(레2:5) 기름과 함께 먹었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성령없는 말씀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지고, 말씀이 없는 성령충만은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등대 앞에서 떡을 먹듯이, 성령으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천사로 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 지어다(눅1:28)

이 말씀을 받은 마리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말했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0-33절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거절하였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일이 있으리이까? 눅1:34절.

이 때 천사가 다시 성령을 마리아에게 부어 주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5절.

 

말씀만 임할 때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마리아가 성령을 받고 나자 천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 드렸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눅 1:38절.

 

떡의 신비

 

이와 같이 말씀은 성령과 함께 할 때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떡상위의 떡은 기름으로 반죽하여 구운 떡을 등대 앞에서 먹는 것입니다. 이제 성전시대에 와서는 떡상위의 떡을 철로 만든 판위에서 굽지 않고 금으로 만든 프라이판에서 떡을 구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떡을 상위에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금요일에 구워진 떡은 안식에 두명이 들고 들어 갔습니다. 두 명은 빈손으로 들어가서 먼저 구웠던 떡을 옮기는 순간 새 떡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이떡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내내 부패하지도 않고 싱싱한체 있었다고 합니다. 일주일 내내 뜨근 뜨끈하였다고 이스라엘의 전승은 전하고 있습니다.(BT. menachot 29:A) 더욱더 놀라운 기적같은 사실은 이 떡을 나누어 먹을 때 콩알만큼 떼어 주어도 먹는 이들이 배가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떡상위의 떡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떡이라는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떡을 만드는 비결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졌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BT. Yama 38:A) 떡을 굽는 것은 *가르모*가문(Garmo family)에서 맡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랍비들이 혹시 이 비밀스러운 떡만드는 기술을 탄로나 내지 않을까 해서 *가르모*가문을 늘 지켜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르모가문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 졌을때에도 결코 떡 만드는 비결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개인적으로 가정에서 조차 이 떡을 만들어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성경을 주로 서기관들이 옮겨 쓰곤 했는데 울법책을 쓰는 분명한 법칙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쓰되 소가죽에 쓰지 말고 송아지 가죽에 쓰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인 송아지 가죽에 쓰지 말고 죽은 송아지 가죽에 쓰라고 했습니다. 이제 율법책을 써 내려 가다가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나오거든 쓰던 붓을 버리고 목욕하고 새붓으로 써라고 했다고 합니다. 율법책에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약 6080번이나 나온다고 하는데 계산하면 율법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기 위해서 6080개의 새 붓이 필요했고 무려 6080번이나 목욕을 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인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함은 대단합니다. 저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고 또한 그 이름을 두려워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목 : 금 등 대

출25:31-40; 37:17-24절말씀

 

우리는 성막문을 들어서면 번제단을 거쳐 물두멍에서 수족을 닦고 성소에 들어섰습니다. 모두는 휘황찬란한 성소안의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으로 기절을 할 정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정금입니다. 천장은 청색, 자색, 홍색, 흰색으로 정교하게 수놓아 짠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소에 들어설을 때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이 왼쪽의 금등대 일것입니다. 창문이 하나도 없는 집이지만 성소안이 밖은 것은 이 등대 때문입니다. 등대의 중요함은 성소안이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하다 하더라도 등대가 없으면 캄캄할 따름입니다.

 

등대의 모양

 

정금 한 달란트를 쳐서 만들었습니다. 가운데 한줄기가 있고 양편에 각각 세가지가 있습니다. 등잔은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등대의 특징

 

등대의 목적은 빛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주님께서 성도들을 가르켜서 빛이라 했는데 빛된 생활과 사명의 생활을 하려면 등대를 바라보고 등대의 법칙을 지키면 됩니다.

 

 

등대는 믿음의 법칙이..

 

등대는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금은 믿음입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믿음의 생활을 하면 됩니다. 믿음은 밤 하늘의 샛별처럼 반드시 반짝이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시대는 죄악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오직 노아의 믿음만이 빛났습니다.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는 아브라함의 믿음 만이 빛이 났습니다

 

 

등대는 고난의 법칙이..

 

등대는 금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쳐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채찍에 맞아 고난을 당하시면서 더욱더 빛이 났습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고난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금은 온전한 모양이 나올때까지 쳐서 만들었습니다

 

등대는 성령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아침 저녁으로 감람유를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감람유의 공급이 없이는 절대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감람유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등대는 자기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감람유라는 기름의 힘으로 빛을 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으로 빛을 낼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입니다.

1)옆에서 도운다

2)옆에 계신다.

3)또다른 보혜사.

 

1) summoned, called to one's side, esp. called to one's aid

1a) one who pleads another's cause before a judge, a pleader,counsel for defense, legal assistant, an advocate

1b) one who pleads another's cause with one, an intercessor

1b1) of Christ in his exaltation at God's right hand, pleading .with God the Father for the pardon of our sins

1c) in the widest sense, a helper, succourer, aider, assistant

 

겐지스 여왕

 

*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겐지스 여왕이라고 합니다. 겐지스 여왕이 신하들을 데리고 민심을 살피고 있는데 마침 사형수가 끌려가면서 "여왕님 살려주십시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겐지스 여왕이 물었습니다. 네가 정말 살고 싶으냐? 예, 여왕님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저쪽 강가에 말 3천마리의 똥을 하룻 동안에 치우면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수에게 아무리 열심히 말똥을 치운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져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사람이 3천마리 말의 똥을 치울수는 도무지 불가능한 입니다. 사형수가 있는 힘을 다해 땀을 흘렸지만 말의 똥은 줄어 들지가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앉아 있는데 보니까 마치 옆에 강물이 힘있게 흘려가는 것이였습니다. 사형수의 눈에는 빛이 나기 시작합니다. 바로 저것이다. 말똥을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띄워보내면 싶게 처리할수가 있겠구나. 사형수는 바로 옆에 세차게 흐르고 있는 강물에 말똥을 모두 넣어서 흘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3천마리의 말똥은 순식간에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겐지스 여왕이 와서 확인하고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파라클레토스" 즉, "옆에서 도왔구나"라며 사형수의 죄를 면죄해 주었습니다. 옆에 강물이 흐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성령은 옆에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사형수에게 3천마리의 말똥을 치우는데 불가능이였습니다. 그러나 옆에 강물이 세차게 흘러서 말똥을 모조리 흘려보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불가능을 옆에서 도와서, (마치 강물처럼)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Zechariah 4: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Philippians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한국의 어떤 목사님은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옆에 계셔서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손을 잡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한국 사람은 부인을 *옆편네*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옆편네라고 한것이라면 좋은 말입니다.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서 내조하고 도우고 힘을 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등대는 닮음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살구꽃은 꽃 중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따라서 열매도 가장 먼저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스도는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1 Corinthians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등대는 살구꽃 형상입니다. 빛된 생활을 하려면 살구꽃, 즉 첫열매 곧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라반과 야곱

 

창세기 30장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반과 야곱사이에 품삵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시는 물물교환의 시대입니다. 일해주고 돈으로 받지 아니하고 물건으로 받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라반의 품삯계약이란 것은 야곱에게 결정적으로 손해가 나는 계약입니다. 양이나 염소중 아롱진것, 점있는것, 검은것은 모두 야곱의 것이 되고, 그외의 것, 즉, 정상적인것은 모두 라반의 소유가 되도록 했습니다. 실상 이러한 계약은 야곱에게 있어서 형편없는 계약이였습니다. 왜냐하면 양이나 염소중에 아롱진것, 거음것, 점있는것이 태어난다는 것은 겨우 10%정도의 확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요즘에 시간당 10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겨우 1불만 받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계산에 밝은 삼촌 라반은 마음속으로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상상과 예상을 뛰어넘어 양과 염소가 새끼를 낳았다하면 점있는 것과, 얼룩진 것과, 또한 검은 새기를 낳아서 야곱은 일순간에 거부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기적은 순전히 야곱의 믿음때문이였습니다. 야곱은 라반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계약을 햇던것은 야곱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야곱은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푸른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기고 흰무늬를 내어 양때와 염소때가 늘와서 먹는 개천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양과 염소들이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개천에 와서 물을 마실때마다 얼룩덜룩한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를 보고서 새끼를 낳는데 모조리 야곱이의 새끼만 낳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버드나무는 푸르름의 상징, 생명의 상징인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풍나무는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구나무는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등대는 살구꽃 형상으로 되어 있고, 살구꽃 형상은 스리스도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빛된 생활을 할수가 있습니다.

 

등대는 완전의 법칙입니다

등대는 가운데 줄기 하나에 가지 6개가 붙어 7개의 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1은 하나님의 숫자이고 6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6일째 되는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7은 완전 숫자입니다. 6은 1가 보태져야 완전수 7이 됩니다.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 안에서만 참 안식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는 휘발유와 함께 할때 시동이 걸립니다. 물고기는 물과 함께 할때만이 활동할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할때만이 존재의 가치를 알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가르켜서 "안스로포스"라고 합니다. 뜻은 *위를 향하다*입니다. 인간은 위를 향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동물들은 땅만 보고 살아갑니다. 동물은 하늘을 쳐다볼수가 없는 존재로 땅만 보고사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땅의 것만으로는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위에 게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동물이 로케트를 타고 달나라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데 그것은 자꾸자꾸 위를 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공위성을 만들어 타고 달나라도 가보고, 이제는 우주 정거장을 만들어서 그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히 살고자는 하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등대는 양쪽 3개씩 도합 6개와 중간에 1개의 불을 합쳐서 7개의 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등대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대를 통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을 볼수가 있습니다.

 

지그 지글러

 

지글러박사가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퀴즈를 냈습니다.

소년 다윗이 용감한가 ?

육척장신 골리앗이 용감한가?

이때 거의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대답하기를 그야 물론 목동인 다윗이 용감하지요, 거인 골리앗에게 맞서서 싸운 다윗이 용감합니다. 나중에는 그것도 퀴즈냐고 야단인데 저쪽에서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하기를

"아닙니다 !."

선생님 ! 다윗이 용감한게 아니라 골리앗이 더 용감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보니 소년 다윗은 아무리 힘이 없고 작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나가서 싸우는 것이 당연하지만 골리앗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데 자기의 힘만 믿고 껍쩍대며 싸우려 나가는것이 얼마나 용감합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실 다윗이 용감한 것이 아니라 용감한 것은 골리앗입니다. 세상에는 골리앗과 같이 자기의 힘만 믿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등대는 6개의 양쪽 등과 1개의 중앙의 등이 합해서 완전한 등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도 안전한 사람이 되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만나기 전에는 어부였으나 예수와 함께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혼자 있을 때에는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 했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했을때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수가 있었습니다. 철로도 한개만으로 기차가 달릴수가 없고 두개가 합해졌을 때 기차가 달려갈수가 있습니다. 새들의 날개도 두개입니다. 하나의 날개로는 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목 : 분 향 단

출 30:1-10절.

성소안에 들어가면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이 등대입니다. 그 청명한 불빛에서 오른편에 떡상이 보이고, 정면 앞쪽으로 향연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분향단을 보게 됩니다. 그 향연이 끊임없이 피어나므로 성소안의 환경은 깨끗하게 되고(향으로 하여금 소독 작용을 하기때문) 또한 성소안은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도의 몸을 가르켜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3:16-17) 성전은 곧, 성소를 말합니다. 성소 안에는 언제나 일곱촛대에서 밝히는 블빛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음과 행위가 빛으로 밝혀져야 합니다. 또한 성소는 떡이 언제나 있습니다. 영의 양식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소안에는 향이 언제나 있습니다.

 

고전13:13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했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있어야 할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성소에 항상 있는 것도 세가지 입니다. *빛과 떡과 향*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중요한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떡과 같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와 같이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나는 것인데 무엇을 듣는 것인고 하니 *그리스도의 말씀* 곧, 성경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성소안 떡상위의 떡과 같습니다. 사람이 떡을 먹어야 살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살수가 있습니다.

 

 

소망은 빛과 같습니다

한 마디로 하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어두움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어 중에 *자수하여 광명찾자*라는 표어가 있습니다. 간첩은 신분상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생활은 어두움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이 계속해서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간첩이 자수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자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빛으로 나왔다*라고 합니다. 생명되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생활은 마치 간첩과 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두움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자유와 광명을 함께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빛과 같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랑은 향과 같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되면 먼저 얼굴이 예뻐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차림이 바뀌어 집니다. 아무래도 화장도 더 진하게 하게되고 향수도 고급으로 바르게 되어 예전과 같지 않게 그에게 가까이 가면 향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향과 같습니다. 성도가 사랑한다는 것은 향기를 낸다는 것입니다. 향기는 여러 가지가 있게 되나 전도의 향기, 봉사의 향기, 헌신의 향기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어린 아기도 똥을 기저기에 담고 있어서 똥 냄새를 피우면 옆에 가게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향과 같습니다.

 

고전13:13절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라고 했듯이 마찮가지로 성소 안에 *떡과 빛과 향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향이라*라는 중요한 진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땅 위에 사는 날 동안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사랑을 상징하는 분향단과 향에 대하여 살펴 보시겠습니다.

 

 

분향단의 모양입니다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위에 사방에 4개의 뿔이 있고, 상단 4면에는 금태로 둘렀습니다. 금고리는 양편에 두개씩 모두 4개를 만들었습니다. 그 고리에 운반하기 편리 하도록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금채를 만들어 꿰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등대의 등불을 간검할때 분향단에도 향을 살랐습니다.

 

 

분향을 통하여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을 발견합니다

분향단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랑과 향과 기도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고전14:1절에는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사랑을 따라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사랑의 비중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기도하면 응답은 즉각적입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계시록5:8절에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계시록 8:3-5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기도란? 하늘 나라의 분향단과 땅의 분향단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응답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성도가 기도 하느냐고 바쁘면 천사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느냐고 바쁘고, 마귀는 방해 하느냐고 바쁘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분향단은 기도의 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 어떻게 기도하여야 기도가 기도에서 끝나지 않고 응답에서 끝이 나는 기도를 드릴수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조건을 알아 보겠습니다.

 

1) 사랑을 따라 구하는 것입니다.(고전14;1)

 

사랑하게 되면 향기를 내게 됩니다. 이 향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기도는 사랑을 따라 할때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2)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분향단은 조각목을 금으로 싸서 만들었습니다. 조각목같은 인간은 금같은 믿음으로 기도해야 응답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마가복음 11:22-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기도를 기도로 그치지 않게 하고 기도를 응답으로 그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3) 공의의기도가 응답받습니다.

 

분향단은 가로, 세로, 각각 1규빗(50cm)으로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 졌습니다. 정 사각형의 네모 반듯함은 공의를 의미합니다. 기도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나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왕궁은 언제나 네모 반듯하게 설계해서 짓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왕궁은 공의로 정치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약4;2-3)

 

4) 향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기도를 할 때 그냥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향을 피우며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출30:34-38) 그런데 향을 피우며 기도할 때 아무 향이나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준 향을 피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준 향은 5가지입니다.

 

(1) 소합향입니다.

 

소합향은 "스트렉스"라는 향나무에서 저절로 나오는 향을 말합니다. 억지로 나무에 상처를 낸다거나 인위적으로 나무에서 얻은 향이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향을 말합니다. 즉, 가공하지 않고 저절로 나오는 향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체질화를 말합니다. 스스로 우러나와서 하는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을 받아주십니다. 우리안에서 저절로 찬양과 감사와 기도와 기븜이 가득차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계5;12)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나오는 것을 소합향이라고 합니다. 꽃의 향기가 좋은 것은 꽃은 억지로 향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할때 소합향을 태우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2) 나감향입니다.

 

나감향은 "셀피쉬"라는 조개류의 껍질을 빻아서 만든 향입니다. 껍질이 가루로 부서지듯 자아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기도하고 나면 자아가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나감향의 향기가 진동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가 바로 나감향의 기도의 모델입니다.

마태복음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겟세마네*라는 뜻은 *쥐어짠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고통스럽게 쥐어 짜는 기도입니다. 자아를 깨뜨리고 부서 뜨려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나감향의 기도입니다.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엄청난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달걀이 부서져야 병아리가 나오듯, 조개껍질이 부서져야 향이 나옵니다. 나감향의 기도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3) 풍자향입니다.

 

고무 나무에서 나오는 향으로 *소독제*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소안에는 소독제인 풍자향이 피워졌기 때문에 언제나 공기가 깨끗하고 이 공기를 마시고 사는 제사장은 그의 수명이 대체적으로 길었다고 전합니다. 회개의 기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빨래를 해야 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더러워지면 회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다윗의기도* *베드로의 통곡기도* *삼손의 다곤 산당에서의 마지막기도* 이는 모두 풍자향의 기도입니다. 풍자향을 피우면 공기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살균이 되듯이 우리도 풍자향을 피우며 기도해야 합니다.

 

(4) 유향입니다.

 

유향은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시체에 바르는 향입니다. 기도는 우리 속에 있는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유향이 타 올라야 합니다.

 

(5) 소금입니다.

 

분향단에 태우는 향에는 반드시 소금이 들어가야 합니다.(출30:34-38) 소금은 언약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무엇이든지 언약을 할 때 이 소금을 뿌렸습니다. 기도는 응답 된다는 언약을 하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금을 두고 언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금을 치고 향을 태운다는 것은, 언약을 붙들고 기도 할 때 응답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소안의 분향단에는 항상 위와 같은 4가지의 향을 섞어서 복합제로 만들어 태웠는데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향이 맵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소금을 섞어서 태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향을 태워 올렸던 성소에는 향기로운 냄새로 언제나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제목 : 휘 장

출 26:31-35절 말씀

 

성막은 세 구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는 "뜰"입니다.

 

동편문으로 성막안으로 들어가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곳은 "뜰"입니다.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아직은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번제단에서 모든 죄를 사함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참회해야 합니다. 주님도 말씀하시기를 *애통하는 자가 복있다*(마5:4) 신자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물두멍에 수족을 씻는 제사장처럼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는 "성소"입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금촛대와 금향단이 있습니다. 떡은 제사장의 몫입니다. 제사장은 성소안의 떡을 먹을수가 있습니다. 촛대의 불은 항상 밝혀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향단에는 향연이 계속되는 곳이 성소입니다. 이곳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해야할 의무와 사명을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떡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촛대는 빛입니다. 또한 향연은 기도입니다. 말씀과 빛과 기도는 성들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와 사명입니다.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날 온백성들의 죄를 들고 들어가서 사함을 받게 됩니다. 지성소안에는 법궤가 있고 법궤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깨진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위에는 속죄소가 있어서 그룹천사가 날개를 펴서 덮고 있습니다. 또한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3구분으로 되어 있는 성막은 *휘장*이 두 군데가 있는데 오늘은 두 군데의 휘장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번째의 휘장

 

 

 

성막에는 2 군데의 휘장이 있는데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곳에 휘장을 만들어 가리라고 했고(출26;36-37) 이 휘장은 제사장이 날마다 성소를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합니다.(히9:6) 제사장이 하는 일은 뜰에서 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나 수족을 물두멍에 씻는 것처럼 일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들에 반하여 성소안에서 하는 일은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봉사와 헌신과 전도와 주일 성수를 하는 것과 심지어 헌금을 드리는 일까지도 남을 위하거나 스스로를 위하는 행위가 아니고 오로지 제사장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튼 뜰과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은 날마다 제사장이 드나들수 있습니다.

 

첫번째 휘장의 중요성은 성소를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전에 혹시도 모를 도둑을 방지하고, 또한 짐승들의 침입을 막는 역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첫번째 휘장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듯이 첫번째 휘장의 영적인 의미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는 첫번째 휘장입니다. 세상의 풍조와 인본주의의 바람을 막아내야 합니다.

 

 

 

두번째의 휘장

 

이 휘장은 성소(The Holy Place)와 지성소(The Most Holy Place)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휘장을 말합니다. 그 휘장의 재료는 첫번째 휘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과 가늘게 꼰 베실로 혼방된 것이였습니다. 이 두번째 휘장의 원형(The antitype)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휘장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러므로 성소안의 휘장은 신약에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하나님앞에 나아갈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휘장의 모양입니다

휘장의 모양은 그룹으로 수놓은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고 계시는 지성소는 언제나 천사가 지키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무나 볼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 휘장을 지나는 사람만이 이 휘장을 지나서 볼수가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담을 만들엇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후에 휘장이 나타났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담도, 걸림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세상에 들여 오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건널수 없는 강이 생겼고, 넘을수가 없는 담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벽이 생겼다는 것은 휘장이 생겻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처럼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나누는 역활을 했습니다. 죄지은 인간들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절대로 만나지 못하게 갈라 놓았습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볼수가 없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누군가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는 이 휘장을 갈라 놓아야 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 휘장이 되셔서 찢으려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Luke 23:45-46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Matthew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Mark 15:37-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육신이 찢어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찢어져 내렸습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내었던 모든 장벽이 허물어 지는 엄청난 사건의 순간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수가 있는 대로가 활짝 여렸습니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순간을 묵상하던 어떤 시인은 견딜수 없는 감격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날 하늘을 날으던 새들은 캄캄한 창공의 구름을 향해 "다 이루었다!" 하고,

그 구름은 더 높은 구름에게 외치기를 "다 이루었다!"하고,

다시 그 구름은 더 높은 영광의 구름을 향해 "다 이루었다!"하고,

다시 영광의 구름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있는

영광의 구룹들과 천사들에게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장이 말하기를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여,

하나님과 인간들의 사이에 가로 놓여진

장벽을 허물고자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방금 골고다 언덕에서 피를 뿌리고

"다! 이루었습니다!"

 

 

 

휘장은 위로 부터 아래로 찢어져..

아래로 부터 위로 찢어 졌다면 인간이 찢었다고 할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휘장은 위로 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역사가인 요셉푸스는 이 휘장이 너무 견고하게 꿰메지고 직조 되어서 두 마리의 황소가 양쪽에서 그 휘장을 잡아 당겨도 절대로 찢어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만들어 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휘장이 찢어져 법궤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감추어진 분이 아닙니다. 아담 속에 잃어 버렸던 하나님을 예수속에서 회복되었습니다.

 

John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Hebrews 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제 어느날 다시 하늘이 휘장이 갈라지듯이 짝 갈라지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믿는자들은 재림하시는 주님과 영원히, 영원히 살게 될것입니다. 휘장이 갈라지는 것은 완성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하늘이 갈라지고 나팔소리와 함께 영광의 구름에 휩싸여서 주님 오시는 그날은 완성의 날입니다.

 

 

 성막에 나타난 복음

울타리

말뚝과 줄

성막의 문

번제단

물두멍

성막의 덮개

떡상

금등대

분향단

휘장

법궤

속죄소

제사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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