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폼페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로마 제국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드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와 유사하지만,
정치 제도, 법
제도, 군사 기술 등을 발전시켜
오리엔트와 유럽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에 대해 알고 보면 현재 미국의 상황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a) 공화정 초기 (B.C. 509~B.C.264)
B.C. 800년경에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시를 세웠습니다.
B.C. 700년경에는 에트루이아족이 침입해 로마를 지배했습니다.
B.C. 509년에 에트루이아 왕조가 무너진 후 공화정이 생겨났습니다.
공화국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 선거에 의하여
일정한 임기를 가진 국가원수를 뽑는 국가 형태를
말합니다.
임기 1년의 두 명의 집정관(콘솔)이 군사, 사법, 제사적
권력을 가지고 통치했습니다.
그밖에 사법권을 가진 프라이토르와, 인구와 재산을 담당하는 켄소르(감찰관),
행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가 생겨났습니다.
B.C. 450년에 데컴이라는 10인 위원회가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을 제정합니다.
원로원은 유력한 씨족의 우두머리로 구성된 공화국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습니다.
원로원은 민회의 법률을 비준하거나, 법률을 제안하고, 행정관에게 조언했습니다.
그밖에 종교 문제에 관여하고, 국고를 맡아 공공 재정을 운영했습니다.
평민(플레브스)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평의회를 세우고,
호민관(트리부누스)을 두었습니다.
호민관은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 시기에 에루트리아족, 켈트족, 삼니움족
등을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통일합니다.
b) 공화정 중기 (B.C. 264~B.C. 133)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던 카르타고(페니키아의
로마식 이름)와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의 요충지 시칠리아에서 부딪치게 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치고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합니다.
카르타고가
일시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에게 시칠리아 섬을
뺏기고 전쟁 배상금을 물고 평화 조약을 체결합니다.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히스파니아(스페인) 지역에 신 제국을
수립하고 힘을 키우자 이를 우려한 로마가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킵니다.
히스파니아의 젊은 장군 한니발은 막강한 로마 해군을
피해
육로로 험한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를 점령합니다.
B.C. 217년에 에트루리아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합니다.
그 사이 로마는 기력을 회복하고 한니발을 남쪽으로 몰아냈으며,
카르타고의 지원군도 격퇴해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합니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B.C. 206년에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B.C. 205년에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을 물리침으로써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전함과 지중해 섬을 빼앗기고,
독자적으로 전쟁과 외교를 수행할 권리를 잃었습니다.
한편 로마는
B.C. 197년에 그리스 지역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시리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겨 소아시아를 점령합니다.
B.C. 151~146년에 로마는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동맹과 싸워 이겨
발칸 반도와 아프리카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B.C. 146년에 카르타고가 누미디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자,
로마는 이를 구실로 카르타고를 공격해 함락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후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로마는 정복한 속주를 프라이토르라는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로마가 이렇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의 충성심이 높았고 군대의
효율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군주정(콘솔), 귀족정(원로원), 민주정(코미티아)이 세력 균형을 이뤄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민주정의
권한이나 주요 정치 문제와
식민지 관리는 원로원이 했습니다.
평민회는 독자적으로 입법할 권리가 있었으나 10명의 호민관 가운데 1명이라도
거부하면 통과가 안되기 때문에
귀족들이 1명이라도
거부하면 통과될 수 없었습니다.
에퀴데스(기사계급) 계층은 국가의 하청을
받아 도로를 닦고, 광산을 경영하며,
군대에 납품했습니다.
식민지가 넓어지면서 로마는 부강해졌지만 값 싼 농산물이 수입되면서 로마 농민은
몰락해 갔습니다.
이탈리아의 부자들은 국유지를 점유하고 빈농의 땅을 싸게 사들여 라피푼다움이라는
대 농장을 경영하며 노예로 목축을 경영해
큰 돈을 벌었지만 땅을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해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 문학을 수용하고,
그리스의 신들을 섬기고, 회의주의적 철학을 받아드렸습니다.
c) 공화정 후기 (B.C. 133~31)
빈부의 차가 심해지자 B.C. 133 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국유지를 500 유게라
(1,212m2)로 제한해 나머지 국유지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려 했습니다.
부자와 귀족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반대하자, 평민회에 법안을 제출했지만
귀족 편인 호민관 마루쿠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됩니다.
그러자 평민회는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하고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에 원로원파는 평민회로 몰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하고 평민회를 탄압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리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후 공공수입을
늘려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에퀴데스라는 직책에게 행정관의 부패를 방지하게 해 원로원을 견제했습니다.
호민관 재 선거에서 진 그는 B.C. 123년에 무력으로 개혁을 하려 했으나
폭동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폼페이우스는 B.C. 77년에 이베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었고,
마루쿠스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어 B.C. 70년에 각각 콘솔이 됩니다.
크라수스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음모와 폭력을 동원했고,
나라는 피폐해져 갔습니다.
B.C. 63년에 카틸리나 라는 정치가가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키케로에게 진압됩니다.
동방을 원정해 승리하고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권력을
내 놓았으나,
원로원은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한편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총독 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뛰어난 재능으로 B.C. 59년에
콘솔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콘솔직에 있으면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3명이서 밀약을 맺고 권력을 독점했고, 키케르는 이들을 분리시키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의 지휘권을 얻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지휘권을 얻었으며,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공격했고,
키케르는 결국 이들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크라수스가 죽자 품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대립하게 되는데,
원로원이 폼페이우스 편을 들자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점령했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퇴각합니다.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좇아가 폼페이우스를 격퇴했고,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그 곳에서 암살당합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독점하고 1인 독재를 실시했지만,
원로원에서 부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암살당합니다.
그러나 이 후 권력은 카이사르의 신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장악했고,
암살자들은 도망을 갑니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협력해 안토니우스에 대항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통치했고,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장악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이집트를 정치적, 군사적 근거지로 삼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이집트에 넘겨주려 한다고 선동한 다음
공격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연합군을 패배시킵니다.
d) 제정 전반기 (B.C. 31~A.D. 139)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전권을 잡고 첫 황제가 되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의
통치를 위임하고,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사람)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콘솔직을 맡았으나 B.C. 23년에 사퇴하고 호민관 권한과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프로 콘솔의 권한을 부여해 속주와 군대의 통수권도 가지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막시무스(大神官)가 되었고, 8번째 달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하였고,
조국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군사와 재정에 실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원로원의 권한은 축소되었습니다.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로 이루어진 특별 위원회가 프라이토르와 콘술을 선출했습니다.
보수를 받는 직책은 대부분 에퀴테스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제국 안에서 강력한
계급을 형성합니다.
민회는 가끔 회의를 열어 이미 결정된 사항을 형식적으로 승인할 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에서 도로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을 벌이고, 재정과 통치를
안정시켜 이탈리아를 전체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이나 에퀴테스가 임명됐고, 속주는 로마에 직접세와
간접세를 바쳤으나 민회와 참사외,
키비타스를 단위로 자치를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서약한 군대는
레기온(군단), 변경 주둔군, 황실 근위대,
제국 함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레기온과 변경 주둔군의 병사는 주로 서부 속주
출신으로 제대하면 시민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복하기 쉬운 곳은 속주로 다스렸지만 로마에서 먼 곳은 위성국가를 만들어 다스렸습니다.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56년간 통치하며 200년간
유지된 입헌 정부를 만들어냈습니다.
아우수스투스는 아들에게 왕위를 상속해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제위시킵니다.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황제였지만 뒤를 이은 칼리쿨라는
폭군으로 암살당합니다.
클라우디우스 1세(A.D. 41~54)는
중앙 집권화를 진척시키고, 브리튼을 합병했습니다.
네로황제(A.D. 54~68)는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살해하고, 로마시를 불태우고,
크리스천을 최초로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합니다.
A.D. 117~138 년에 집권한 하드리아누스는 변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속주의 주둔군을 자체에서 충원했습니다.
또한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이민족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창설합니다.
그는 관료제를 정착시키고, 영구고시록(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하는 법)을
법전화 시키는 법률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안토니누스 황제(A.D. 138~161) 때부터 게르만족이 침입하고,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게르만 족을 진압하다 전사합니다.
2 세기 들어 황제들은 자기 가문을 신격화해서 절대 군주정에 이르렀고,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을 제정했습니다.
제국 내의 다른 종족들은 각기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용되었고,
도시 단위로 지방 자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는 물질 만능 주의를 낳았고,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가 성장했습니다.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라틴화를 거부해 그리스 문학이 부흥을 이뤄
수사학과 풍자가 유행했습니다.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 번성했고, 예술은 로마인답게 사실적 표현이 주류를 이룹니다.
e) 제정 후반기 (A.D. 193~476)
192년 콤모두스가 암살 당한 후 벌어진 내전에서 두나우 주둔군이 추대한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둬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우대하고 관료제를 강화했지만 원로원을 무시해 중앙권력을 강화했습니다.
193년부터 235년까지 세베루스 가문이 집권했는데 세금을 올리고,
악성 인플레를 낳았고, 이교를 숭배하다가
바시아누스가 암살당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다신을 숭배했는데 집권층은 대형 신전에서 제사 지냈지만
하층민들은 군소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한 때는 이원론적 사상과 내세의 심판을 믿는 조로아스터교 계열의 종교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1세기 말부터 그리스도교가 하층민과 유대인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배타적이고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세기부터 지식층에도
그리스도교가 보급되자 네로황제 때부터 탄압되기 시작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세계적인박해를
가했습니다.
235년부터 막시무스 같은 군인이 황제를 맡게 되었지만,
이민족의 잦은 침입을 받게 됩니다.
게르만족은 본거지인 스웨덴에서 로마나 히스파니아로 쳐들어 왔습니다.
로마는 갈리아와 소아시아 지역 일부를 잃게 됩니다.
외침과 내란으로 많은 지역이 황폐해졌고, 강도와 해적이 들끓었으며, \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고, 제국은 빈곤해져
갔습니다.
284년에 동부 주둔군이 황제로 선포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동황제(Augustus)로
막시미아누스를, 부황제(Ceaser)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이우스를 지정했습니다.
이들 황제는 제각기 군대를 가지고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갈레이우스는 도나우 지역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부를 책임졌습니다.
이들은 황제를 신격화 해 권력의 안정을 도모했고, 4 과두제정을 실시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의 수를 늘리고 이탈리아도 속주와 같이 분할했습니다.
4 황제가 자기 지역에서 통치함에 따라 로마는 수도의 특권을 잃게 됩니다.
또한 황제 직속군인 기동 타격군을 창설하고, 관료제를 팽창해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인플레이션과 재정위기가
심각해졌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를 조사해 공평하게 과세하고,
가격 제한제를 도입하고, 국민을
출생지에 묶어 놓아 사회 이동을 금했습니다.
디오클레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황제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을
가혹히 박해했습니다.
36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와 브리튼에서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됩니다.
로마에서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도나우에는 라키니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이들은 서로 싸움을 벌였고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장악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 환영을 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합니다.
이에 힘입어 그리스도교는 제국 전체에 전파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아리우스파를 탄핵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지금의 터키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깁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353년에는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을 통합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대항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주로 종교문제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의 간섭은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는 교회에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361년 그가 죽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로서 뒤를 이어
이교신앙을 되살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키려 했으며, 자유로운 원수정을 복귀시키려고 애썼으나 페르시아를
공격하다가 패해 전사했습니다.
새로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제국을 서부와 동부로 분리했는데, 제국이 실제로
분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서부를 맡은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을 물리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외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고 하층계급
보호정책을 폈습니다.
반면에 동부를 다스린 발렌스는 무능했고, 광신적인 아리우스파로서
이교도와
정통 그리스도교를 탄압해 반발을 샀으며,
도나우 지역으로 침입해온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전투에서 378년 죽었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375년 갑자기 죽자 그의 아들인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379년에 발렌스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우스를 동부 황제로 선포하고
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제국 안의 영토 안에서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곧 그라티아누스를 압도해 주도권을 잡고서
아리우스파와 이교도를 척결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단과 이교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서부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틈타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383년
지휘관인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388년 막시무스가
테오도시우스를 공격하다 죽었으므로 제국 모두를
테오도시우스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갑자기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물려받았습니다.
제국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세금 부담이 더욱
늘고 경제는 줄곧 쇠퇴해갔으며
전제정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심지어 군대는 지휘관들까지도 주로 이민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세력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큰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약자에 대한 보호를 둘러싸고 계속
유력자들과 경쟁을 벌여 5세기에는 세속적인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독립적인 중소 농민이 무거운 세금 부담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몰락해 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을 팔아넘기거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유력자에게 땅을 넘긴 뒤
소작인으로 전락해 땅에 매임으로써
자유를 구속당해 중세 농노제를 지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제국의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조직을 갖추었는데 각 도시에는
주교가, 각
속주의 수도에는 대주교가,
그리고 아주 큰 도시에는 총주교가 자리잡았습니다.
교회는 엄청나게 부유해졌고 세속 당국의 사법권에서 제외되는
불입권(不入權)을 획득했습니다.
황제는 종교문제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서로마 교회는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분리되어야 하며 교권이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황제교황주의가 우세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지만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제국으로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402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했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는
곧 다시 침략해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남쪽으로 진격했으며, 그뒤를 이어 아타울프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갈리아로 들어간 서고트족은 호노리우스의 요청으로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동안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를 어느 정도 평정한 뒤
421년에 공동황제로 선포되었습니다.
얼마 뒤 그가 죽고 나서 423년에 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우스의 뒤를 이어 45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5세기 초반에는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속주에 자리잡은 이민족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브리튼은 앵글족·색슨족·주트족에게 넘어갔고,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반달족은 428년 히스파니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로마, 시칠리아, 비잔틴 제국의
서로마를
위협했습니다.
450년에는 훈족이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나 서부에 자리잡은 이민족의
도움을 받은 아이티우스에게
격퇴당했습니다.
454년과 455년에 아이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차례로 죽은 뒤에는
게르만족 출신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고
황제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476년 게르만 출신인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 그러는 사이 아프리카에는 반달족 왕국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에는
서고트족 왕국이,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 왕국이 자리를 잡았으며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새롭게 들어섰습니다.
갈리아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한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494년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고트족이 차지한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옛 제국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이
지중해까지 팽창하는 것을 막고 동고트 왕국을 론 강 유역까지 팽창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으로 멸망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은 일반 국민의 낮은 생산 및 생활수준에 비해 고대
세계로서는 너무나 무거운 상부구조와 세금을
들 수 있습니다.
군대는 많은 유지비가 필요한 반면 규모는 충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인구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었습니다.
여기서 서로마는 몰락한 반면 동로마는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 동로마는 부유하고 인구도 조밀했으며 국가 구조도 서 로마보다
건전했습니다.
서로마는 소작인을 착취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동로마는 또한 외부로부터 별로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방어하기도 쉬웠습니다.
반면 서로마는 국경을 가지고 있어서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규모 군대의 유지와
수많은 요새가 필요했고, 일단 변경이
침략 당하자 핵심지역인 갈리아와 이탈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화산재에 파묻힌 비극의 도시 폼페이(Pompei)는
서기 79년 8월 제정 로마시대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번영과
쾌락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폼페이는 농업,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피서지와 피한지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러한 폼페이가 전성기에 멸망을 하였으므로 현재
발굴되고 있는
자료들에서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BC 63년 대지진이 있었고, 기원 79년에는 베스비오화산이 크게 폭발했습니다.
그때 강진과 더불어 분출한 화산재가 무려 1m 가까이나 쌓였습니다.
시민 중에는 교외로 도망치는 사람, 집안에서 피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에 분출한
화산재와 용암이 응결하면서
거리 전체가 마치 찌는 솥이 되면서 모든 것이
매몰되었습니다.
폼페이는 17세기에 도로 건설에 종사하던 건축가 몬타나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직적인 발굴작업이 전개된 것은 1748년부터, 이 발굴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현재까지 3/5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발굴작업을 통하여 돌을 깔은 포장도로,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벽과 집,
수도와 목욕탕 등으로부터 당시의 훌륭한
도시계획과 소위 폼페이 양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토품 중에는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많습니다.
우선 광장과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한 고대도시의
형태를 살펴보면 극장,
원형 경기장, 도량형
검사소, 시청, 체육관,
하수도와 목욕탕, 레스토랑, 공중 화장실까지
갖춰진 각종 시설이
현대의 도시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도로는 7m 너비로
돌로 포장되어 있고 인도가 양 옆에 있어
당시의 변영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돈많은 상인인 베티의 집은 부유한 집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풀장이 있고,
양쪽으로 금고와 침실이 있습니다.
도시 여러 곳에 사창가가 있는데 작은 방들이 있고 벽에는 춘화가 걸려 있습니다.
당시엔 성이 매우 자유로워 여자는 누구나 사창가에 가서
몸을 팔고 돈을 벌 수 있었으며, 죄악시 되지 않았습니다.
크레타와 폼페이, 성경에 나오는 소돔성까지 모두 하나님이 없어도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이었습니다.
이 곳들은 모두 화산 폭발이나 지진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성이 자유로워 소돔은 동성연예가 횡행했고,
크레타는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다닐 정도로
성이 자유로웠고, 폼페이는 사창가가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참으셔도 사람이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하는 것은
참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이 성적으로 타락해 동성연예와 성매매,
간음, 변태, 음란물 등이 넘치고 있습니다.
3. 로마의 기독교 박해
초기 기독교는 모진 박해의 파고를 헤치고 살아남았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의 밀란칙령과 데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인
1-3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 "진실로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신앙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a)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1.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앙에 바탕을 둔 다신교였습니다.
원칙적으로 로마의 종교정책은 각 지역의 고유 종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로마에는 각지에서 유래한 온갖 종류의 신전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헬라와 페르시아 등의 동방에서 유래한 온갖 밀교들이 성행했고
그 신들에 대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제1계명을 이유로 그 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온갖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매도되었습니다.
2. 신격화된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종류의 신들 중 로마의 황제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마땅히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시에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인 황제였습니다.
누구든 유일한 황제와 황제의 나라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음은 물론, 재림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예수를
만왕의 왕이라 믿었습니다.
황제도 예수의 나라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시민권이 로마에 있지 않고 장차 도래할
예수의 나라에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를 전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음모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적 모반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었습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반 사회적이고 부도덕한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감시와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내 놓고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장소는 자연히 은밀한 장소로 로마인들이 꺼리는 지하무덤인
카타콤베였습니다.
카타콤베으로 숨어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음해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덤 속의 시체를 먹는다는 것과 은밀한 곳에서
남녀가 혼음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b) 카타콤베
카타콤베(Catacombe)는
초기 기독교 인들의 모였던 지하 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고대 로마의 법에 묘지는 성벽 밖에 쓰도록 되어 있었고, 로마 귀족들은
성벽 밖에 성을 지어 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빈민계급이었던 기독교인들은 귀족들의 풍습을 따를 수 없어
그들만의 묘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폐광이 된 골재 채석장이라든가, 호의적인 독지가의 지하 가족묘지에
조상들을 묻게 됩니다
여기에는 돌무덤에 묻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기독교 박해 때에 중요한 피신처가 됩니다
묘지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로마법을 이용하여 지하 공동묘지에 숨게 됩니다.
이곳에 피신한 신자들은 함께 모이게 되고 예배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에는 로마 군병들이 이 곳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군병들 중에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전도되어 신자가 되고 동료
군병으로부터 순교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로마 주위에는 약 30개의 카타콤베가 있었습니다.
c) 로마의 기독교 박해 역사
1. 네로 황제 박해 (54~68)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재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주후 64년 네로는 로마에 발생한 대화재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었다고 했습니다.
다음 타기투스의 연대기에서 네로의 잔학성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 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스는
쇼가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하고 본보기적인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에 동정심이 생긴 것은 사실상
그 일이 공중의 선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161~180)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습니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투스라는 독실한 청년이 순교했습니다.
지방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게르마니쿠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이 불의한 세대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은 그에게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
라고 재촉했습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정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니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않는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았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막시미누스 통치 3년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 이 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습니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기회가 되어 3세기
50년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3.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49~251)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습니다.
데시우스의 명령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이 때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습니다.
4.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284~305)
디오클레티안이 황제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박해를 가해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에 칙령을 내려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의
직책들을 박탈하고,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기간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 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렀습니다.
그 일은 모든사람에게 알려졌으며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5.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305~311)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 황제도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8년이 되던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의 중병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습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인들은 서들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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