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료

이렇게 가르치면 신천지입니다

제이비젼 2014. 6. 7. 19:06

이렇게 가르치면 신천지입니다 


이인규dsmedic@naver.com 

1. 성경개론 : 

- 성경은 역사, 교훈, 예언, 계시(실상)로 분류된다 
- 예언서는 비유로 되어있으므로 실상으로 풀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즉 그들에게 성경은 비유로서 그 비밀이 감추어져 있고, 신약과 구약은 짝으로 되어 있으며, 계시로 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 감추어진 비밀은 때가 되면 나타난다. 
- 성경의 역사는 시대에 따라서 배도와 멸망과 구원으로 되어있다. 
- 계시록은 봉인되어 있으며, 환상계시와 실상계시로 구별되며, 오늘날은 계시록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 


2. 신앙관 : 이원론 

- 세상은 성령과 악령(천사도 성령이라고 가르침), 하나님과 사탄,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영계와 육계(하늘과 땅)로 분류된다. 
- 시대를 구별하고 선악을 분별하는 신앙이 필요하며, 기독교와 목자들은 타락하였으므로 진리와 참목자를 만나야 된다. 
- 구약의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을 뱀의 자식으로서, 기독교 목사로 비유한다 
- 시대마다 구원관이 다르며, 시대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가 있다. 


3. 비유론 : 단어풀이(초등비유) 

- 뿌려진 씨와 네가지 밭의 비유(씨는 말씀, 밭은 마음 혹은 교회) 
-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알곡은 사람의 씨, 가라지는 짐승의 씨) 
- 새와 나무의 비유(나무는 사람, 새는 영, 가지는 제자, 잎은 전도자, 열매는 말씀과 성도) 
- 양식과 누룩에 대한 비유(양식은 말씀, 누룩은 교훈, 여자는 목자) 
- 그릇, 저울, 지팡이에 대한 비유(그릇은 마음, 저울은 말씀, 지팡이는 말씀과 사람) 
- 그 외에도 불, 향로, 빛, 등대, 물, 샘, 강, 짐승, 머리, 뿔, 꼬리, 피, 포도주, 감람유, 산, 인과 나팔, 돌과 우상, 생물과 바람, 부활, 신랑, 예루살렘, 이스라엘등의 단어를 모두 비유풀이로 해석함 
- 유사하게 비유로 해석할 수 있는 몇개의 성경구절만을 찾아 제시하며, 자신들의 단어비유를 정당화시킨다. 
- 나무도 두가지, 씨도 두가지, 그릇도 두가지, 저울도 두가지.... 이렇게 모든 것을 두가지로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과 사탄의 것으로 구별한다. 


기타 

- 성경공부를 하는 것을 교회나 가족에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가르침. 
- 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유명한 기독교 단체를 사칭하며 접근하기도 한다. 
- 자신들은 절대로 신천지가 아니라고 주장함(신천지는 이단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신천지 출입금지 경고표지를 부착하기도 함) 
- 성경공부를 하라고 소개한 사람도 위장한 신천지교인이며, 함께 공부하며 접근하는 자도 위장한 신천지 교인이다. 역할을 분담하여 접근한다. 
- 성경강의를 하는 사람을 주로 전도사, 선교사라고 주장 
- 처음부터 이만희 교주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며, 참 목자, 사도요한격, 이긴자등의 표현을 간혹 사용한다. 


결론 

신천지는 처음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다가 신학원(센터)로 넘겨져서 본격적인 성경공부를 하게 되는데, 초등교육 2개월, 중등교육 2개월, 고등교육 2개월을 거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거치면 신천지의 교리로 세뇌를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곳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이 신천지라는 것을 알고 즉시 그곳을 나와서 그들과 교류를 단절하여야 하고, 상당기간을 그곳에서 공부한 사람은 그동안 배운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 이단상담소에서 상담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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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기도 보다는 깡이 효과적이다. 

지성수sydneytax1@hanmail.net 

불교신문에 대단히 수상한 기사가 보도가 되었다. 다음은 기사의 내용이다. 

장애인 복지사업을 하고 있는 작은 예수 수도회 총원장 박성구 신부가 15일 오전 11시 충북 음성 꽃동네 정문 앞에서 30여 명의 장애인 및 수사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8월 방한 예정인 프란체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박성구 신부는 ‘교황 성하님! 한국판 마피아 꽃동네 방문은 안 됩니다!’라는 제목의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면서, 꽃동네 설립자인 오웅진 신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박 신부는 교황의 방한은 적극 환영하지만, “4백만 평이 넘는 땅, 대한민국 최고의 땅 부자, 유한회사 주식을 개인적으로 30% 소유해 배임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판 마피아 오웅진 수사가 지배하고 있는 꽃동네 방문은 오웅진 수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이기에, 결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배임과 횡령 혐의로 지난해 음성 주민들에게 고발당해, 현재 대전 고검에 검찰항고 중인 오웅진 신부의 꽃동네는 교황이 방문하게 하고, 작은 예수회는 능멸되어도 상관없는 염수정 추기경, 정진석 추기경, 감사원장, 보건복지부장관, 경기도지사, 가평군수, 기평경찰서장 모두는 오천만 백성들 앞에서 석고대죄 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보니 가평군에는 오웅진 신부와 박성구 신부가 운영하는 두 곳의 장애자복지시설이 있는데 가평군의 복지지원 예산을 오웅진 신부가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자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으나 그동안 항상 보수 수구세력과 밀착해서 때로는 정치적 행동도 해왔던 오웅진 신부는 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아왔고 박성구 신부는 국물도 못 얻어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교황이 와서 한국의 대표적 장애자 복지시설로서 꽃동네를 방문해 버린다면 박 신부의 작은 예수회는 완전히 찌그러들 판이기 때문에 박 신부 입장에서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설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천주교 안에서 이 정도로 아무도 못 말리는 꼴통 짓을 하는 박성구 신부라는 이가 나와도 인연이 있었다. 1992년 여름이었다. 부천에서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해결사로서 온갖 궂은 일에 발을 담그며 살고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장애인 부모 한 사람이 찾아왔다. 

당시 역곡역에서 10여분 떨어진 안골이라는 동네는 그린벨트에 묶여 있는 곳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토호세력인 박규식이란 자의 집안 땅이었다. 

집에서 돌보기 어려운 장애 자녀를 둔 열 명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장애 자녀들이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구룹홈을 만들기 위해서 5백만 원 씩 돈을 모아 부천의 마지막 초가집인 이 집을 사서 박성구 신부가 창설한 천주교 작은 예수회에 운영을 맡기기로 하고 기증을 했다. 

그러나 동네의 대부분의 집들이 박 씨 집안의 땅에 지은 집이어서 매년 얼마씩 토지세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예수회에서 초가집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서는 땅주인의 ‘’토지사용허가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땅주인이 변덕을 부리며 땅을 사라고 해서 건축허가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부모들 입장에서는 애초에 땅을 사지 않아도 집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렵게 5 천만 원 모아서 집을 산 것인데 난처하게 된 것이다. 

장애자 부모의 부탁을 받고 땅주인을 만나 불쌍한 장애자들이 쓸 건물임을 설명을 하고 간절하게 사정을 했다.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인 만큼 개인이 재산권 행사할 건물이 아니니 건물의 명의를 땅주인 앞으로 해줄 터이니 사용만 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땅주인인 박 의원의 형수는 “내가 중풍 걸린 시아버지를 10년 동안 모시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왜 내가 장애인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나름 이유 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거절을 했다. 

나는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화가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초헌법적(?) 방법을 쓰기로 했다. 산업 장애자협회 부천지부 회원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함께 땅주인을 찾아갔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회장도 역시 좋은 말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언성도 높이지 않고 조용히 “장애자인 내가 보아도 너 같은 인간을 살 필요가 없겠다. 나 먼저 죽을 테니까 나를 따라 죽어라.”고 한마디 하고는 나를 향해 "목사님! 나 여기서 죽을 테니 돌아갔다가 나중에 와서 장사나 잘 치뤄주시요!”고 하면서 의족을 풀어 버리고 피가 흐르는 다리를 들어 내놓고 휠체어서 내려서 땅 바다에 주저앉았다. 

분위기를 눈치 챈 내가 같이 온 회원들에게 “회장님의 뜻이 저렇게 강경하니 우리는 이만 돌아갑시다.” 하고 돌아가려니까 얼굴이 새파래진 땅주인 여자가 “여보세요! 목사 양반!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도장 찍어 줄게 동의서 가져와요”라고 했다. 

그 일 후에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어 준공식 하는 날 박성구 신부가 와서 미사를 드렸다. 박 신부는 한 떼의 신자들을 몰고 나타났는데 그들은 조용한 보통 천주교 신자들과는 다른 성령세미나 회원들이었다. 성령세미나 회원들은 순복음 교회 신자들처럼 입이 바쁜 사람들이어서 기도가 길었다. 뜨거운 7월의 삼복더위에 기도가 한 없이 길어지는 동안 산재장애자 회원들은 땡볕이 내리 쬐는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아마도 하나님은 아셨을 것이다. 집이 세워지기 까지는 신자들 기도 보다는 장애자협회 회장의 깡다구가 더 효과가 컸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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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가 흔들리고 있다 

삐뚤어진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초상 
이정자 (zwiick) 

초대교회 이후로 기독교는 이천 년간 숱한 적대적 위협과 공격 속에서 견뎌왔다. 로마 제국의 핍박 속에 초대 교인들은 처참한 죽음 가운데로 내몰렸으며 기독교 교리가 정립돼 가는 과정 가운데 확산된 교묘한 이단 사설로 인해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이슬람과 대립하는 와중에 권력이 된 교회 내부의 자중지란으로 공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몇몇 복음주의자들의 자각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올바로 돌이켜 정교히 다듬고 강화하는 자정 작용으로 종교개혁을 이루어 오늘날의 개신교의 모습을 갖추었다. 물론 지금의 기독교도 전 세계적으로 무신론의 거센 공격과 내부의 다양한 이념과 폭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으로 인한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한국 기독교 또한 채 이백 년이 안 되는 역사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구한말 복음의 기치로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계급 간 소통의 매개가 되었으며 외세에 억압받던 민족의 희망이 되는 과정 중 많은 신앙인들이 고통 받고 순교 당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 널브러진 소망 없는 인생들에게 복음을 통한 은혜의 감동을 맛보게 하기도 했다. 한국 기독교는 지금 이 순간도 사회 전반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흔들리고 있다. 70년대를 지나며 경제성장과 더불어 경이로운 부흥을 경험하며 천만 기독인을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한국 기독교는 흔들리고 있다. 장로 출신의 대통령들을 배출하고 국회에서 발의된 기독교적 가치를 거스르는 법안을 교회의 힘으로 좌절시킬 수도 있을 정도로 영향력을 가졌지만 한국 기독교는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의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당면한 어려움과는 별개로 한국 기독교는 매우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럼 한국 기독교를 흔드는 가장 위험스런 요소는 무엇인가? 정통 기독교의 주변부를 맴돌며 뿌리를 후벼 파는 각종 이단들은 어떤가? 특히나 요즘 교계를 눈에 띄게 어지럽히는 구원파와 신천지, 이들을 한국 기독교를 흔드는 주범이라 할 수 있는가? 구원파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지만 합법적 기업의 가면을 쓰고 사회 곳곳에 침투해 삐뚤어지고 변질된 자칭 진리의 말씀으로 민심을 현혹하며 교회 안팎으로 갖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 

신천지는 기존의 이단과는 차별화된 창의적 수법으로 정통 교회 신자의 모습으로 위장해 교단, 교파, 개교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이들이 기존의 신자들을 포섭하는 노골적이고 치밀한 수법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여서 각 교단 교파를 막론하고 대대적인 신천지 경계령이 내려질 정도다. 그러나 이들이 교회를 뒤흔들고 위협할 위험성이 다분한 심각한 존재란 것에 분명 동의하지만 한국 기독교를 흔드는 가장 위험스런 요소라 하기엔 이들에 대한 우리 내부의 경계심이 매우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현실 생활과 믿음이 따로 노는 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이율배반적 부조리는 어떤가? 성도들은 머리론 거룩함을 좇지만 손과 발은 현실의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댄다. 소위 말하는 몇몇 매머드 교회의 목회자들은 복음 전파라는 대의명분하에 성도들을 끌어 모으고 수백억, 수천억을 쏟아부어 거대한 건물을 지으며 이를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쓰고 '스스로의 야망 성취'라고 되뇐다. 신문 사회면을 요란하게 장식한 스캔들 기사를 접하고 부도덕한 CEO들의 그릇된 작태인가 싶어 면밀히 들여다보면 명망 높은 목사님들의 낯 뜨거운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것은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거나의 차이일 뿐 예수 그 이름에 기대 살면서도 엇나가는 우리 모두에 대한 뼈아픈 기록이기도하다. 때로 내가 이 부조리의 당사자가 되기도 하고 지켜보며 비판하는 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뒤틀린 제자 된 삶이 한국 기독교를 흔들고 있는가? 

그러나 이 모든 신앙적 오류에서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부자유한 만큼 자각 또한 크다. 우리는 저지르며 또는 까뒤집어 손가락질하면서도 우리의 오류에 대해 알고 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 변명하며 산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 양다리 걸치고 살면서 타인 또는 자신의 삐뚤어진 줄타기로 인해 좌절하지만 눈물짓는 은혜를 딛고 다시 일어나려 애쓴다. 우리는 이렇게 고단한 천국으로의 여정 속에서 성숙하지 못한 미련한 삶에 미약하게나마 기본적인 경고등을 켜고 살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 있어 진짜 위험스러운 존재는 따로 있다. 이들은 기독교 근본주의자 또는 기독교 보수주의자라 불린다. 그 지칭의 의미만으로는 이들이 갖는 위험성을 가늠할 수 없다. 그 위험성은 이들이 보여 주는 사상적, 이념적 토대와 그 토대 위에서 드러나는 행동성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스스로의 독선적이고 편향적인 성향을 선택적으로 강하게 신념화해서 적극적으로 가슴에 품고 의지적 오류를 저지르는 자들이다. 

이들에게는 스스로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조금의 의심은 물론 주저함이나 고민조차 없어 보인다. 이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거룩한 신념(?)에 대해 막아서고 비판하고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자들은 복음의 방해자들이며 악한 사탄의 동조자들이다.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만들어 가는 상황들, 그 상황과 사건들 속 수다한 발언과 행동들에서 발견되는 의식 체계의 불균형과 비상식성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틀어 교회의 이름으로 내지르는 무모한 질주에는 성능 좋은 제동 장치도 영민하게 작동하는 경고 센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위험은 그 위험스러움을 인지하지 못할 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상식적 사고와 행동'을 범인은 감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순종적 구현이라고 강변하고 '불균형'을 꼬집으며 의식의 균형을 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불순한 인본주의적 잣대로 재단한다고 성토한다. 

한국교회 내에서 이들은 온갖 비판과 비난을 감내하며 썩어 가는 세상을 향해 피를 토하듯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선지자 내지는 십자군의 이미지를 덧입고 있다. 그리고 이 왜곡된 이미지는 대다수 순진무구한 성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이 사회 전반의 보편적 상식과 충돌하며 울려 대는 불협화음이 성도들에게는 세속을 초월한 영적 비범함으로까지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 엮이며 펼쳐져 가는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를 구조적으로 치밀하게 떠받치는 보편적 질서가 존재함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은 이 보편적 질서가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보이신 창조적 당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연함의 길잡이가 되어 주는 보편적 상식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닿아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이 말하는 상식의 저쪽 건너편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세상의 합리성과 대치되는 개념이라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의 상식을 넘어서는 분이지 비상식적인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로 세상의 합리를 이끌어 내는 분이지 결코 불합리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불균형하게 치우친 사람의 이념과 의식에 매몰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세상이 요구하는 정의에 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 세상이 부르짖는 정의의 기초를 닦으시고 온전하게 세우신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 때만 되면 사회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이슈가 되는 각종 사안에 대해 봉기하듯 들고 일어나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며 시대성을 잃은 근본주의적 논리와 이념에 함몰된 편향된 주장으로 핏대를 세우며 대다수 많은 성도들을 우민화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교회와 세상을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 선악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이 악이라 여기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멸망을 피할 구원의 길을 여셨다. 교회는 세상 안에 있다. 세상은 좋게든 나쁘게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교회를 향한 기대를 드러낸다. 

그것은 예수 그 이름을 통해 주어질 내세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의가 이 땅의 정의로도 또한 명백히 구현되리라는 보편적 진리가 힘을 얻을 것에 대한 기대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상 속에서 보이신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곡해한 채 스스로의 의에 취해 분칠해 번들거리는 입술로 예수와 사랑을 들먹이면서도 폭력적이고 비인격적인 언행을 일삼음으로 세상으로부터 교회를 고립시키는 자들, 한국교회를 내부로부터 좀먹을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스러운 존재, 바로 이들로 인해 한국 기독교는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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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가 힘들면 그 자녀들도 힘들어”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 부모님이 힘들어하실 때 나도 덩달아 힘들어져요.”(설문응답자 A) 


목회 중 겪게 되는 갈등이나 경건함, 헌신에 대한 기대 등 목회자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자녀들에게도 전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자 자녀들도 이른바 ‘작은 목회자’로서의 고충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예수대학교 학생상담센터장 임신일 교수는 최근 기독교학문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연구·분석한 ‘목회자 자녀 스트레스 개념연구’ 논문을 발표했다고 1일 밝혔다. 이 연구는 지난해 11월부터 4개월 동안 목회자(목사 및 전도사) 부모를 둔 남·녀 대학생 5명씩 총 10명을 대상으로 집중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됐다. 총 44개 진술문을 바탕으로 진술문의 유사성 및 비유사성을 측정해 의미를 분석하는 다차원 척도 등 방법을 사용했다. 


분석 결과 목회자 자녀들 상당수는 경제적 문제 부문에서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로 ‘경제를 책임지는 엄마를 볼 때’ ‘부모가 사례비 없이 목회하는 것을 볼 때’ ‘교회 빚 때문에 힘이 들 때’ 등이었다. 성도와 관련해서는 ‘성도들에게 우리 가족이 늘 행복하게 보여야 할 때’ ‘설교와 다른 아빠의 삶이 보일 때’ 등이었다. 

특히 헌신 및 경건함 등에 있어서는 목회자 자녀들의 스트레스 정도가 상대적으로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건함에 대한 기대 부문에서는 ‘나는 늘 착하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비롯해 ‘내가 잘못을 안 해도 잘못했다고 해야 할 때’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또 ‘교회의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해야 할 때’ ‘교회 일을 도맡아 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때’ 등 헌신에 대한 외부의 기대도 목회자 자녀들에게는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김 교수는 “목회자 부모와 함께 산다는 것이 고통을 함께 견디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인식돼선 안 된다”면서 “(목회자 자녀와 부모간) 건강한 분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감 형성을 할 수 있도록 목회자들의 부모 교육이 선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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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금품 수수자는 강춘오 목사·김형원 장로 

이단은 옹호…이단연구가들에는 맹공 퍼부어 

한국교회, 내부의 이단비호세력 대책마련 시급 
엄무환 사장 cnf0691@amennews.com 

 

▲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사진: CBS기독교방송)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교주 유병언에 대한 실체가 양파껍질처럼 벗겨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 년 동안 유병언으로부터 고액의 돈과 물품을 받고 구원파를 비호하다가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선 한 목회자가 이 같은 사실을 소상히 밝혀 교계 안팎으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전 한국기독교언론협회 총무였고 모 언론사 사주였던 이모 목사(현 인천OO교회 담임)는 필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지난 2004년부터 2006년까지 3년 정도 유병언으로부터 1년에 두 차례씩 거액의 돈과 물품을 받은 바 있다”면서 “주로 여름과 연말에 초대를 받아 유병언과의 만남이 이뤄졌으며 여름엔 수양회 기간에 열린 바자회에 진열된 다판다, 세모 등 구원파 기업 상품 중 유 회장의 지시에 의해 참모들이 자동차에 한 보따리씩(시가 200~300만원 정도) 실어주었고, 연말엔 수 백 만원(처음엔 200만원, 두 번째부턴 500만원)을 수표로 건네받았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유병언 회장과의 만남 자리에 동석한 사람은 구원파 측에서 고창환 세모사장, 이용화 사장 외에도 금수원 대표사장(이름 기억못함)과 최숙희 여사장(많은물소리 출판사 대표) 등 5명이었으며, 교계인사로는 당시 한국기독교언론협회 회장이었던 강춘오 목사(교회연합신문 발행인)와 부회장이었던 김형원 장로(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전임회장)였으며, 첫 만남은 강춘오 목사의 초청으로 이뤄졌고 두 번째부턴 고창환 세모사장이 직접 연락을 하여 만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 이 목사가 유병언을 만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 후 주차한 차 안에서 고액의 돈을 건네받았다는 금수원 옆 주유소 휴게실식당 

“왜 유병언 회장이 이런 자리를 만들게 되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목사는 “유 회장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있으니까 기독교적 인사 가운데 자기를 두둔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다. 

 

▲ 정동섭 교수가 쓴 화제의 책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유병언과의 만남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어떤 얘기들이 오고갔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목사는 “점심 때 유 회장의 초대를 받아 안성 금수원 앞 주유소 휴게실 식당(구원파에서 운영)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밤 12시나 새벽 1시까지 얘기를 듣거나 나누었다”면서 “주로 유 회장이 얘기를 주도했는데 이때 정동섭 교수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이유는 정 교수가 쓴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라는 책이 출판되어 구원파에 굉장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밝혔다. 

한편, 지난 2월, 8년 동안 유병언의 통역을 담당했었던 정동섭 교수(사이비종교피해자대책연맹총재, 이하 종피맹)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가 유병언으로부터 상당한 금품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따라서 유병언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 교수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이 책(하나 되는 기쁨)은 출간된 이래로 <교회연합신문>이 문제제기를 하기 전까지는 매우 좋은 평가만을 받아왔던 책입니다. 그 후에 한기총에 탄원서를 제출할 당시 많은 가정사역 전문가들도 이 책이 부부상담에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여 적극 추천했고, 긍정적인 평을 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부간의 성의 신성한 의미를 발견하고 부부관계가 좋아졌으며 심지어 이혼의 위기에 있던 부부들이 회복되었다는 여러 보고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책이 출간된 지 약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연합신문>의 강춘오 목사 등이 이 책과 저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구원파와의 보이지 않는 커넥션과 이단연구가들을 죽이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봅니다.”라고 전제한 뒤 “설명하자면 좀 깁니다만 그러나 원뿌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이번 사건의 시초는 구원파 교주 유병언씨와 저와의 법적 문제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제가 한 때 구원파에 몸담았다가 나온 후 1995년에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죠이선교회 刊)라는 제목의 책을 아내와 함께 공동으로 출간한 바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부인하고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구원파가 영혼을 멸망시키고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저술한 책이지요. 그런데 2007년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교주 유병언 씨가 명예훼손과 출판금지가처분, 2억원 손해배상 등 혐의로 저희 부부를 고소했어요. 그동안 구원파 측으로부터 피소당한 소송만 해도 무려 14번째나 됩니다. 구원파에서 제기한 소송은 16차례 재판 끝에 2008년 9월24일, 대전지방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승소했습니다. 그러니 구원파 유병언이 얼마나 약이 올랐겠습니까. 그때부터 저에게 보복하기 위해 저의 모든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서 정 교수는 “믿을만한 제보에 의하면,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는 구원파 교주 유병언 회장을 여러 차례 직접 만나 식사를 하고 상당액의 금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강 목사와 김 장로가 저를 공격하게 된 것은 구원파 교주의 돈을 받고 사주를 받아서 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라며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가 유병언을 비호하는 세력이라고 구체적인 실명을 거론하며 직격탄을 날린 바 있다. 

그러면서 정 교수는 “물론 두 사람(강춘오, 김형원)은 이 사실을 부인할 것이고, 나아가 저를 고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사실 여부가 법정에서 객관적으로 밝혀지겠지요. 저도 그 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에게 들어온 제보는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이니까요. 제가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라는 책의 개정판을 지난 2010년 11월 30일에 출간했어요. 저는 그 책에서 ‘교회연합신문의 강춘오 목사와 한국기독교언론협회 김형원 장로 두 사람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이들이 상당한 금품을 구원파로부터 받았다’는 제보를 밝혔습니다. 

4년이 다 돼가는 현재까지 두 사람이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 책을 보지 못해 몰라서 안한 것일까요?’ 아니면 ‘사실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후자로 보입니다. 저는 두 분이 소송을 제기해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정 교수의 이런 주장에 대해 3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당사자인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가 정 교수를 상대로 법적소송을 제기했다는 얘긴 들려오지 않고 있다. 

정 교수는 “​저는 한기총에서 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이 사실을 이대위에 알렸습니다. 그런데도 한기총은 ‘강 목사와 김 장로가 이단교주로부터 금품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려 한다’는 답만 돌아오더라구요. 한기총이 바른 집단이고, 바르게 이단연구를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라며 한기총 역시 이단을 비호하는 세력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했었다. 이 기사가 나간 후 한기총은 홈페이지에 정동섭 교수가 사이비로 규정되었다는 내용의 공지사항을 게재했다. 

필자는 정 교수와 인터뷰를 가진 후 당사자인 강춘오 목사와 김형원 장로에게 전화를 걸어 정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설명하고 구원파 유병언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바 있는지 등에 대해 물었었다. 그 때 강 목사와 김 장로가 필자에게 했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먼저 김형원 장로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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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환 목사의 설교가 위험한 이유 

신학·사상, 목회자로서의 기본 양식의 문제...설교자는 충분한 묵상과 준비해야 

1. 
세월호 침몰에 대해 김삼환 목사가 설교 중에 한 발언이 끝없는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발언의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김 목사가 시무하는 명성교회에서 '한국교회위원회'라는 낯선 이름의 단체가 주관하여 '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 연합 기도회'가 열렸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김삼환 목사다. 이 기도회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이것을 두고도 말이 많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망언의 당사자가 주최하는 기도회에 대통령이 참석한 것이 적절치 않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는 문제되는 두 설교(2014년 5월 11일과 18일)의 녹취록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았다. 매 주일 설교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비평하는 것은 참으로 주저되는 일이다. 하지만 김 목사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리고 세월호 관련 발언이 일으킨 파장을 생각할 때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올렸고, 기자의 부탁으로 더 긴 글을 쓰게 되었다. 

두 편의 설교에 대해 설교 비평을 하자면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용섭 목사가 쓴 '예수 성공, 불신 실패의 저력과 한계'(<설교의 절망과 희망>, 59~81쪽)라는 글을 추천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 비평이 나온 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정용섭 목사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이 글에서 나는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서만 말하려 한다. 

설교의 흐름을 살펴볼 때, 문제의 발언은 거의 실언에 가까워 보인다. 5월 11일 설교의 서두 부분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회중의 공감을 살 만한 것이었다.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애들이 죽은 게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이 애들을 죽인 것입니다. 번연히 보고, 그 침몰해 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많고 많은 시간, 이 많은 국력을 가지고 애들 죽어 가는 것을 잘 죽으라고 그냥 다 버려둔 것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도 아슬아슬한 표현들이 보인다. "우리나라가 이 애들을 죽인 것입니다"라는 표현도 그렇고, "애들 죽어 가는 것을 잘 죽으라고"라는 표현도 그렇다. 우리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이긴 하지만, 반어법을 피해야 할 때가 있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는 특히 그런 표현을 피해야 한다. 피해를 입은 당사자를 생각한다면 김 목사의 표현이 너무 거칠다. 

그것으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김 목사는 조금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설교를 녹취한 원고를 그대로 옮겨 적으면 이렇다. 

"저는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를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래도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무슨 누구 책임, 지금 이런 식으로 수습하지 말고 온 나라가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애통해하고, 눈물 흘리고,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지적했듯, 이 대목은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움 때문인지, 간절함 때문인지, 흥분한 상태에서 말하다 보니 도를 넘어선 것이다. 구어체이긴 하지만, 문장의 구조가 깨어져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경우, 설교 후에 문제될 부분을 편집하여 인터넷에 올리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실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실언은 마음에 없는 말이 아니다. 실언에 그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니 위에서 인용한 발언이 실언이었다고 해도 김 목사가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마음에 있지 않고서야 그런 말이 입에서 미끄러져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의식이 없거나 부족했다는 데 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여러 가지의 생각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검열하여 부정할 것은 부정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것이 사상이요 신학이며 의식이다. 

그러니 이 발언은 단순한 실언이 아니었다. 김삼환 목사 아들의 해명대로 진의가 왜곡된 것도 아니다. 발언 자체는 즉흥적으로 미끄러져 나온 것일지 몰라도, 그렇게 말하게 만든 잘못된 신학이 그 뿌리에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을 하고도 그것을 실언으로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혹은 그 실언의 심각성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2. 
김 목사의 발언을 접했을 때, 몇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60대 초반의 한 교우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외출했던 남편이 집에 와 보니 아내가 풀장에 빠져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 사고 수습을 해야 했던 남편은 큰 충격에 빠졌다. 경황없는 중에 눈물을 쏟아 가면서 "착하기 이를 데 없던 아내에게 하나님이 왜 이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거듭 하소연을 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 사고에 대해 하나님도 안타까워하고 계실 것입니다"라고 위로했다. 

그 교우를 위한 장례 예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고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입니다. 하나님도 이 사고에 대해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분을 의지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안고 지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비통한 사고를 통해 선한 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조객들과 인사를 하는데, 어느 백인 청년이 점잖게 그러나 아주 단호하게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당신의 설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그 교우의 아들이 당시에 워싱턴 DC에 있는 근본주의적인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신학교의 학생들이 장례 예배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 신학교 학생들이 여럿 와 있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저항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도발적으로 표현할 줄은 몰랐다. 나는 조객들과 인사하느라 그 청년에게 응답하지 못했다. 인사가 끝나고 나서 그 청년을 찾아보았으나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문제다. 삼위의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주권 혹은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이 두 가지의 축 사이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밀고 밀치는 '긴장'과 서로 당기고 끌리는 '연합'의 관계 안에서 역사를 만들어 나간다. 

이 관계는 '살아 있다'.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공식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때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한계선까지 밀고 나가 '전권적으로' 역사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을 한계선까지 밀어붙일 때도 있다. 인간사의 모든 일들은 이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우리는 각각의 사건 앞에서 신중하게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에 따라서 우리의 언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사고 앞에서 비통해하는 유가족에게 나는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로써 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미끄러운 풀장에서 실족하여 쓰러지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낚아채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고가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을 탓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사이에서 후자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면 이런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 신학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 신학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그 신학 전통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전통 안에서 지내다 보면 그런 오류에 빠진다. 

'믿음이 좋다'는 평가를 듣는 사람들의 어법에 그 오류가 배어 있다. 모든 문장의 주어에 하나님이 들어간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표현한다. 그러다 보면 길을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 아래에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은 아니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통령의 통치권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의 통치권 아래에 있다. 법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국민에게 대통령의 통치권이 미친다.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은 직접 일어나게 하지만, 어떤 일은 간접적으로 일어나게 한다. 어떤 일은 대통령과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통치권은 유효하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세월호를 침몰시킨 것도 아니고, 수습 과정에서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여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대통령의 통치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대통령이 아이들을 죽게 했다"고 성토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에게 그만한 책임이 있다는 뜻으로 본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대통령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세월호 사건 후에 "하나님이 아이들을 죽였다"고 하는 말도 읽었고, "하나님은 선장과 함께 배에서 제일 먼저 빠져 나왔다"고 하는 말도 읽었다. 그 말이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공감할 수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 비극 앞에서 우리는 그 비극의 크기에 걸 맞는 비난 대상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고 원망한다. 이것은 거대 비극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유익한 기능을 감당하기도 한다. 시편에서 그 예를 많이 찾을 수 있다. 

김 목사가 이런 뜻으로 "하나님이 애들을 죽였다"고 말했다면,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하고 신뢰를 얻었을 것이다. 희생당한 사람들의 부모들의 마음을 목사가 대신 표현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 목사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평신도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다는 데 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이 가지는 다이내믹한 관계와 양극단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눈 질끈 감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못하실 일이 없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집행자가 되어 버렸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이 자주 그렇듯이, 김 목사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단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발언이 하나님의 주권을 최대한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하나님 머리 위에 서 있는 셈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의도를 단정적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 목사의 화법이 구약성경에서 배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 화법이 주로 등장하는 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 화법은, 첫째, 주로 고백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비극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하는 고백이다. 

우리가 일본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찬양하고 감사할 때 그렇게 고백했다. 김 목사는 고백에 사용되는 화법을 선언으로 오용한 것이다. 둘째, 이 화법은 주로 신탁 안에서 사용되었다. 예언자들이 이 화법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셨다는 믿음이 배후에 있었다. 따라서 어떤 사건에 대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려면 충분한 기도와 분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 목사의 경우, 그런 분별의 과정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과정을 거쳤다면 결코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김 목사의 발언은 신학과 사상의 문제일 뿐 아니라 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의 기본 양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이 설교의 대가요 가장 성공한 목회자 중 한 사람인 김 목사의 설교자로서의 기본 양식을 문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소로운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는 그의 문제는 바로 그 점에 있다. 설교자로서 혹은 목회자로서의 거대 성공에서 그의 문제가 비롯되었다. 너무 커지고 너무 높아져서 회중석에 앉아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세상만사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단하고 단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김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설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자신의 설교를 듣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까? 상상하지 못했다면 더 큰 문제요, 그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했다면 설교자가 가져야 할 목회적 마음이 무뎌졌다는 증거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하나님, 도대체 내 자식이 몸부림치며 죽어갈 때 무엇 하셨습니까?"라고 절규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설사,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었다 해도, 슬픔을 당한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김 목사의 발언을 생각하면서 설교자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충분한 묵상과 준비를 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때로 무력하고 한계적이어서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말 한마디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상처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하나님을 영영 떠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한마디의 말로 진리의 빛이 환하게 켜지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언어를 갈고 닦는 대장장이와 같아야 한다. 물론, 설교는 성령이 역사하는 도구다. 언어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변화시킨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선포하는 순간에만 역사하지 않으신다. 설교자가 기도하며 언어를 갈고 닦을 때도 성령은 역사하신다. 그렇게 정선되고 다듬어진 언어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옳게 선포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격에 맞는 품격 있는 설교를 찾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의 부탁을 받고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쏟아 놓고 나니, 덜컥 겁이 난다. 이 글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도 매 주일 설교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설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내가 누군데…라는 생각, 너는 얼마나 잘하는데…라는 생각이 나를 흔든다. 많이 주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기자에게 글을 보낸다. 동지들에게 "이렇게 해 봅시다"라는 뜻으로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김영봉 /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목회멘토링사역원 원장,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사귐의 기도> 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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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가 침체에서 벗어날 길이 있다 

▲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 

많은 교회들의 경우, 교회와 성도가 같이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그렇지 않은 교회들이 예외일 정도이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2050년까지는 성도수가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또한 2020년부터 많은 교회들이 빚을 갚지 못해 부도가 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성도들의 수는 줄고, 그 성도들 중에서도 특히 젊은 성도들의 감소로 교회 수입이 급격하게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기독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여론은 심각한 수준을 이미 넘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다. 구태여 여기에서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는 사실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책은 없는가이다. 나는 당연히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내가 위와 같이 말할 때, 나의 이 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그것은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해결책이 있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겨우 그거냐.’라는 식으로 이 말 자체를 그저 진부하게 여길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영적 분별력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 같이 나누고자 한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영적 분별력이다.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길을 그리고 우리의 처지를 볼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분별력이다. 

무슨 말이지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우선 우리는 성경을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잘 알아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경 한 구절을 여기에 인용해 보겠다.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0-15). 

당신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 예배가 어땠다고 생각했는가? 당연히 매우 타락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구절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예배를 드렸고, 어떠한 희생들을 드렸으며, 또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보라. 그들은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매월 첫날 하나님께 드리는 월삭 예배, 그리고 모든 절기와 대회를 철저히 지켰다. 

그들은 가장 좋은 수송아지, 숫염소, 어린 양을 가지고 무수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많이 기도했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대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예배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증오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타락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심지어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말씀하셨다(사 1:4). 그들은 그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영적 분별력이 철저하게 어두워져 있었다(사 6:9-10).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그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상상치도 못한 체, 오히려 누구보다 신앙생활 잘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 무슨 말이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이사야서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이사야 시대의 자기 조상들의 신앙과 예배가 매우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이미 이사야서가 성경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사야서를 가지고 많이 설교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예배가 이사야 시대의 자기 조상들처럼 그렇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씀하셨다(마 13:13-15, 15:7-9).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