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관련해 기억할 7가지 원리
양육노트(57) 영혼과 관련해 기억할 7가지 원리
(1998년 3월 29일 이한규 목사님 강의 중 발췌)
인간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해 신학자들의 의견은 2분설, 3분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2분설은 인간이 '영혼과 육신'의 둘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고, 3분설은 인간이 '영과 혼과 육신'의 셋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기 때문에 어느 견해가 옳은 견해인지는 이 시간에 논외로 하겠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영혼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영혼이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영혼에 빛이 켜져 있는가 꺼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성경에서 말하는 몇 가지 원리를 살펴볼까요?
1. 성경은 인간의 영혼을 '등불'로 묘사합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이 구절은 사람의 영혼을 촛불이라고 하지 않고 등불이라고 합니다. 촛불은 그 자체를 태워서 빛을 내지만 등불은 기름을 공급받아 빛을 냅니다. 사람의 영혼을 '촛불'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스스로 빛을 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기름이 있어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2. 영혼의 등불을 켜는 데 필요한 기름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기름이 있어야 인간 영혼에 빛이 비춰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우리의 영혼에 빛이 켜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 없음으로 영혼이 어두운 상태입니다. 믿는 것과 안 믿는 것의 차이는 영혼의 조명이 켜져 있는가 아니면 꺼져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3. 삶과 죽음은 영혼의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죽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심장이 움직이면 산 것이고 심장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영혼에 빛이 켜져 있으면 산 사람이고, 영혼에 빛이 꺼져 있으면 죽은 사람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습니다(창 2:17).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도 수백 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이 인간의 관점과 틀린 것입니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심으로 그의 영혼에 빛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을 죽음으로 보십니다.
4.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영혼의 바이러스인 사단의 침투가 용이해집니다.
요새 컴퓨터 통신을 하는 사람들은 해커와 컴퓨터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조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침투하면 원래 프로그램이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의 프로그램은 하나님의 영이 아담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 때문에 영혼에 빛이 꺼지면서 그 프로그램이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죄로 오염된 본능에 의해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5.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육신은 잠시 작동하다가 결국 기능을 멈추게 됩니다.
아담은 범죄한 즉시 영혼이 죽은 상태가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몸까지 죽게 되었습니다. 꽃꽂이를 위해 꺾은 꽃이 처음에는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듯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죽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6. 믿는 사람들은 영혼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6)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습니다. 신자도 분명히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성경이 말하는 진짜 죽음이 아닙니다. 신자의 죽음은 참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7. 구원이란 우리가 천국 가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다시 들어오는 역사를 말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으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성전을 봉헌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왕상 8:10-11). 그런데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역사!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성령충만'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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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6) 예배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며, 사람과 진정한 대화를 가지시기를 원하시며, 사람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구약시대의 제사요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엄숙한 일이고 또한 아름답고도 즐거운 일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은 모든 일보다 우선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기거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성막을 중앙에 짓고 다른 모든 장막은 성막을 향하게 한 상태로 동서남북에 지었었습니다. 이 설계는 예배드리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는 일임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율법을 살펴보면 예배하는 일의 중요성이 곳곳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민수기1장 3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20세 이상이 되어야 전사로 부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8장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 제사에 관련된 일을 맡고 있었던 레위인은 25세 이상이 되어야 성막에서 허드레 일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4장 3절을 보면 레위인은 30세가 되어야 성막의 일을 정식으로 감당하게 되고 더 나아가 제사장 자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나이 제한을 두었을까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로서 성숙한 인격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사들의 사역에서도 이러한 우선순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3절을 보면 이사야가 본 천사들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때 천사인 스랍들이 각기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웠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웠으며 두 날개로는 날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얼굴과 발을 가리웠던 네 날개는 예배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고 날아다니는 두 날개는 봉사와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최상의 열심으로 봉사하는 일보다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도 예배의 우선순위를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봉사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드리는 일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슬프게 여기고 가증하게 여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형식적인 제사, 즉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지만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두 가지 반문을 통해 이 죄악상을 고발합니다. 첫째 반문은 11절에 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 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그리고 두 번째 반문은 12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형식 본위의 의식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입니다.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나 피를 흘린 그러한 죄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밀하게 범하는 죄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이러한 은밀한 죄악을 떨치지 못한 채 가는 것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 우리의 눈은 범죄의 안개로 가려져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죄를 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오로 인한 죄도 보시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게으른 죄도 보시며 그 동안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온 악한 생각으로 인한 죄도 보십니다. 더욱이 우리의 영혼은 악과의 대결에서 넘어졌다기보다는 마음속의 작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 죽어져 가고 있음도 보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죄악을 그대로 지닌 채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습관적 행위를 '내 마당만 밟는 행위'라고 묘사하십니다.
그리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나 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자기의 부끄러운 내심을 감추려고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외식적인 행위 또한 가증하게 여기십니다. 캘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찮은 재물로 하나님께 아부하려는 어리석은 행위를 제발 그만 두십시오." 하나님은 제사 드리는 자의 수양, 수송아지, 어린양, 수 염소와 같은 헛된 제물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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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5) 점치는 행위는 용납될 수 있을까요?
죄는 죽음을 가져왔고, 죽음은 두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역시 두려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음을 정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 나에게 닥쳐와야 한다는 사실! 이 사실이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점쟁이를 찾아다니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는 소망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하나님의 권능을 사탄의 행위와 맞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술, 초혼, 영매술, 최면술, 심령수술, 이러한 행위를 영어로는 '오컬트(occult)'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오컬트에 빠지는 것처럼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사실은 없습니다.
오컬트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에 상처를 입히는 행위입니다. 아마 죄 중에 최악의 죄가 아마 이 오컬트에 빠지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토록 그 행위를 싫어하십니다.
출애굽기 2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찌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건넌 사람들 중에도 오컬트를 행하는 무당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명령을 단호하게 내리십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출애굽 당시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예수님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컬트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한 종류는 흔히 말하는 '예수 점쟁이들'이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예수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다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오컬트를 행하는 점술가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특히 '예수 점쟁이'는 더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점쟁이'는 일반 점술가들이 행하는 범죄에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까지 동시에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점쟁이'는 싫어한다고 할 수 있어도, '예수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이 부족하고 약해서 가끔 이렇게 실수할 수도 있고, 심심풀이로 점을 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도 '예수 점쟁이'만큼 싫어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컬트의 길은 넓습니다. 얼마나 호기심이 나는 일입니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 있는 일입니까? 남에게 최면을 걸어 마음대로 넘어뜨릴 수 있고 심령수술을 통해 병자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에게 영광된 일입니까?
심지어는 몇몇 기독교 리더들도 이런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오컬트의 능력만 보여주면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뭐 그렇게 사서 고생을 합니까? 그래서 어떤 최면술 학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그 학원의 수강생 중에 기독교 지도자들도 꽤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될까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만 크게 만들면 되는 것일까요?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요? 지도자도 책임이 있지만 일반 사람들도 그 책임을 모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반 무리들도 분별없이 그러한 것들을 쫓아다니다 보면 지도자들이 그런 유혹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컬트의 길은 이처럼 화려하고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불행하게도 오컬트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한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류를 괴롭히는 어려운 질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차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점술가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자신들이 대답해 줄 수 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각종 비전의 점술방법을 통해 미래를 점치는 행위는 대부분 사탄의 미혹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예언과 점치는 행위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누가 대통령이 된다! 물과 관련된 장사를 해야 성공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선포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교인들이 앞으로 더욱 복되고 바른 삶을 살도록 선포한 '위로 및 교훈'의 성격을 가진 말씀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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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4) 선한 거짓말은 필요한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신학교에서 역사서 강의할 때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의 행동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선한 거짓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학생들 사이에서 찬반양론의 뜨거운 논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들은 선한 거짓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호수아 2장에는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2명의 정탐꾼을 보낸 이야기와 그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라합은 자기 집에 찾아온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숨겨 주었습니다. 이 라합의 행동은 기민하고 능동적인 신앙의 모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즉 신앙인은 현실감각이 무디거나 미래를 내다보는 시각이 어두워서는 안되고, 라합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혜안과 하나님의 섭리가 움직이는 방향감각에 예민한 영적 촉수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합의 신분은 무엇이었습니까? 창녀 출신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본질적으로 믿음을 가지기엔 불가능한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사실입니까? 그리고 나중에 라합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여성으로서 몇 명 안되는 예수님 족보의 찬란한 일원이 됩니다. 이 사실은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행적이 결코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기독교의 진리를 잘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집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데 그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보통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아가페 주석 참고)
1. 라합의 거짓은 믿음의 행위로서 죄악이 아니라는 견해(랑게 등)
2. 라합의 거짓은 분명한 죄이지만 그 동기가 신앙적이므로 용서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견해(칼빈, 어거스틴, 매튜헨리 등)
3. 선한 목적을 가진 거짓말은 구약시대에는 죄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견해(그로티우스)
선한 목적을 가진 거짓말은 죄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선한 목적을 가진 거짓말도 분명 죄입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에(히11:31)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며 거짓을 미워하고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사실(롬 3:8)을 기본적으로 전제해야 합니다. 라합의 경우를 전례로 삼아 거짓말을 합법화하고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개념을 적용해야 할 분야는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우리 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나라를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일에 부름 받아 적군을 죽이는 형편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살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까 그런 형편에 처할 수 없다고 전쟁을 거부하면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의 살인'도 이 '선한 거짓말'에 관한 개념과 마찬가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목적이 선하면 과정상 흠집이 있는 것을 크게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선한 거짓말(백색 거짓말)은 때로 우리 인간관계를 돈독히 결속시키는 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불화와 분열을 예방하는 하나의 언어적 기술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인들마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백색 거짓말의 유희에 쉽사리 젖어들곤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백색 거짓말도 죄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상대적 윤리규범'이 아닌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진실을 이야기했다면 진정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조치하셨을까요? 또 다른 길로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백색 거짓말은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비롯된 필요악일지는 모르나,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그처럼 선한 거짓말도 죄악인 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오늘이라도 당장 선한 목적을 위해 백색 거짓말을 해야 할 형편에 처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한계적 상황에 직면하기 전에 우리는 항상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일부분을 간절히 되뇌어 자신을 다듬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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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3)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이 문제처럼 많은 사람을 의문이 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신자나 신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형태 질문을 수없이 받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인간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으셨을까요? 미래의 일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타락할 줄을 아시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타락의 씨앗을 제공하셨을까요? 선악과가 없었으면 인간이 죄로 타락하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무수히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한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1993년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한 학생으로부터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셨을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의 대답은 정확한 대답이 아니다"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강의를 할 때 칠판을 통해 쉽게 설명하려고 애쓰던 상황을 제대로 표현하여 이해에 도움을 잘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래의 설명이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두 가지의 '대 전제'가 있습니다. 논리학에서도 대 전제는 변할 수 없고 모든 원리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원리이듯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이 두 가지 대 전제는 결코 손상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 전제라고 합니다. 첫 번째 대 전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전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대 전제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전 우주를 하나님의 법대로 운행하셔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이 두 가지 전제는 순행의 일치를 이루며 나가야 하는 것이지, 역행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로의 고유 영역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법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해서는 안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법을 어긋나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인간의 타락을 미리 알고 계시다는 이유로 인간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시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법을 폐지시키시지 않습니다. 즉 후에 일어날 어떤 일에 변화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대 전제를 수정하거나 폐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타락을 막기 위해 선악과를 만들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원래 설정하신 대 전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만물과 모든 원리들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인간이 죄인이 된 이유는 '선악과를 먹었다'는 사실 자체보다 '선악과에 담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는 질문은 사실상 "법과 명령을 왜 만들었느냐?"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질문하는 "왜 선악과를 만들었느냐?"는 질문은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질문입니다. 사실본질과 핵심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더 정확한 질문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었느냐?"고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선악과'에 몰두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몰두하고 싶다면 선악과 자체'보다 선악과에 주어진 '법'의 중요성에 몰두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선악과 대신에 에덴 동산의 도토리 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에서 열리는 도토리를 그냥 먹으면 되는데 도토리묵을 해 먹으면 안돼!"라는 명령을 내리셨다면 그 명령은 하나님이 설정하신 법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왜 하나님께서 도토리묵을 해 먹을 수 있도록 도토리 나무를 만들었느냐?"고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토리 나무와 관련되어 하나님이 설정하신 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그 명령(법)을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지 않고 도토리묵을 해 먹었다면 선악과를 먹었을 때와 똑같이 그는 불순종의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사람이 죄인이며, 동시에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치명적인 죄의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대 전제 중의 하나인 '인간의 자유의지'가 또 다른 대 전제인 '하나님의 법'을 손상한 것이 타락의 원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타락하는 줄 알면 차라리 선악과를 만들지 말 것이지."라고 불평하는 것은 인간이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을 흔들어 믿음을 흔들기 위한 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도 박탈하고, 하나님의 법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을 대 전제도 무시하는 원칙 없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대 전제에 충실하시면서 그로 생겨나는 잘못된 결과를 치유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으니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과 결과가 두려워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야 한다는 대 전제의 원칙마저 무시하면서까지 문제를 막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듯이 "참! 하나님도! 선악과를 만들지 마시지"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부족한 이해로 말미암아 '선악과와 타락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권위를 부분적으로나마 의심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단의 노림수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실상 사랑은 질서 속에서 더 큰 빛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일지라도 질서를 무시한 사랑은 결코 큰 평가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질서 없는 사랑은 자칫하면 영화배우가 "오늘은 이 침대! 내일은 저 침대!"하는 사랑과 똑같은 차원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는 두 가지 대 전제라는 질서의 토대에서 사랑을 세우시기를 원하셨기에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에 설정된 법을 폐지하지 않으셨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범죄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계실지라도 지금도 우리의 거룩함을 도전하시는 명령을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질서를 다 수용하시며 우주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이제는 더 이상 선악과의 문제에 깊이 매달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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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2) 영적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3가지 의식
1. 소명의식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는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웁니다.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고 하나님이 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확고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위대한 하나님의 지도자는 소명의식이 분명합니다. 소명의식은 지도자의 확신, 열정, 목적을 분명하게 만들어주며 하나님의 뜻을 제일 우선순위에 두게 합니다. 세상의 지도자는 항상 세상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국민의 지도자는 항상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민주적인 지도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면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역사의 핵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지금 조그만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소명의식을 가지면 부러울 필요도 없고, 질투할 필요도 없고, 원망할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보내신 분을 알고 보내심을 받은 줄 아는 지도자는 시시한 것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과 생각이 다르며,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역사의 한 핵으로 인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핵은 작지만 그 속에 불이 들어가면 폭탄이 됩니다. 그처럼 현재의 자기의 모습이 미약할지라도 그 속에 성령의 불이 들어가면 핵폭탄처럼 전 인류의 가슴을 깨뜨리는 놀라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하늘이 세운 지도자에게는 때가 되면 놀라운 지도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2. 섬김의식
영적 지도자는 섬김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섬기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기서 예수님은 위대한 지도자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가치관을 뒤흔들 위대한 혁명적 말씀입니다. 만약 지도자가 섬김의식을 상실하면 지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에는 지배적 소수와 창조적 소수가 있는데 지배적 소수가 있을 때 역사는 퇴보하였고 창조적 소수가 있을 때 역사는 발전되었다." 창조적 소수는 섬기는 지도자를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마다, 교단마다, 교계마다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서로 싸우고, 분내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종의 자리는 항상 비어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좌우편에 앉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은 섬기는 자만이 앉는 자리이다."
지도자 중에서도 위대한 지도자란 일반 지도자보다 섬김의 범위가 넓고, 높고, 길다. 섬김의 범위가 넒다는 것은 섬김의 대상이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지역출신과 배경을 막론하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고향, 우리 교단... 우리 의식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배타성을 가지면 그 집단을 점점 진리와 멀어지게 됩니다.
섬김의 범위가 높다는 것은 사람들을 섬기되 하나님을 섬기듯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범위가 길다는 것은 변함없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목회와 양육 초년에는 섬김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귀찮아 소홀히 하거나, 교회가 커졌다고 섬김을 받으려 하면 안될 것입니다.
3. 순교의식
영적 지도자는 순교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는 것은 분명한 순교의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지도력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배자는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를 죽이고 많은 사람을 살리며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자기를 죽이는 자 만이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나 지도자는 죽어서 지배합니다.
청년 바울은 스데반을 쳐 죽일 때 동조하며 지켜보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의 영성이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데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성을 받은 바울도 주님의 일을 죽기까지 순종하다가 순교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지도자로 삼기 위해서 예정된 사람을 죽입니다.
순교자는 분명한 신앙 철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따르는 자를 살리며 지도력은 따르는 자를 살려주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지도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양들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소명의식, 섬김의식, 순교자의식! 이 세 가지를 겸비해야 참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개 부흥사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성자는 섬김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는 "나는 이 역사를 위해서 죽으려고 택해졌다"는 순교자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부흥사보다 성자가 역사를 지배합니다. 부흥사는 한 세대의 소리로 끝납니다. 살아서 소리치고 크게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자는 고난과 가난과 굶주림이 그에게 따르지만 역사는 그의 손에 있습니다. 2천년 교회사는 성자가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진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자는 순교자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항상 자신이 어느 길을 가는지, 어느 편에 서야 할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 지도자는 이 세 가지를 다 겸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보낸 사자입니다. 동시에 섬기는 종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순교의 길을 가야 하는 자입니다. 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도자의 영성이다. 이 영성을 가진 사람은 세상도 감당할 수 없고 천사도 감당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냈다. 내가 너를 섬기는 자로 세웠다. 내가 너를 순교자로 세웠다." 이 말씀에 응답하는 자가 된다면 그를 통해서 하늘과 땅과 역사가 움직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주님 자신이 그런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지금 우리도 주님처럼 이런 길을 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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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1) 지도자론(1) 지도자와 지배자의 6가지 차이
< 이 양육과 지도자론은 몇 차례에 걸쳐 게시할 예정인데 1994년 8월 2일 신학교의
방학 특강 때 강의한 것으로 저의 기억으로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한신교회 이중표 목
사님의 책에서 일부 내용을 참고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이중표 목사님께 늦게나
마 감사를 표합니다. >
양육의 문제에 있어서 양육을 성공시키고, 실패시키는 최대의 분기점은 바로 지도
자의 자질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양육론은 달리 말하면 지도자론이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도자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 지도자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먼저 정립하기 위해서 지도자와 지배자의 6가지 차
이를 한번 살펴볼까요?
< 지도자와 지배자의 6가지 차이 >
지도자에 대해서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서론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배자와 지도자의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지도자론의 개념은 여기에서 출발해
야 합니다. 지배자와 지도자의 차이를 살펴볼까요?
첫째, 지배자는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이긴 사람입니다. 남을 넘어뜨리고 죽이고 승
리한 사람입니다. 이런 지배자들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이고 영혼을 살리는 사람입니
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다른 사람과 싸워 승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초
월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배자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오직 성공을 향해 매진합니다. 그러나 지도자
는 자기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자 기꺼이 자기를 희생합니다. 그래서 지배
자는 다른 사람과 싸워 이긴 성공자요, 지도자는 자기와 싸워 이긴 승리자입니다.
셋째, 지배자는 스스로 되기도 하고 사람들이 세우기도 합니다. 다수의 지지에 의해
선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사람이 죽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하늘이 세웁니다.
그래서 때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버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세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지배자는 살아서 지배하고 죽으면 끝이 납니다. 지배할 때는 그를 따르는 사
람이 많으나 죽은 후에는 그를 외면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죽어서 지배하고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보십시오. 그토록 많은 총회장이나 부흥사들은 반
짝 이름을 남기고는 이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순교자 손양원, 주기철 목사의 영성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섯째, 지배자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그 자리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지도자
는 위대하다고 존경은 하면서도 그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여섯째, 지배자는 다스리기 위해서 위에 군림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인도하기 위
해서 겸손하게 섬깁니다. 그래서 지배자는 통솔력을 갖추어야 하고, 지도자는 지도력
을 갖추어야 합니다. 통솔력은 외적인 조직과 권위로 창출될 수 있으나 지도력은 인
격적 감화로 이루어지는 내적인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지배자는 명령으로 순종을 강
요하나, 지도자는 감화로 순종하게 합니다.
우리는 지배자가 되지 말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요? 누구든지 예수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따르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너무나도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좌
의정, 우의정 등 영광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
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
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
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
라."(마 20: 26-28)
예수님은 일관되게 이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정신을 이해한 후
에야 비로소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 정신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지도자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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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50) 치유(4)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7가지 이유
오늘날 왜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
문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7가지만 생각해볼까요?
1. 영혼의 구원보다도 육체의 치유를 더 바라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구원이 중요하긴 하지만 영혼의 구원이 먼저라는 사실을 결코 있지 말아야 하겠
습니다. 지금 병든 분에 계십니까? 먼저 하나님께 "하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주
님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라고 영혼의 구원을 부탁드리는 신앙의 고백을 해보십시
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2. 잘못된 목적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드문 경우라고 믿고 싶지만 어떤 치유 기도자는 치유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요, 치유가 일
어나면 자기가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치유되었다고 열심히 선전하고 다닙니다. 참으로 안
타까운 현실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게 바로 사탄 아니겠습니
까? 사탄은 때때로 육체의 질병을 거두어 가는 상황을 활용하여 영혼의 질병을 가져다주려
고 기회를 엿볼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유'를 선전하는 곳에 가서 기도 받는 것에 대해 조
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받고 싶으면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에게 기도 받을 바에는 오히려 스
스로 기도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를 원하는 기도를 할 때는 "하
나님, 저를 통해서 주께서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3. 예수님보다 목사나 치유 기도자를 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나 치유 기도자는 그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치유를 돕는 자에 불과한 사람들입니
다. 그러므로 병들어서 치유가 아무리 절실하게 요청될지라도 치유 기도자를 바라보지 말
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불순종이나 불신앙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은 불신앙과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심하면서 하
나님의 치유를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신다면 말로만 하나
님을 믿는다고 하지 말고 진정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의 주장과 고집을 꺾고 주
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5.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지은 죄에 대해 회개를 했다고 하나 그러한 죄를 계속 지으면 그것은 참된 회개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상습적으로 짓는 범죄를 하루속히 멀리 해야 하나님의 치유
의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혹시 치유를 원하시는 분들 중에서 과거로부터 상습적으로 짓
는 범죄가 있다면 하루 속히 그 죄를 청산해보십시오.
6. 기도의 응답이 오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 인간의 시간표와 다른 것입니다. 인간의 시간표에 안달하다가
하나님의 역사하지 않음을 원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한번 기다려 보십시
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전격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서서히 나
타나기도 합니다.
7.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병이 낫지 못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제까지 병이 낫지 않고 있으니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요"라고 생각
하시며 실망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진실하게 기도를 해도 병이 낫지
않는 경우도 있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상 유명한 성인들은 모
두 일찍 죽지 말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선한 계획이 있으면 병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 경
우에는 죽는 계획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으로 하루 빨리 안겨서 천국
에서 편히 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7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이 있어서 병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비록 병의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라
도 큰 의미에서 하나님의 치유는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의
치유란 육체의 치유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의미하며 병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는 것
과 동시에 존엄하게 죽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의 죽음은 하나님의 또 하나의 치유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죽는 그 순
간에 바로 영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안식
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진실하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기적적인 치유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치유의 기적이 나의 육신에, 나의 정신에, 그리고 나의 가정에 일어나기를 원하십니
까? 그렇다면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치유 기도자를 바라보지도 말고 치유 자체를
바라보지도 마십시오. 치유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면 기적적인 치유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관심이 있으면 병은 저절로 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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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노트
제목: 양육노트(49) 치유(2) 스트레스도 필요합니다
(2001-12-15 오전 3:43:05)
이름: 이한규목사(john@john316.or.kr) 조회수: 503
본문
양육노트(49) 치유(2) 스트레스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합니다.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은 신체적 탄생으로 어머니 뱃속에서 처음 이 지구상에 태어나
는 것을 말합니다. 이 날을 우리는 생일이라 하여 오래도록 기념하지만 실상 이 날은
별로 중요한 날이 아닙니다. 인간 이외의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은 영적 탄생으로 하나님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내가 누구인
가를 처음 생각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하
에 이 지구상에 보내어진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인간이 다른 생물과 극적인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바로 이 두 번째의 탄생이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 번째 태어나는 것은 사명적 탄생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구체적으
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처음 생각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영적 탄생의 순간은 참으
로 중요한 순간이지만 이 영적 탄생은 꼭 사명적 탄생으로 발전되어야만 합니다. 즉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깨달음 자체에 만족하지 말고 그 깨달음을 삶에서 실천하
도록 해야 합니다.
사명적 탄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명감을 가지는 것! 이것은 참으로 소중한
신앙의 열매일 뿐만 아니라 건강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사명을
가지고 일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게으름은 질병이
틈타기 위한 가장 좋은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게으른 사람이 건강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휴식이라
는 것도 열심히 일한 다음에 해야 제 맛이 나는 것입니다. 무작정 많이 쉰다고 피로
가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충분한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달고 맛있는 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근면이라는 생활의 절제는 불면증이라는 질병을
위시해서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참으로 소중한 보약이 됩니다.
서양 속담에 지나치게 잠을 자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수면시간이 길면 길수
록 뇌세포가 활성화되는 시간이 줄고 두뇌기능이 저하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난 뒤 기분이 개운치 않으면 수면부족이라는 핑계를 대고 이부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열 시간의 잠으로도 부족하다는 사람입
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사람은 여섯 시간의 잠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
요한 것은 수명의 양이 아니라 수면의 질입니다. 짧은 수면을 취하고도 활기찬 하루
를 시작하는 사람은 깨어있는 동안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과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단잠을 자게 됩니다. 근면한 사람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근면한 사람은 다른 질병도 잘 이기는 내성
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혹시 불면증에 걸려 있습니까? 혹은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십니까? 일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 보
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일을 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서
몸의 피로감이 더하게 될 것이고 질병이 틈탈 확률도 더 많지 않습니까?" 언뜻 생각
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건
강에 대단히 좋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건강을 위해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합니다. 나룻배는 바닥짐이 있어
야 균형을 유지하며 트럭은 알맞은 적재량이 있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긴장이 유지되어야 몸이 민첩해지고 신진대사가 원활
해집니다.
반대로 무제한의 자유와 방종과 무사안일은 인간을 타락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
로 스트레스가 있을 때 스트레스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육상 종목의 신기록은 조용한 연습장에서는 수립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관중의 환
호 속에 다른 선수들과 치열한 경쟁을 할 때 신기록이 수립됩니다. 학생들이 가장 효
율적으로 공부하는 기간도 학기말 시험이나 리포트 마감시간이 임박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입니다. 배우들이 가장 감동적인 연기를 할 때는 리허설을 할 때가 아니라 많
은 청중들이 지켜볼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스트레스는 일의 추진력을 높여주고 인간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깨우
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노화를 방지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만약 긴장이 풀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오히려 노화현상이 촉진된다고 합니
다. 남자의 경우 실직이나 퇴직 후 1-2년 사이에 만성질환의 발병률이 높고 사망률이
급증합니다. 직장에서 과로로 쓰러지는 경우도 일에 쫓겨 한참 바쁜 때보다 일이 마
무리될 무렵의 긴장이 풀렸을 때라고 합니다.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었을 때에는 몸이 활성화되고 저항력이 높지만 긴장이 풀리면
신체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져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고무줄을 잡아
당겼다가 갑자기 놓으면 큰 충격이 일어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긴
장은 서서히 풀어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차가 정지하기 위해서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야 충격이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가진다는 것은 질병을 이겨내는데 참으로 좋은
역할을 합니다. 스트레스를 불평하지 마십시오. 적당한 스트레스는 그 스트레스를 이
기려고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활성화시키는 좋은 촉매제가 될 수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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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47) 진리의 기초(십자가와 부활의 믿음)
기독교의 진리는 아름답습니다. 사랑도 질서 있는 순결한 모습이 되어야 아름다운 사랑
이 되듯이 진리도 질서 있는 모습 속에서 그 아름다움이 빛나게 됩니다. 어떤 진리가 무질
서와 독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잘못된 진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서의 하나님은 무질서의 법칙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두시
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한다고 하면서 청중에게 상스러운 욕을 다반사로 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
무리 생각해도 적절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안찰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때리고, 발길질을 하
고, 처녀의 몸을 마구 주무르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정상적인 모습일까요? 방언의 은사
를 주겠다고 <할렐루야!>를 백 번 부르면 방언이 터진다거나 <주여!>를 백 번 부르면 방
언이 터진다는 말도 많은 분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성경을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여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상반된 행동을 취하는 태도도 조
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 분들과 싸움을 많이 하는 어떤 집사에게 "예
수 믿는 사람이 싸워서 되겠느냐?"고 화해하라고 했더니 그 집사가 "진주를 개에게 던질
수 없다"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며 화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잘못 인용하는 일입니
다.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 중의 하나가 사랑인데 그것을 외면하고 말씀을 자기 상황을 변
호하는 말씀으로 맞추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주위의 신
앙생활에서 보여지는 각종 무질서와 독선을 단호히 배격해야 할 것입니다.
'대중 연설의 신'이라고 불렸던 히틀러는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 대중 조작술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할 바에는 크게 하라. 대중들은 작은 거짓말에는 잘 속지 않
지만 큰 거짓말에는 잘 속는다. 그 이유는 그들도 작은 거짓말은 잘 하지만 큰 거짓말은
감히 머리에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 큰 거짓말로 인하여 조작된 대중의 모습이
아닌지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어있는 기독교인이 되
어서 각종 거짓의 우상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참 하나
님,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길 원하십니다. 진정 진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 고난은 인간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꼭 있어
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랄프 얼(Ralph Earle)이란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습니
다. "이 세계의 가장 어두웠던 시간, 그러면서도 이 세계의 가장 밝았던 시간, 이것이 십자
가의 역설이다. 인간의 증오가 가장 극렬한 초점에 이르렀으니 가장 어두웠던 시간이요, 그
런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피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니 가장 밝은 시간이었던 것이
다. 갈보리는 인간 역사의 기로에 서 있다. 과거의 하나님의 모든 길이 갈보리로 향했으며
현재 및 미래의 모든 길이 이젠 갈보리로부터 시작된다. 십자가에서 모든 세대의 모든 죄
들이 하나님의 무죄하신 아드님의 마음 위에 놓여져 있다. 십자가에로부터 구원이 모든 믿
는 자에게로 흘러간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지금까지 들어본 것 가운데 최대의 기쁜 소식
이다."
영원한 것이나 영원성을 제공하는 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우리들에게 영생의 길을 펼
쳐 준 십자가가 바로 진리입니다. 감정도, 의지도, 힘도, 환경도 모두 변하지만 십자가의 진
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 십자가의 진리에 놓일 때 그 신앙은 반석 위에
놓여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부활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을 때 동시에 부활도 믿
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몸부림은 부활이란 최후 승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여기서 부활이란 육신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향기가 나타난다면 우리의 삶이 부활한 것입니다. 진리
를 받아들임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가지게 된다면 또한 우리
의 정신이 부활한 것입니다. 혼돈의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전인적인 부활이 있
어지기를 고대하며 기도하십시오! 감정에 지나치게 좌우되지도 말고, 의지를 지나치게 앞
세우지도 말며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도 '거룩한 이'가 상상에 넘치는 사랑으로 찾아와 영
생의 길을 열어주셨음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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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41) 귀신들린 자의 특징
지금 귀신들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보고 어떤 분들
은 "왜 이 즐거운 날에 '귀신, 귀신' 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
게 강조할 수밖에 없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이 즐거운 날에 바로 귀신이 활발하게 활
동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의 고통스런 상황이나 성격적인 결함을 무조건 귀신의 탓으로 돌리
는 그러한 <귀신 사냥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은 기독교의 전 역사를
통해 악한 귀신과의 영적 전쟁을 강조하셨기 때문에 귀신과의 영적 전쟁에 관해 우리
는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어둠의
세력들을 몰아내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전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준비가 되었건 안 되었건 우리
는 영적 전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
다. 그것은 우리는 이미 귀신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의 대장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귀신의
정수리를 깨뜨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이미 종이 호랑이요, 늙은 사기꾼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많은 신자들이 귀신들이 자신들
을 지배하고 기만하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승리한 사람들이 마치 포로처
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포로가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
이 귀신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어느 땐가 귀신으로부
터 고통을 당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귀신으로부터 포로
가 된 것을 우리들은 '귀신들렸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것은 정신질환자
의 정신병과는 근본 원인은 같은 귀신의 역사로 출발하지만 증상은 약간 다르게 나타
납니다. 귀신들린 자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많이 있
겠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볼까요?
첫째, 귀신들린 자는 불가사이한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성경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거라사인 지방의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
다. 그리고 그 귀신들린 자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어놓아도 쇠사슬을 끊고 고
랑을 깨뜨려 아무도 제어할 힘이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린
자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1987년 10월 초 제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얼마 전에 OOO교회 금식 기도원에 3일
간 장래문제를 위한 금식기도를 하러 갔었습니다. 금식 3일째를 맞이했을 때 저는 커
다란 대성전 의자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에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보니 대성전 구석의 피아노에서 어떤 젊은 처녀가 피아
노를 아무렇게나 마구 치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기도원에서 근무하는 남자 목회자들 대여섯
명이 달려와서 그 여자를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처녀는 남자들을 가볍게 뿌리치고 '히히'하고 소리지르며 성전 안을 이
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성전 긴 의자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긴 의자를
안으며 착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정 대여섯 명이 그 젊은 여자를 의자에서
떼어내려고 했지만 한참 동안 그 여자를 떼어내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로부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 발산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종종 이렇게 엄청난 힘
을 발휘합니다.
둘째, 귀신들린 자는 마음의 갈등이 계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거라사인 지방의 더러운 귀신들린 자는 마가복음 5장 6절을 보니까 멀리서 예수님
을 보고 자진해서 달려와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5장 7절과 8절에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자진
해서 예수님을 뵈려는 태도를 가질 때는 언제고, 금방 예수님이 자기에게서 떠나기를
바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금방 보고 싶었다 금방 미워지는 마음의 갈등! 종잡을 수 없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마음의 갈등! 이러한 갈등이 심한 것은 바로 귀신들린 자의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
래서 귀신들린 자는 생각에 지속성이 없고 돌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다물
결 같이 계속 흔들리는 감정! 이랬다 저랬다 계속되는 갈등의 감정! 이 감정을 통해
귀신이 뿌리를 내리게 되며, 이 갈등의 감정이 심해지면 귀신에 속박 당하는 현상, 즉
귀신들리는 현상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셋째, 귀신들린 자는 교회의 성물 또는 하나님께 속한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습
니다.
귀신들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대개 일반 정신
병 환자들은 성물에 대해 특별히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귀신들린 자의 특징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귀신들린 자는 남
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지기도 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
소리로 말하는 능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귀신들린 자의 특징을 항
상 염두에 두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백성으로 더욱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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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40) 귀신을 막는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
귀신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되어 있는 성도를 결코 이길 수 없을 뿐만이 아니
라 경쟁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온전히 무장된 성도는 귀신이 어
떠한 식의 공격을 해도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욥, 다윗, 베드로, 바울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들의 궁극적인 승리는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
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약하면 약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은 더
욱 크게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군사로서 영적전쟁에 참여해
과감히 귀신을 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군사는 항상 골방에 앉아서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기도한 후에는 전방에 나가서 열심히 싸워야 합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귀신의 장단에 춤추고 있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귀신의 수중
에서 빼앗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일은 어려운 일이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은 언제나 자
신을 위하는 일보다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그들이 섬기는
임금 가까이 머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임금의 입장에서 보면 부하들이 모두
자기 주변에서만 섬기려 하는 것이 늘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충신들은 조정
을 떠나 먼 변경에서 적들과 대적하면서 나라를 지키기를 자원하며 어떤 식으로든지
임금을 섬길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명예로 여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
고 전선에 나가 귀신을 대적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군사의 모습임을 잊
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에베소
서 6장 14절에서 17절까지 6가지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째, 진리의 허리 띠가 필요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
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
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귀신을 대적하는 크리
스챤의 진정한 용기는 바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 때 생성됩니다.
둘째, 귀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의의 흉배가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깨끗함을 닮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유혹에서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유혹
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페르시아 속담처럼 우리는 새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 위에 새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가 있
습니다.
셋째, 귀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평안의 복음의 신이 필요합니다. 맨발로 전쟁을 치
를 수는 없습니다. 평안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모든 죄와 저주를
깨뜨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귀신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성도들이 내세울 때 귀신은 쫓겨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 귀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방패가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
보니까 이 믿음의 방패로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할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화전이 무엇입니까? 귀신이 쏘는 불화살을 말합니다. 귀신은 끊임없이 우
리에게 화전을 쏘는데 특히 귀를 향해서 많이 쏘고 있습니다. "누구는 어떻다, 어떻
다"고 하며 없는 말을 만들어 듣는 사람들을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들에
공연히 실망할 것 없습니다. 그 가운데 귀신의 장난을 인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섯째, 귀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투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예수
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은 그 구원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때
때로 성도들이 본의 아닌 죄를 짓게 되었을 때 귀신은 다음과 같이 성도의 죄를 확대
시킵니다. "자! 이제 네 본래의 색깔이 어떠한지 확인했겠지? 네 옷에 묻은 얼룩을 좀
봐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너처럼 그렇게 죄를 짓지 않잖아? 너의 모든 삶은 위선
투성이! 하나님께서는 너와 같은 인간은 상종도 하지 않을 걸!"
이렇게 귀신은 일격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려고 합니다. 그 작전에 넘
어가면 수년 동안 쌓아 온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하심이 귀신의 악의에 찬 한마디로
붕괴됩니다. 그리고 귀신은 아수라장을 만들고 떠나면서 "모든 잘못은 너에게 있어!"
라고 정죄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구원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의롭다고 하신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랬다 저랬
다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늘 긍정적이고 진실하십니다. 귀신은 우리의 불
완전성을 증가시키고 우리가 아무리 완전하려고 노력해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걸고
넘어지지만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문제에 실망하지 말고 가볍게 지나치
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우리의 행위 때문에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귀신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6장 17절에 있는 대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성도는 마치 무기를 갖지
군인처럼 약합니다. 이 사실을 귀신은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
씀을 빼앗기 위해 교묘한 전략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게 무진장 애를 쓰
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과 항상 가까이 하도록 해야 하
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
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어느 것 하나도 귀신을 대적
하기 위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온전히
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때로 이러한 무장이 벅차고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
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배의 하중이 클 때에는 선원들이 해야 할 일도 자연히 많
아져 벅차고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하고 바람이 거셀 때 배
의 하중이 더 큰배가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반면에
배의 하중이 적은 경우에는 선원들이 좀 편할지 몰라도 풍랑이 심할 때는 꼼짝 못하
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대는 참으로 세찬 풍랑이 몰아치는 세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역사상 이처럼 유혹이 많은 때는 없을 것입니다. 수 없는 유혹이 우리
들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으며 귀신들은 호시탐탐 우리들을 삼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조금 편하겠다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벗어버리면 귀신들이 유혹할 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영적인 무장을 하십시오. 성도의 영적인 무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념비를 쌓아
올리는 하나하나의 돌일 뿐만이 아니라 죄와 유혹을 이기는 튼튼한 방어벽 구실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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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노트(39) 귀신이 존재하는 증거 3가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심각한 영적인 전쟁의 와중에 있습니다. 누구와의 전
쟁입니까? 육체와의 전쟁이 아닙니다. 바로 '귀신'과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
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21세기 과학 문명시대에 '귀신'이 웬 말입니까? 웬 말
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귀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사이래 귀신과 더불어 살아 왔습니다. 세계 역사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았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어느 나라를 막론
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귀신이 있다는 사실에 대
한 믿음은 온 인류에게 있는 보편적인 믿음이자 인류 역사가 증거해 주는 믿음입니
다.
둘째, 우리는 실존적 체험에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현대 귀신 활동의 영역과 체험은 인간의 상상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사
람들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 귀신의 세력에 짓눌려 있거나 예속되어 있습니
다. 귀신의 활동과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는 이 거센 악의 바람과 인간 정신에 미치는
강한 영향력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히틀러는 참으로 놀라운 통솔력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상할 수 없는
잔인성을 발휘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고 정의를 내세워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평생동안 그의 귓가에서 조
용히 속삭이는 음성을 따라 행동했었기 때문이라고 그 자신이 증거했었습니다.
이 속삭임이 귀신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 예수님을 시험하
던 마귀의 속삭임과 같은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속삭임이 들린다는 사람을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르치고 있는 신학생 중에도 과거에 이러한 소리
를 들었다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단순히 호르몬 체계의 이상이라는 의학
적인 원인으로 돌릴 수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귀신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 귀신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은 곳곳에서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귀신의 역사와 능력이 얼마나 집요하고 강한
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귀신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자세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자세입니다. 귀신이 어떠한 일을 하
고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귀신은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핍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어떤 때는 질병으로 공격하고, 어떤
때는 유혹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소중
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더욱 깨어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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