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강해
갈라디아서
I. 서론 1:1-5
1.이 서신의 발신인(1,2)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 첫째, 바울은 그의 직책과 그 직책을 얻게 된 입장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사도의 직책을 가졌다. 그는 어떻게 하여 그 직책을 얻게 되었는지를 그들에게 알리며 또한 그 직책을 위임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도된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의 직책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도로 위임받은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였다.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실 때 그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둘째,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그와 함께 있었던 모든 형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가 가르쳐서 이제 그들이 확신을 얻으려는 교리에 대해서 그들도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이 서신의 수신인(2)
이 수신인들은 모두 그들 가운데 몰래 들어온 유혹하는 자들의 술수에 의하여 다소 타락하였던 것같다.
3.사도의 기도(3-5)
은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위한 그의 선하신 행위를 내포하며 평강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내적 위로와 외적 번영을 모두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원하고 있다. 첫째는 은혜요 그 다음을 평강이다. 왜냐하면 은혜 없이는 참 평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결코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4절). 이 현실적인 세상은 악한 세상인데 이것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악한 현실의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셨다. 이것은 그의 백성을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옮기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구원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이신 것과 같이 주 예수 안에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진지한 찬양과 영광을 들리면서 서른을 끝마친다(5절).
Ⅱ.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책망 1:6-9
[1]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변질된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고 있다(6-9절). 그들의 신앙적 변질이 크게 책망을 받아야 하는 이유들은 이러하다. (1)그들은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났다. ' 그들은 사도 바울을 떠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떠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과 자비를 크게 남용한 죄를 범하였다. (2)그들은 비할 대 없는 큰 축복과 은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누렸던 큰 특권에 비래하여 그 특권을 포기한 죄와 어리석음이 컸던 것이다. (3)그들은 속히 복음에서 떠났다. 그들은 그들이 가졌다고 생각하였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존경을 아주 빨리 버렸다. 이것은 그들의 연합을 보여 주는 실례인 동시에 그들의 죄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다. (4)그들은 다른 복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을 좇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지 않는 한 다른 복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한 길 외에 다른 길로 천국에 이르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큰 과오를 깨닫게 될 것이다.
[2]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유일하고도 참된 복음이었다(8,9절). 그리하여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자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8절). "만일 너희가 우리의 이름을 빙자하거나 천사로부터 복음을 받은 체 하여 너희에게 전파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너희는 속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저주를 받게 된다."
Ⅲ. 사도직에 대한 바울 자신의 변명 1:10-24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을 이제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그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도라 선언하였으나 이제 이곳에서는 앞에서 이야기 한 그 자신의 인격과 직책에 대한 주장을 더욱 직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1] 자신의 사역의 범위와 계획으로부터 입증한다(10절).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행동한다고 고백했듯이 이곳에서 그가 우선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죄인들을 다시 하나님께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을 회생시키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도임을 입증하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것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2] 그들에게 전한 그 복음을 그가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입증한다(11,12절). 사도의 특성 가운데 특별한 한 가지 사실은 그가 부름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 하며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직접 그 직책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가르치는 권한도 직접 주 예수로부터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입증은 다음과 같다.
(1)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체험한 사실을 그들에게 이야기한다(13,14절). 그 자신이 아주 큰 변화를 일으켜 전에는 매우 심하게 반대하던 교리에 대해 신앙고백을 할뿐만 아니라 그 교리를 전파하게 된 이면에는 그에게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2)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사도의 직책에 임명된 놀라운 방법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한다(15,16절). 바울의 경우 그에게 일어날 갑작스럽고도 엄청난 변화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 방법 속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다. 즉 그는 그 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단지 외적으로만 나타나신다면 큰 의의가 없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 가운데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바울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며 또한 사도이기도 한 것이다.
(3)그 이후 그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한다(16-24절).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당연히 복음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한 권위를 위해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질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그의 직책에 대해 확고한 주장을 하기 위하여 엄숙한 맹세로써 그의 설명을(20절) 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지만 중대하고 결정적인 일에 있어서는 맹세가 때때로 합법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은 그 당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친교가 없었으며 그들 역시 바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바울 안에서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보고는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으로 충만케 했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을 감동시켜서 그일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I.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2:1-10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파되던 때부터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과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였으나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2차 전도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갈 2:1-10).
[1] 그는 1차 전도여행(갈 1:18)을 한 후 14년이 지난 뒤에야2차 전도 여행을 했다(행 2:1,2), 이곳에서 14년이란 대체로 1차 전도여행 후 14년을 말하지만 일부의 학자들은 그의 회심 이후 14년 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후 14년을 말하기도 한다. 그가 다른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 몇 가지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곧 그가 다른 사도들과 오랫동안 떨어져서 복음에 대해 그들에게 묻는 일이 없이 순수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14년 후에 내가 …올라갔노니. 만일 이곳에서 언급한 여행이 사도행전 15장에서 기록된 것과 같은 여행이라면 우리는 왜 바나바가 그와 동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바울의 동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디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이방태생이며 무할례자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와 동행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교리와 그 의식은 지엽적인 것임을 나타내 주려는 것이다. '그는 계시로 인하여 올라갔다':사도 바울이 종종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는 은총을 입은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에 따라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행동에 대한 설명(2-10절)
1)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사사로이 한 것은(2절).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신실하고도 신중한 모습을 보게된다. ①그는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해왔고 또 계속해서 전파하고 있는 교리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실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 ②그는 분별 있고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사로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가 이와 같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이유는 그의 반대자들을 동요시킬 경우 지난날의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가 삭감되거나 장차의 노력이 방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의 목적은 그의 교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을 받던 받지 않던 상관없이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2) 그는 자신이 전했던 교리를 확고하게 고수하였다. 그는 비록 헬라인인 디도와 동행했으나 그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륵 강요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전혀 할례를 주장한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이 누렸던 자유를 시기하여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을 설득시켜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하였다면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용이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모세율법의 멍에에 예속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해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 그는 모세의 의식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 그 자유를 굳건히 지키고자 했다.
3) 바울은 비록 다른 사도들와 친교를 가졌으나 그들로부터 어떤 지식이나 권위를 받은 것은 아니다(6절). 그들이 먼저 사도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그들과 동등한 사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가 전에 계시에 의해 알았던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가 그들에게 전한 교리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4) 다른 사도들은 바울의 신적 사명과 권위를 충분히 확신했으며, 따라서 그를 그들의 동료 사도로 인정했다(7-10절),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했으며 그들이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나라로 가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그 회의는 완전한 조화와 일치속에서 끝났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교리와 행위를 모두 인정했으며, 바울도 본래 힘써 행하였던 가난한 자를 생각하도록 권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더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비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만 그 자비를 한정해서는 결코 안되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Ⅱ.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2:11-21
[1] 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도 베드로와 나누었던 또 다른 대화와 그곳에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알린다(11-14절). 다른 곳에서는 그들 사이에 좋은 조화와 일치가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바울이 베드로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베드로의 실수: 베드로는 이방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 몇 명이 예루살렘에서 그곳으로 오자 그는 그곳을 떠나 물러갔다. 이곳에서의 그의 실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회식에 유혹되었다. 다음의 사실을 유의하라. ①훌륭한 사람에게도 나약함과 변덕스러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도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염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망설이는 경향이 있다. ②나쁜 본보기 특히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쁜 본보기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2)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바울은 베드로의 처사를 보고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책망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가 죽어 머뭇거리고 있었으나 그는 그의 소신대로 단호하게 행동했다.
[2] 그는 여기서 복음의 근본 교리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칭의가 율법의 행위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였던 교리이며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교리인데 이 교리를 확증하는 것이 이 서신의 주요 목적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처사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말이 거짓인가? 만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면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사실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부인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17절). 즉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한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였으나 우리는 그 교리에 의해 의롭게 되기는커녕 계속적으로 죄인으로 남아 있게 된다면 그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히 그 말을 부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완전하고 효험이 없는 칭의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생각을 금하신다"고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절)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죄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2)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과 행한 바를 우리에게 알린다. ①'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는 칭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희생제물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희생제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에 대하여 죽었지만' 그 자신을 율법 없는 자로 생각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복음의 교리는 의무에 대한 멍에를 약화시킨 것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고 확고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율법에 대하여 죽었지만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이었다. ②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20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새 사람은 살아 있다. 죄는 억제되고 은혜는 소생된 것이다. 나는 살았으나 산 것은 내가 아니다. 그는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승리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부터 왔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는 죄에 대해 죽으려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여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여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그는 외형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이 살았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법칙 즉 그를 지지해 주는 높고 고귀한 원칙을 가지고 살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3)그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통하여 두 가지 큰 난제를 해결했다. ①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소용없게 되기 때문이다.
Ⅰ.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책망함 3:1-5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1절에서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물으며 그들을 책망했다. 그들은 칭의의 수단으로써 그들이 배워 온 복음을 고수하지 않았다. 진리를 알고 또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진리에 복종까지 해야만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입증할 만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1절). 그들은 십자가의 교리에 대해 배웠다. 주님께서 베푸신 성만찬이 그들 가운데서 행해졌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았다.
[2] 바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고 있다(2절). 그는 그들이 어떻게 이 은사와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별하기를 원하였다 그렇게 된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사실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인정해야만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지난 과거의 행위와 현재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한다(3,4절). 그들은 시작은 잘 했으나 이제는 율법에다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율법의 준수를 더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완전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복음의 진보 대신에 그 반대 현상을 일으킨다. 그들은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커녕 완전한 비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고통까지도 감당했다. 만일 그들이 지금 복음을 버리게 되면 더욱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4] 그는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고 기적을 행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그는 그 사역자들이 율법의 행위로 그렇게 했나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나에 대해서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의 행동이 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자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확실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입증까지 되었던 교리를 버릴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Ⅱ.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교리 3:6-18
그는 주로 그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책망 받았던 교리에 대해 입증한다.
[1]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사실에 관해 언급함(6절):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잡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7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그들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8절). 하나님은 믿음에 의한 방법으로써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서 즉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이 축복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받게 되는 것 역시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에 의한다.
[2]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만 의로워짐: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을 경우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 율법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면 분명 추방을 당하고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10절). 율법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 상태는 완전해야 하고 인격적이어야 하며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이에 대한 용어는 12절에서와 같다. 우리의 순종이 보편적이고, 계속적이지 않는 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그 율법의 저주 아래 있게 된다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후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13절) 이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는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이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 특히 성령의 놀라운 약속에 대한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자신들을 율법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11절).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과 행복을 얻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뜻이다. 율법은 생명의 조건으로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은 우리의 칭의를 위한 규범이 결코 될 수 없다.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사도 바울: 이 언약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도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8절). 이 언약의 본래의 뜻은 언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비록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유언이 폐기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16절), 바울은 그런 염려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아브라함도 선지자들도 다 죽고 없다. 그러나 이 언약은 아브라함 및 그의 자손과 맺은 언약이다. 사도 바울은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율법은 먼저 있었던 언약이나 약속을 폐기할 수 없다(18절). 만일 유업이 약속에 의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취소하시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후회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Ⅲ. 율법을 주신 목적 3:19-29
하나님은 어째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나?
[1]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19-20절). 이스라엘 백성도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확신시켜 주었다. 율법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그리고 율법은 이처럼 때가 차기까지의 범죄로 인하여 주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속된 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나타났을 때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다. 비록 자연법으로서의 율법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법적 언약의 구속과 그 공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가 많음을 보여줌으로써 약속의 필요성을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인도할 뿐이다. 약속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직접 주어지는데 반하여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주어졌다. 그러므로 율법은 약속을 폐기하려고 의도되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20절).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보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을 폐기하신다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약속을 폐기하신다는 사실은 그의 진리와 신실함에 모순되는 일이다. 모세는 단지 중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2] 율법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21-23절). 율법은 결코 약속과 모순되지 않는다. 율법의 의도는 인간들의 범죄를 드러내게 하고 그들에게 율법의 의보다 더 좋은 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22절). 율법은 죄인들의 상처를 드러내었을 뿐이지 결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율법의 큰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려 함'이었으며, 그들을 위한 의의 성취에 있어서 율법의 불충분성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서 약속의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도록 의도되어졌다(24-28절). 그들은 감금 상태에 있는 죄인처럼 율법의 공포와 규율 아래 감금되어 있었다. 이 결과로 인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더 용이하게 그를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길을 잃어버린 바 되어있는 것을 깨닫게 하며 또 그들이 의를 지키기에 연약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 적당하다. 이와 같은 율법은 그들의 몽학선생이 되어 미성숙의 상태에 있는 그들을 훈계하고 다스리게 되었고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후견인의 인도하에 학교로 가듯이)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몽학선생인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칭의와 구원의 참된 길로 인도되도록 훈련받았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덧붙여 말한다. 즉 우리는 이전과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은 그의 옛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낸다. 율법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2)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도를 잘못 생각한 점에서 그들의 큰 과오와 어리석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기대한 반면에 율법은 그들을 의롭다고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에게 그 자신의 죄와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수단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율법보다 우월한 복음의 유익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미성숙 단계에 있는 어린아이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성숙한 아들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 설명하고 있다.
①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참 그리스도인이 복음 아래서 누릴 놀라운 특권은 그들이 더 이상 종으로 간주되지 않고 아들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녀의 일원이 되도록 허용되었으며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도록 인정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27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 고백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예속 된 자가 된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았다. 세례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엄숙한 의식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절). 복음 아래에서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로 세례 받은 우리는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즉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주 기억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②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모든 참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누리고 있다. 율법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였고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입장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떤 민족이든 또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또 그들의 신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용납되며 그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③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 즉 우리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고 그 결과로 큰 축복과 특권을 가질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들로부터 진리와 복음의 자유를 탈취하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처사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현명치 못한 처사라고 말한다.
Ⅰ. 복음의 우월성 4:1-7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 구약 교회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1-3절). 그 상태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상태이다. 구약 교회에서도 진정으로 은혜가 베풀어졌으나 비교적 모호하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상속을 이을 자라도 성숙되지 않았을 때는 아버지가 지명한 때가 되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 교회도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구약 교회에서 은혜가 모호하게 베풀어졌던 것처럼 속박도 이루어졌다. 구약 교회는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도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큰 빛과 자유의 섭리 하에 거하게 된 것이다.
[2] 복음의 섭리 하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상태임을 알려준다(4-7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4절). 그 아들은 자신이 착수한 큰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자에게 나게 하심'으로써 성육신이 되었고 '율법아래 나게 하심'으로써 얽매인 바 되셨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되셨다. 즉 더 이상 종으로 취급받지 않고 성숙한 아들로써 취급받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된 것이다. 복음 아래에서는 믿는 자들 개개인이 양자됨을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그 양자의 영은 그들로 하여금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그의 논증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의 노예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었다.
1)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신 성자 하나님과 매우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고자 자신을 낮추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 사랑과 자비가 나타난다.
2)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아래에서 누리게 될 놀랍고 가치 있는 유익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우리가 아들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진노와 불순종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는 자식들이 되었다. 둘째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점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닮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들의 특성을 받은 자들은 아들의 유업을 잇게 된다.
Ⅱ. 그리스도의 구원 4:8-11
[1]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장 심한 노예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것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으며 또한 그들을 도울 수도 없었다. 참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거짓 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들이 복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모든 사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불합리한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곧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질문이다. "복음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배운 너희들이 어찌하여 의식적인 예배 방법을 따르는 일에 설득 당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유대인 자신들보다 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맹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 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거짓 교사들에게 복종하고 각종 절기 즉 '날과 달리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써 더움 심화되었다. 고상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라도 나중에는 그 순수한 신앙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하여 책망하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된 후에 율법의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예속되려는 어리석음이다.
[4] 바울은 그들에 대한 그의 염려를 표명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크게 수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들 가운데 뿌리 내린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이 일을 생각하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Ⅲ.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애정 4:12-16
1. 그들을 향한 애정 어린 호소(12)
바울은 그들의 마음이 그에게서 크게 떠나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형제라 부르고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유익 때문에 그들과 다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그들의 심정을 진정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책망이 개인적인 불쾌감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참다운 안녕에 기인한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의 이전 애정에 대한 칭찬(13,14)
그는 자신이 처음 그들 가운데 와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절). 여기서 '육체의 약함'은 그 다음 절의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확실한 뜻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의 불리한 사정으로 인하여 그들을 감명시키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바울의 그 불리한 사정 때문에 그를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그는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그에게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볼 때, 사람들의 존경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며 또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는 그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던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의 눈을 빼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3. 그들에 대한 훈계(15,1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질문한 것이다. "너희들이 전에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느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지 않으니 무슨 이유가 있느냐?"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그들이 말하였던 그 축복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만 한다. 바울은 다시 묻는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지금까지 너희의 사랑을 받았던 내가 어찌하여 너희의 원수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사역자들은 때때로 그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적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말하는 일에 주저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사역자들의 적이 된다면 그것은 단지 그 사역자들이 진리를 말하였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Ⅳ. 거짓교사의 특징 4:17-18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거짓교사의 특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며,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며 너희를 심히 사랑하는 것 같으나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너희에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17절). 그들이 의도하는 주된 목적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진리와 성실함이 거의 없을지라도 대단한 열심을 낼 수는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규정을 제시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든지 좋다'고 했다. 좋은 일을 어떤 사람들은 흠정역에 기록된 좋은 사람으로 번역하여 바울이 그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라는 구절이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을 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규칙이다. 왜냐하면 열심은 그 행위가 좋은 일일 때 훌륭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 대해 언제나 열심을 내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단 한번만 혹은 학질걸린 사람처럼 가끔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체온처럼 변함없이 열심을 내어야 한다. 만일 이 규칙이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잘 지켜진다면 그리스도 교회는 얼마나 복을 누리겠는가!
Ⅴ.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 4:19-20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그의 큰 애정을 이곳에서 표현했다. 바울은 자기가 옆에 있을 때는 좋게 대하다가도 없으면 험담을 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면서 그들에 대해 매우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거짓교사들과도 달랐다. 그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자로써 그들을 가리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그는 그들을 그의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현재 행위를 생각해 볼 때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들이 어린 자녀와 같은 행동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또한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였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다정다감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 애정은 어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인 애정과 같은 것이다. (2)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주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역자들을 버리거나 싫어하도록 설득을 당하는 사람들의 행위야말로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는 계속하여(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 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이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할 기회를 찾고자 함이었다. 그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상태가 그가 염려했던 것보다 건전함을 보고 기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책망하고 잔소리하는 대신 그들을 칭찬할 수 있기를 원했다.
Ⅵ. 이삭과 이스마엘의 생애 4:21-32
사도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자들과 율법을 신뢰하는 유대교 신봉자들과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말하라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다(21절).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역사 그 자체를 제시한다(22,23절). 즉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요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즉 자연의 일반 법칙에 의하여 났지만 이삭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에 '약속을 따라 났다.' 그는 이 역사의 의미를 그들에게 알려준다(24-27절). 사도 바울은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한다. 하가와 사라 이 둘은 두 언약을 의미한다. 전자의 하가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다. 왜냐하면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현재의 유대인들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즉 현재의 유대인들은 그 언약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손들도 그 언약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예시하는데 그녀는 도덕법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정을 받는 상태이다. 사도는 이와 같이 보다 큰 자유에 대하여 이사야 54:1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그렇지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27절). 사도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와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된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다. 바울은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그들도 지금 그와 같은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계집 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좇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 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런 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
Ⅰ. 갈라디아교인에 대한 권고 5:1-12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1절). 우리는 복음 아래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된 것이다.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 그들이 의를 위하여 할례에 복종하고 율법에 의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모든 유익을 상실하게 된다(2-4절).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이점을 선포하고 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그는 3절에서 되풀이하여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한 바울의 의도는 4절부터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다고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은혜가 떨어진 자들에게 아무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율법 전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복종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 위에 둔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또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구세주가 되려 하지 않으신다.
[2] 바울은 그들을 확고하게 설득하고자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 그들의 소망에 대해 알려 준다.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절).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의의 소망'이다. 우리들은 이 의의 소망으로써 죽은 후의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 의의 소망은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대상이며 그 어떤 것도 이 의의 소망보다 크지 않다. 그런데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들은 이 행복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곧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야 한다. (3) 그들은 무엇을 통해서 이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것은 곧 성령을 통해서 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와 지시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그들에게 말한다(6절).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이제는 어디에서도 할례자나 무할례자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더 유익하거나 더 악하지 않으며 또 어느 한쪽에 의해 하나님에게 천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즉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참된 믿음은 실제로 유효한 은혜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며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된다.
[4] 바울은 그들의 신앙적 퇴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믿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의 신실성을 상기시킨다(7절).
1)그들은 달음질을 잘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와 같다. 그들이 상급을 얻기 위하여는 잘 달려야 할 뿐 아니라 계속 끝까지 달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경주를 함에 있어서 단지 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잘 달려야 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잠시 동안은 그렇게 하였으나 도중에서 이탈하거나 힘이 빠져 비틀거리게 되었다.
2)바울은 그들에게 '누가 너희를 막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이 직접 대답하게 했다. 물론 바울은 그들을 방해한 자들이 누구며 무엇이 그들을 방해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자문자답하기를 원했다.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시작하여 잠시 동안 잘 달렸던 사람들이 이제 그들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잘 달리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길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초신자들은 사단이 그들의 진로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음에 순종해야만 하며 또 그들의 삶과 소망이 이 복음의 지시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진리는 믿어야 할뿐만 아니라 복종해야 하며 또 진리의 빛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과 능력도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올바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5] 바울은 유익하지 못한 설득으로부터 그들이 벗어나도록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다(8절).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나 사도 자신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칭의와 구원의 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 권면은 또한 사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할례를 반대해왔고 또한 할례를 주장하는 설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할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가르침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 할례에 대한 가르침이 그의 매개자에게서 기인된 것임이 틀림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 가르침을 거절하고 또 그들이 이전에 깨달았던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를 확고부동하게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6] 사도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나쁜 영향이 파급시키는 위험을 논증함으로써 거짓 교사들을 추종하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 교훈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있음을 그들에게 확산시키기 위하여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한다(9절). 전 기독교 사회가 한 사람에 의하여 오염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는데 유념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열심으로 전염시켰으며 갈라디아 교인들 중 몇 명이 유혹되었던 그 교리는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치명적인 영향을 생각한 그는 그것들을 가볍게 그리고 무관심하게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7]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들이 인정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대단히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최대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을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죄와 실책을 훈계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지도자와 지도받는 사이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졌던 반면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데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심지어 제하여지기까지'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모든 소망으로부터 제하여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의 훈계하는 사람에 의하여 제하여지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침식시키는 거짓교사들에 대해 증거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8]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이러하다. 그는 이 갈라디아인들이 유대교적 경향을 띈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이 거짓교사들은 바울 자신도 할례를 전하는 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거짓교사들이 그를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한 사실은 그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절) 이라는 그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했던 그들의 말에 전적으로 반박한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파하였더라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라고 말한다. 이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만일 그가 그들의 말에 동의하였다면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호의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들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그가 비난받게 된 그 교리를 전파해왔으며 그로써 비롯된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해왔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에게 굴복하였더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다.' 그는 진리를 부패케하고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생명 자체까지라도 포기하기를 원했다.
Ⅱ.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 5:13-26
바울 사도는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하고 실제적인 경건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1]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13-16절).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투어서는 안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그들을 주의 깊게 경계시키고 있다(13절). 그는 그들에게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신 것이지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굳게 서야 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뜨리는 것으로 고집해서는 안되며 서로를 향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려고 하는 성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1)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절). 사랑은 모든 율법을 총괄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분명해진다(요 13:35).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불행한 알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경우 적어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중대한 파국이 임하게 될 것이다. (2) 서로 다투는 것은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만일 형제 가운데 서로 분쟁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함께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분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그 자신들의 손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짐승과 같이 서로 물고 먹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은혜를 거절하시고 사랑의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며, 또한 악령이 지배하리라는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가장 위험한 대상인 죄악에 대항해야 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고한다(17-26절).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싸움을 멈추고 죄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축복이 될 것이다. 죄야말로 우리 모두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다.
1)모든 사람에게는 영육간의 투쟁이 있다(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느린다. 반면에 성령(우리 안에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반면에 성령(우리 안에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자연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투쟁이 있는 것과 같이(양심의 확신과 타락한 마음 사이의 투쟁) 거듭된 사람에게도 옛 본성과 거듭난 본성 사이에는 투쟁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와 같은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
2)우리는 더 옳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편에 서서 우리의 욕망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이 일방적인 법칙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바울이 이곳에서 우리에게 명한 이 의무는 복되신 성령의 인도와 영향하에서 행동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들의 타락한 본성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할 지라도, 또 그 타락한 본성이 우리 가운데 남아있을지라도 우리가 성령을 의지한다면 그 본성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죄의 독성을 없애는 가장 좋은 해독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로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다(18절). 만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 경향과 방향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비록 지금도 여전히 죄의 명령과 세력 가운데 있을지라도 율법으로 정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3] 바울은 육체의 일과 소중히 생각하여 결실을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에 대해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19절). 그는 먼저 육체의 일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 육체의 일은 다양하면서도 분명하다. 어떤 죄는 '음행 간음 더러운 것 호색' 등과 같은 제 7계명에 대한 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새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같이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죄도 있다. 이와 같은 죄는 때때로 명성과 평판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까지도 해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또 다른 죄로서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죄가 있다. 이와 같은 죄에 대해서 바울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를 상술하고 있다(22,23절). 육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죄를 육의 일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열매가 뿌리에서 기인된 것과 같이 은혜는 전적으로 성령에 기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명령한다. 첫째로 사랑과 희락을 명하는데 우리들은 이것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변함없는 기쁨을 이해하게 된다. 둘째로 화평을 명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화평 혹은 다른 삶에 대한 평화로움을 의미한다. 셋째로 오래 참음과 자비를 명하는데 이는 친절함과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의 너그러운 태도를 뜻한다. 넷째로 양선을 명하는데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려는 태도이다. 여섯째로 온유를 명하는데 이는 쉽게화를 내지 않는 것이며 설사 화가 났다 해도 곧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절제를 명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그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였다. 즉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동시에 그들이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것으로 적지 않은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완전히 파멸을 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 변함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죄의 종으로 굴복시키는 그런 자들을 결코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배워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우리들은 육의 일을 거부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일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거리이며 노력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육의 일을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울이 나타내고자 한 의도임은 다음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의 영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바울은 4:6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실을 보여야 하며 선한 행실로써 우리의 선한 행동 원리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육체의 일을 억제하고 새 생명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사도는 교만과 시기를 경고함으로써 5장을 결론 짓는다. 그는 여기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헛된 영광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서로를 시기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져야 할 사랑과 모순되는 불화와 싸움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을 경계시키고자 한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첫째,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헛된 영광이다. 그 영광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관심은 불행한 투쟁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다툼의 큰 요인이 된다.
Ⅰ. 성도의 교제 6:1-10
1. 범죄한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라는 권고(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의미는 돌발적인 유혹에 의하여 죄를 범하게 된다는 뜻이다. 계획적이고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과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유의해 보자. (1)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바로 잡다'라는 본래의 의미는 어긋한 뼈를 제자리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리는 용서를 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그들을 바로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온유한 심령'으로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형제의 실패를 보고 의기양양해 해서도 안되고 분노의 감정으로 대해서도 안된다. 매우 필요한 책망도 분노로써 할 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관용을 가지고 책망을 받는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진심으로 염려하면서 책망을 하게 될 때는 그들도 당연히 감명을 받게 된다. (3)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는 말씀이 온유함으로 책망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우연히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들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책망 받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
2. 서로의 짐을 지라는 교훈(2,3)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2절). 이것은 앞절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이것은 서로에 대해 자제하고 동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더 일반적인 교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이나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동정하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인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치하는 행동이며 또한 우리 때문에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된 그의 모범적인 행동과 일치하는 행위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는 대신 서로의 짐을 지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바울은 그가 칭찬했던 성도간의 겸손이 교만 때문에 상당히 큰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교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3절). 바울은 실상 그 자신이 보잘 것 없으면서 상당히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자신을 속일뿐이다. 그 자신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있는 척 가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자신을 가장 기만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들은 과오를 범할 염려가 있으며 또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과오를 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들이다. 왜냐하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기만보다 더 큰 속임수는 없다.
3. 자기 자신의 일을 살피라는 권고(4,5)
우리는 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계획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이런 행동들을 살피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런 행동들을 하나님 말씀의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음미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시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이다. 우리의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보다도 우리에게 더 편안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만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과 습관을 더 잘 알수록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욱 동정하여 도와주게 된다.
[1] 자신을 살피는 것은 바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음을 기뻐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아주 열심히 우리 자신의 일을 살필 경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평가했거나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얻은 좋은 평판을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분께 입증시킬 수가 있다. 비록 우리 자신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기뻐할 만한 것을(한글 개역 성경에는 '자랑할 것'으로 되어 있음-역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 대해 증거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한 근거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기뻐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게'하는 참된 방법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데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건 뭐라고 말하건 그리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2] 바울의 또 다른 논지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이다(5절).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해 낱낱히 진술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 날에 심판이 있게 될 거소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참으로 어떻게 행했는가에 따라 선고가 있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장차 진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실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 종종 스스로 진술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4. 아무 값없이 자유롭게 사역자를 섬기라는 권고(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가르치는 자들과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구별하게 되지만 성경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표명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에 따라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뿌리는 동안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서로 공정한 것이다.
5.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는 경계(7,8)
이런 잘못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앙 고백으로 기만당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절).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허세를 보이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자기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 쉽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만당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만흘히 여김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의 현 시대는 씨가 뿌려진 시대와 같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선 큰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때에 우리가 지금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즉 씨를 뿌리는 데 있어서 두 가지로 분류되듯 그 수확도 이에 따라 거두어질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8절). 다시 말해 현세에선 소박하고 순간적인 만족을 얻는 데 불과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파멸과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참된 위로를 받을 것이며 또 세상 끝 날에는 영생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분명 우리가 관계해야 할 하나님은 장차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한 것에 따라 보상을 해 주실 것이다.
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경계(9)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일에 너무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의무를 지키는 일에 피곤하여 싫증을 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열심히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상을 받게 된다. 비록 우리가 받아야 할 보상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는 분명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7. 모든 성도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권고함(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만 한다.
[1] 이 의무의 대상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너무 협소한 범위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제외시켜서는 안되겠지만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2]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법칙: (1)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또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되며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이러한 일을 하겠다는 핑계로 그것을 죽을 때까지 연기해서도 안 된다. 그 때엔 다른 사람들에게 행할 선한 일들이 우리의 뒷전에 남게 됨으로써 더 이상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사업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모든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기회를 주실 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그것을 선용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Ⅱ. 거짓 선생들의 정체 6:11-18
사도 바울은 여기서 본 서신을 마무리 지으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대필을 하지 않고 친히 큰 글자로 썼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재차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편지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애정 때문이었다.
[1] 거짓 선생들의 정체 :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12절). 그들은 종교의 형식에는 매우 열성적이었지만 참된 경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으며 스스로 율법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때때로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는 가장 문외한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억지로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였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그들은 안일한 생활을 하고 또 세상적인 재물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의 믿음과 양심이 파탄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을 품기보다 세상적인 목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 받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육체를 자랑하려 함'이었다.
[2] 반면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1) 그의 유일한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리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유대화된 선생들 자신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일과 구원에 필요한 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혼합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였으며, 십자가 외엔 그 어떤 사상이라도 혐오하고 거부하였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지니고 있는 소망의 근거를 나타낸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한다 함으로 그 어떤 시련이 그에게 올지라도 그는 그 시련을 받아들이며 그 시련 가운데서 기뻐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우리는 십자가를 기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그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그는 위에서 십자가의 웃음과 고통을 둘다 취하였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처럼 무관심하였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리게 된다.
3)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중점을 할례나 무할례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두었다(15절). 그들이 큰 관심을 기울인 것에 바울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할례와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참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 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들의 여러 종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하는 데 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곳에 참 종교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에 의해 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헌신하여 살아갈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주 예수를 믿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특별한 명성으로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게 우리를 천거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참된 신앙을 직접 경험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제대로 관심을 쏟았다면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전과같이 할례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이 바랬거나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한 축복은 '평강과 긍휼'이었다(여기서 소망과 기대란 말은 기도와 언약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그들 속에서 역사된 은혜로운 변화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 은혜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될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유대적인 선생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이 이 축복들을 받는 것으로 한정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 규칙은 그들이 직접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 진정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평강과 긍휼을 얻게 될 것으로 확신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장차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을 받았다(17절). 그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가 가진 흔적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잡았기 때문에 그의 대적들로부터 계속적으로 받았던 핍박들을 나타낸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쏟기에 어울리는 온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 그의 교회와 권위를 반대하거나 그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기꺼이 고난을 견뎌내는 가운데 그 진리들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매우 불의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고백에 어긋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4] 사도는 그의 사도적 축복으로 서신을 맺는다(18절).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애정어린 기도로써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것은 사도의 소원을 나타내는 고별사로 자주 쓰여지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견고히 서고 또 인생의 모든 시련을 겪으며 죽음을 대하게 될 때 용기와 위로를 얻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이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어버릴 정도로 행동하였지만 그는 그 교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그 은혜를 열심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있고 또 그들은 그 은혜를 통해 계속적으로 영적인 감화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우리는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바울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를 바라도록 용기를 주기 위하여 아멘이란 말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