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2
2. 유대인들을 더욱 자극함(21-24)
[1] 그들은 알면서도 죄를 지었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을 자신들은 범하였다.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21절). 가르치는 일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종의 사랑의 행위이다. 물론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설교로 세운 것을 생활로 무너뜨렸다. 말씀의 성과를 가장 방해하는 자들이란 자신들이 전하는 선한 교훈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강단에서는 언제나 설교를 잘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강단을 떠나서는 아주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도는 유대인들이 많이 짓는 세 가지 죄목들을 특별히 언급한다. 첫째는 도적질이고 둘째는 간음인데(22절), 유대 랍비들 중 많은 수가 이 죄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셋째는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죄이다. 이 죄가 우상을 가증히 여긴다고 고백한 자들에게 씌워졌다. 구약 교회의 말기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하였다"(말 3:8,9)는 책망을 들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따로 구별해 놓은 것을 자기들이 사용할 목적으로 횡령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죄는 우상숭배와 거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의 죄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였다(23,24절). 그들이 자랑하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이 그들에게 영광이 된 반면에 그들 자신은 하나님과 율법이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종교를 비난하게 만듦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치욕거리가 되었다. 기록된 바와 같이(24절).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그 해당 성경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들에게 이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들이 죄를 지음으로 일으키는 큰 악은 그들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앙에 끼치는 불명예이다. 너희로 인하여 모독을…받는 도다. 즉 "네 자신이 받는 비난이 너의 하나님께 돌려지고 너로 말미암아 신앙이 손상된다"는 말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라는 것은 가르치는 자들이 들어야할 좋은 경고이다.
3. 유대인들의 신앙 고백의 무용성(25-29)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즉 순종하는 유대인들은 순종의 보상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들에게 "만일 너희가 율법을 따라 살려고만 한다면 너희의 유대교가 너희에게 유익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희의 할례가 무할례가 된다. 그리고 너희는 더 큰 빛을 받고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더 큰 정죄를 받을 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보다 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1] 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만일 그들이 받은 빛에 따라 산다면 할례 받은 유대인들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고 가르친다.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26절),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27절). 이 말은, 본성의 빛의 지시에 진심으로 복종한다면 즉 율법의 내용을 실행한다면 유대인들이나 다름없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이방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보여준 것과 같은 순종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예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율법의 제도를 지킨 무할례자들이었다. 그들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의 불순종의 죄가 더욱 가증되었다(27절).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형식적인 신앙고백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문서로서 그것을 읽을 뿐 법으로서 지키지 않는다. 외적인 특권들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혜택을 덜 받고 별로 큰 소리 치지도 않는 사람들의 순종은 보다 큰 혜택을 받아 아주 으시대면서도 그에 따르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죄를 부채질 할 것이다.
[2] 그는 참된 할례를 기술한다. (28,29절). 그것은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며(28절) '의문에 있는' 할례도 아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외적인 제도를 전혀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적절한 때에는 유익하다) 그 자체를 의지하고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산다는 이름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유대인'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려면 아브라함의 일을 해야 한다. 참된 할례는 '이면에 있고 '마음'에 있으며 '신령'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신다. 바른 칭찬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기 좋은 가면이나 그럴듯한 고백에 속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겉치레 속에 숨어 있는 본래의 모습을 꿰뚫어 보신다. 이 사실은 기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표면적 육신의 세례는 세례가 아니다.
Ⅰ. 몇 가지의 반론과 모든 인류의 죄성 3:1-18
1. 여러 가지 반론에 대한 사도의 답변(1-9)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누가 트집을 잡을 때 그 진리는 명백히 밝혀져야 한다.
[1] 첫째 반론: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그처럼 동등한 위치에서 있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사실 이 평등의 교리가 유대인들의 모든 특권을 부인하고 할례의식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가?
답변: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많은 특권과 영광을 받은(2절) 백성이다. 범사에 많으니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도 문이 열려 있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이 문으로 가는 길이 더 넓고 평탄하다. 사도는 로마서 9:4,5에서 유대인들이 가진 여러 가지 특권들을 일일이 열거하지만 여기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 성경을 맡았다는 한 가지 특권만을 언급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탁(말씀, 하나님의 계시, oracle-역주)에 관해서 알아보려면 우리는 율법과 성경의 증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신탁들이 유대인들에게 맡겨졌었다. 구약은 와전되지 않고 처음 그대로의 순수한 상태로 조심스럽게 보존되도록 그들의 손에 맡겨졌었다. 유대인들은 먼저 그들 자신이 사용하여 유익을 얻고 그 다음에는 온 세상에 유익을 주기 위하여 그 거룩한 보물을 받았다. 그들은 구원의 수단을 받은 것이지 구원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바울은 '첫째'라는 말과 함께 이 특권을 언급하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그들의 첫째 가는 중요한 특권이었기 때문이었다.
[2] 둘째 반론: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여전히 그의 복음에 대적하는 원수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맡겨졌는가?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3절).
답변: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사도는 그와 같은 발상에 깜짝 놀라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4절). 유대인들이 강퍅하여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고 그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자기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애써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하는 세대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될 것이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미쁘심(faithfulness)을 의심하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신용을 의심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누구나 다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쟁이라는(사람들에게는 믿을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은 참되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사도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께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신다는 시편 말씀(51:4)을 인용한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실 것이다. 둘째,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의롭게 여기고 또 그의 공의와 진리와 선하심을 주장하며 옹호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여기에 묘사된 대로 '판단 받으실 때에 밝히 드러나신다.
[3] 셋째 반론:육신적인 생각은 이 사실을 기화로 삼아 더욱더 죄를 짓고자 자신을 격려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을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명예를 빛나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불신앙을 그처럼 혹독하게 형벌하신다는 것은 불의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5절). 이러한 주장으로부터는 어떤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해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하는 것이다.
답변:그럴 수 없느니라. 사도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공의와 거룩하심을 더럽히는 말들을 듣고 그에 대해 논의하기는커녕 깜짝 놀라며 당치도 않게 여긴다.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6절). 비록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지라도 결코 죄 자체의 악함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죄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뿐이다. 그 일을 위해 죄인이 이바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절대적인 주권자의 처사를 심리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코 항소가 있을 수 없는 최고 법정의 판결에는 어떤 이의도 제기되지 못한다.
[4] 넷째 반론:바로 앞의 반론이 여기서 되풀이되고 있다(7,8절). 그러나 바울은 그 반론의 본색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에 대하여 충분히 답변 할 수 있게 한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졌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그러면 이것을 격려삼아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하지 않겠는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8절)'는 것은 죄인들이 자주 입으로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악을 행하고 있는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마음에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 사역자들이 이와 같은 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라고 말하였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귀신의 왕 바알세불과 결탁했다는 말을 들으신 것을 생각해보면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사역자들이, 그들 스스로 가장 혐오하는 일들을 가르치며 주장한다고 비난을 받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도 아니며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을 비방하는 것은 사탄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술책이다. "할 수 있는 한 한껏 중상을 하라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을 궁지에 몰아 넣을 것"이라는 식이다.
답변:사도는 이제 더 이상 논박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일부러 악을 행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그 구실의 비호아래 피할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그 구실이 그들의 정죄를 정당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막연한 생각에 근거하여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죄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속에 죄를 짓고자 하는 충분한 의지와 음모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죄 받는 것이 옳다. 그들이 지금은 제멋대로 이와 같은 구실들을 둘러 붙일 수 있을지 몰라도 마지막 날에는 그 구실들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고 그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처사에 있어서 의롭다함을 얻으실 것이다.
2. 인류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보편적인 죄에 대한 사도의 주장(9-18)
"우리는 나으뇨? 이말은 곧 유대인인 우리가 저희보다 나으냐는 것이다. 혹은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의로우냐는 것이다. 결코 아니라."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믿지 않는 무리들보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가? 슬프게도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 모두 '죄 아래 있다.' 즉 죄책 아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자들이다(19절). 사도는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였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9절). 이 말은 법적 용어이다. 그는 여기서 구약 성경으로부터 몇 구절을 끌어내어 이 고소와 유죄선고를 더욱 에증한다. 10,11,12절은 시편 14:1-3에서 인용되었고, 나머지 구절들은 70인역 성경에 기록된 시편 14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편 14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옛 세상을 보신 것처럼(창 6:5) 굽어 살피셨다. 친히 만물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을 때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망치고 난 지금 다시 보시니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악하였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 보자.
[1] 습성적이 두 가지 면
1)사람들에게는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습성적으로 빠져있다. 의인은 없나니. 즉 정직하고 선한 미덕의 원리를 가진 사람은 "없되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만일 의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셨으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했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의인 노아를 지켜보셨다. 우리에게 타고난 의란 없다. 깨닫는 자도 없고(11절). 잘못은 지각이 타락한 데서 생긴다. 그런데 신앙과 의에는 충분한 지식이 있어서 만일 사람들이 그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그들은 좀더 나은 상태에 있고 좀더 나은 행동을 할 것이다. 죄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즉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 일단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은 이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즉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올바른 사람은 세상에 전혀 없다는 것이다.
2)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악한 것으로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다 치우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길 안에서 행하도록 지으시고 또 그를 올바른 길에 두셨지만 사람이 그 길을 버렸다.
[2] 실제적인 면
1) 사람들의 말에 있어서(13,14절): 사도는 특별히 다음 세 가지 점들을 지적한다. ①잔인하다. '저희 목구멍은' 해를 끼칠 기회만을 기다리는 '열린 무덤'이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그 무덤을 열어 놓지는 않지만 몰래 악을 꾀하고 있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즉 치료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 있다. 그들은 그 악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망쳐 놓는다. ②속임을 베푼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들은 이범에서 자기들이 마귀의 자식임을 드러낸다. "그들이 속임을 베풀어 왔다"는 말은 그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③저주가 가득하다. 즉 하나님을 비난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고 형제에게 악을 비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죄들을 지음으로 그들이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2)그들의 행동에 있어서(15-17절):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그래서 어디로 가든지 그들에게는 '파멸과 고생'이 따른다. 파멸과 고생이 그들의 동무이며 마침내는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르고 만다.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고 그들의 죄 자체가 그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자기 죄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은 진정한 평화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지 못한다.
3)이 모든 악의 뿌리(18절):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실제적인 모든 신앙 생활에 관계된다. 악한 자들은 이것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법칙들을 따르며 다른 목표물을 겨냥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선도 기대할 수 없다. 일단 두려움이 버려지고 나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고 이어서 모든 것이 곧 파멸에 이르고 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기서 짤막하나마 인류의 보편적인 타락과 부패상을 살펴보았다.
Ⅱ.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3:19-31
바울은 이상의 모든 사실로부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며 그것을 그의 강론의 요약으로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8절). 위에서 살펴본, 그와 같은 타락의 세력에 지배되어 있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든지 하나님의 인정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것을 얻어야 한다. 사도는 여기서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의 죄를 논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논한다.
[1] 그는 율법의 행위로 칭의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사람의 죄부터 논의하기 시작한다(19,20). 그 요지는 아주 분명하다. 즉 우리가 깨뜨려 버린 율법으로서는 결코 칭의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의 죄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1)그는 특별히 그 죄를 유대인들에게 돌린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19절). 이 유죄 판결은 다른 모든 민족에게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에게도 내려진다. 그 이유는 그 판결이 유대인들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이 너를 정죄하여 유죄를 선고하는 것을 네가 안다." 이는 모든 입을 막으려 함이다. 의롭다함을 받는 자들은 마침내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또한 입을 다문다.
2) 그는 그 죄를 온 세상에 널리 일반적으로 적용한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심판아래 죄가 있게 하려 한다"는 말은 곧 유죄가 입증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죄상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은 두려운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입고 나올 의를 필요로 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23절). 이 말은 곧 인간이 최고 목표가 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마치 사수가 표적을 맞추는 데 이르지 못하고 달리는 선수가 상을 얻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이르지 못하게 됨으로 상을 얻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철저한 실패자가 된다. 이 사실을 좀더 생각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이런 자리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이름을 더럽힌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앞에서는 무죄를 자랑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려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범죄하였다는 이 사실이 우리를 잠잠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수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셋째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되는 데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영광의 시작인 칭의에 이르지 못하고 사람에게 입혀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인 성화에 이르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흠 없는 결백으로 천국에 이를 수는 없다. 그 길은 막혔다.
3)더 나아가 그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러한 유죄 판결을 율법의 탓으로 돌린다(20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고 유죄 판결을 내릴지언정 결코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율법의 바른 용법과 의도는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치료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병을 조사하는 것이 곧 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9절에서 율법의 이 같은 용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이 말의 의미를 좀더 살펴보면 첫째로 '아무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의 본성 속에 남아 있는 부패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는 어떤 칭의도 영원히 방해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심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한 즉 그의 앞에서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2] 그는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만 기대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21-28). 그렇다면 전혀 소망이 없는가? 죄 때문에 그 상처가 치료될 수 없는가? 아니다.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또 다른 길이 나타났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복음 안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라고 일컬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로써 그가 정하시고 마련하시며 받으시는 의이다.
1)이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그 의가 나타났다. 복음에 나타난 칭의의 길은 대로인데 그 길이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것은 '율법 외'의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의이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므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모든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바라보게 한다.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모시는 믿음에 의해 얻어진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그 의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믿음에 의해서이다. 그 의는 모든 자 곧 '믿는 모든자'에게 미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에 똑같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이 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스스로를 배척하지 않는 자들을 결코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데, 그들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이나 의복처럼 입혀지기도 한다.
2)그러나 이 의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 하는가?
①이 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드러낸다(24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바울은 그 사실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라는 말은 쓴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저거 주어진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막대한 희생을 치루시고 그것을 사셨다.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값없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이 대리 지불이 마련되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②이 의는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우심의 영광을 드러낸다(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25절).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목제물이시다. 그 분이야말로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의 속죄가 이루어지는 은혜의 보좌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해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분으로서 화해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화목제물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셨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 진노하셔야 할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를 제의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그의 사랑의 지혜 가운데서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시도록 '예정하시고' 범죄한 세상에 그를 화복 제물로 내놓으셨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한글 개역 난외주를 참조하라-역주) 우리는 이 화목 제물에 관여하게 된다. 거기에는 치료 연고가 마련되어 있는데 믿음이란 이 연고를 상처난 영혼에 갖다 바르는 행위이다. 이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을 바라본다. 피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이 피 외에는 다른 어떤 피도 실제적으로 용서를 가져오지 못한다.
㉣믿음으로 이 화목제물과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은 모두 '전에 지은' 그들의 죄에 대해 '간과하심'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로 세움을 받으신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함이시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의리의 죄가 간과된 것은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 때문이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가 포도원에 그대로 있는 것은 주인의 선함과 농부의 중재 때문이다. 죄인이 언제나 지옥 이쪽 편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바울은 이 사실을 매우 강조하여 말한다.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26절). 하나님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데 먼저 화목 제물 자체에서 나타내신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죄의 값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록 전가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서 죄를 찾으시고 처벌하셨는데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지셨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 화목 제물에 근거하여 용서를 베푸시는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신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치르신 보상을 받으시고, 회개하고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를 베푼 행위일 뿐만 아니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그는 의로우시다. 즉 자신이 하신 말씀에 신실한 분이시다.
③이 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27절). 만일 칭의가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진다면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면류관을 우리의 머리에 쓸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법'은 영원히 자랑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믿음은 의지하고 자기를 비우며 자기를 부인하는 용기로써 모든 면류관을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려놓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의 법'을 말하고 있다. 믿는 자들이라고 해서 법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믿음도 하나의 법이며 활동하는 은혜이다.
사도는 이상의 모든 사실로부터 이러한 결론을 끌어낸다(28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 칭의의 특혜가 미치는 범위를 보여준다(29-31).
그것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들 고유의 특혜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가질 수 있는 특혜이다. 이는 그가 차별이 없다(22절) 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사실을 주장하고 입증한다(29,30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29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고 또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은혜의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편들어 어떤 차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나 실제로는 '말미암아'(by)나 '통해서'(through)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아무 차별이 없다. 그는 마치 이 교리가 율법을 폐한 것처럼 생각하는 반론을 미리 제거한다(31절).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비록 우리가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율법이 헛되이 주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율법이 바른 용도를 세우되 율법을 바른 기초 위에 고정시킴으로써 그 존속을 굳게 한다. 비록 우리가 언약처럼 율법에 의해 구원받지는 못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법에 부차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그리고 중보자의 손안에 있는 규범으로 인정하고 복종한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것을 굳게 세울 수 있어야 한다.
Ⅰ.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아브라함 4:1-8
사도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믿음으로 얻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이 문제를 유대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에 호소하면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자기 자신도 그와 관련시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온 세상 사람이 찾고 있으나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외에는 아무도 진정으로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브라함은 이처럼 더없이 귀중하고 값비싼 진주를 얻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육신으로' 즉 할례와 그의 외적 특권들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신 것이 그의 행위의 공로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1]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만한 소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랑할 것이 있다(2절). "그의 이름이 위대해졌으니 그가 자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그가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만하나 하나님에게서는 결코 받을 수 없다. 바울 자신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때때로 그가 의도적으로 그것을 자랑하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랑할 수 있는 체해서는 안된다. 아브라함도 결코 자랑할 수 없다.
[2]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분명히 말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3절). 신앙에 관한 모든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위대하거나 훌륭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는지라'고 한다(창 15:6).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와 같이 의로 여기신 바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된 것이다.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불신앙으로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고 난 직후에, 약속된 후손에 관하여 아주 주목할 만한 믿음의 행위를 보였을 때 말해졌다. 칭의를 얻는데는 완전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우세한 믿음 즉 불신앙을 이길 만한 믿음이 요구된다.
[3] 만일 그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면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빚으로'여겨졌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주장하는 요지이다(4,5절). 아브라함의 상급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시기 바로 직전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창15:1).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런데 만일 아브라함이 순종의 완전함 때문에 이러한 약속을 받을만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호로 전적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값없이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제자에게 즉 어떤 공로도 자랑할 수 없고 다만 살아있고 활동적이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에게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5절). '경건치 아니한 자' 곧 이전에 불경건했던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그의 이전의 불경건함이 그의 믿음을 근거로 한 칭의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절망할 일이 전혀 없다. 비록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의 죄를 없이해 주시지는 않지만 불 경건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하신다.
[4] 사도는 다윗의 시편으로부터 이 사실을 더욱 예증하고 있다(6-8절). 이 시편에서 다윗은 죄의 사함을 사람의 복을 구성하는 요소로 언급하면서,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용서에 관하여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1)용서의 성격:빚을 면제해 주고 죄를 덮어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를 그의 뒤로 던지시고 그 얼굴을 죄에서 돌이키시는" 분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의 복의 근거가 우리의 무죄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으심에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용서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인정치 아니하심'에 있다(8절). 하나님의 받아들이심과 보상은 결코 빚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되받는 것이 은혜라고 결론을 내린다(6절).
2)용서의 복됨:…한 자는 복이 있도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한 말씀은 그 복이 어떤 복이며 또한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용서받은 사람들만이 오직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왜냐하면 바로 이 사실이 다른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Ⅱ.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때와 이유 4:9-17
사도는 이 단락에서 아브라함이 언제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와 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를 살펴본다.
[1]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이었다(10절). 아브라함이 무할례의 상태 가운데 있을 때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 즉 의가 전가된 것이다. 사도는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이 사실을 주목한다. 아브라함은 무할례 시에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1)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 치기 위한 것'이다(11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증하시기 위해 인치는 의식을 제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특별한 은총으로서 '할례의 표'를 받았다. 여기서 성례와 할례의 성격을 살펴보자. ①성례의 일반적인 성격: 성례는 표이며 봉인이다. 성례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은총의 표이며 조건적인 약속의 봉인이다. 하나님은 성례를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시고 또한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그에게 날인한다. ②할례의 특별한 성격: 할례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성례였다. 할례는 하나의 '표'로서 우리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원초적인 타락이 영적 할례에 의해서 끊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이다. 할례는 내적이고 영적인 은혜를 겉으로 느낄 수 있게 나타낸 표시' 였다. 할례는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 특별히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언약을 인치는 것이었다. 만일 그때 어린아이들이 은혜의 언약으로 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면-이것은 그들이 그 언약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인데-어떻게 이제 와서 그들이 그 언약에서 내쫓길 수 있겠는가!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2)이는 저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전에 살았던 어느 누구보다도 그에게서 더욱 분명하고 충만한 은혜 언약의 섭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고 불린다.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부모가 자기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처럼 믿음의 모범으로 서있다는 것을 말하며, 선조들의 특권이 그들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의 선례로 서있다는 것을 말한다. ①그는 비록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의 조상이 된다. 아브라함 자신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코 방해 거리가 될 수 없다. 이같이 바울은 불쌍한 이방인들의 의심과 염려를 미리 고려하였다. ②그는 믿는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자들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믿음의 자취를 좇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가문에 속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범을 좇기 때문에 그들이 조상이 된다. 여기서 누가 진정으로 교회의 조상들의 후손인가를 보라. 그들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 곧 참된 후예들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계승의 행렬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아버지라고 떳떳하게 부를 수 있는 자들은 형식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진 자들이 아니라 그의 자취를 좇는 자들이다.
[2]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13-16절).
1)그가 받은 언약은 무엇이었는가?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세상은 그들의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약간의 땅도 거의 소유하지 못했을 지라도 실상은 세상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을 자였다. 그보다는 어쩌면 이 언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여기서는 '그 후손'이라고 언급되었는데 그가 곧 그리스도이시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후사로 계신다. 아브라함이 세상의 후사로 있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안에서이다.
2)어떻게 그가 그 언약을 받았는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 자기 본토를 떠날 때에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제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만큼 율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14,15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왜냐하면 율법에 철저하게 복종하여 한 점 흠 없이 순결하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완전히 막혔고 또 율법 자체 속에서도 막혔기 때문에, 만일 율법전체를 완전하게 준행해야 한다면 그 언약은 결코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15절에서 입증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즉 우리 속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룬다. 흐르는 시내를 막으면 물이 불어나듯이 우리에 대한 진노를 쌓는다. 이제 우리가 진노를 이루는 율법으로써는 결코 상속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는 15절 후반부에서 율법이 어떻게 진노를 이루는가를 설명하나.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잘 알려진 사실이다).
3)왜 그 언약이 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는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16절). ①이것은 '은혜'에 속하고 '율법'에 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빚이나 공로에 속하지 않고 은혜에 속하기 위해서"이다. 은혜가, 받아들이는 믿음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믿음은 특별히 주시는 은혜와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명예를 은혜, 곧 값없는 은혜에 돌리실 것이다. ②그 약속을…굳게 하려 하심이라. 첫 번째 언약은 확실하지 않다. 사람이 그 언약에 계획된 은혜들이 길어져 버렸다. 이제 새 언약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확실하게 전달하는 또 다른 길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길이며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것을 받으며 그가 안전하게 지키시는 길이다. ③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하심이라. 만일 그 약속이 율법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었을 것이다. 믿음으로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육적인 후손뿐 아니라 영적인 후손도 그 언약에 관계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언약을 고안하셨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7:5을 주목케 하는데 거기에 그의 이름이 '큰 아비'라는 뜻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비'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이유가 나온다.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곧 모든 신자들이 아브라함을 그들의 모본으로 삼으며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다.
Ⅲ. 아브라함의 믿음 4:17-22
[1] 그는 어떤 하나님을 믿었는가(17).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믿음을 붙드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보았는가를 살펴보자. (1)'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아브라함은 그와 그의 아내가 거의 죽은 상태 가운데 있을 때 '열국의 아비'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수 있는 분으로 여겼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수 있다. 늙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실 수 있으며 '허물과 죄로 죽은' 이방인들을 거룩한 영적 생명에로 살리실 수 있다(엡 2:1,2). (2)'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죄인들의 칭의와 구원,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아내로 삼으심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은혜로운 부르심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절대 권능과, 지배를 나타내며 또한 다른 모든 지주가 흔들리고 무너져 내릴 때에도 믿음을 받쳐 주는 막강한 지주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전능을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믿음이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자 앞에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는가(18-22).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18). 그에게는 바랄 수는 없으나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소망이 있었다. 그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소망을 일으키고 지지해 주는 감각과 이성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아무리 따져도 그로서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소망에 불리한 그와 같은 모든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의 믿음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함으로 생겨난 것을 바라고 믿었다. 이는 그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18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은혜를 통해 그로 하여금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을 수 있게 하셨다. 믿는 자의 조상이 될 그가 신앙에 있어서 보통 이상으로 특출해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믿은 바이었고, 그것이 저에게 의로 여겨졌다. 그는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절). 그의 몸은 이제 기력을 잃어서 전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특별한 어떤 복을 계획하실 때에는 흔히 그 복 자체에 사형 선고를 내리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각을 거기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오직 그 약속의 신실함만을 생각하였고 이것이 그의 믿음을 유지케 하였다. 그 약속을 거스리는 모든 난관들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이 육신적인 이성의 지혜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믿음이 연약하다는 증거이다. 그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20절).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약속에 관해서 속으로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고 그 약속에 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하기 위해 머뭇거리지도 않았으며 오직 영혼의 결단으로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그 약속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그 약속에 대해 논의할 여지가 있는 문제로 생각지 않았다. 그는 믿음이 없음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서 흔들리는 것은 전적으로 불신앙 때문이다. 우리가 흔들릴 때 약해지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그는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신앙의 힘은 그의 의심을 극복한 승리에서 드러났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특별히 하나님의 신실함에 영광을 돌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어떤 것도 위대한 신앙만큼 칭찬하시는 것을 결코 듣지 못한다(마 8:10; 15:28). 하나님께서는, 큰 믿음이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큰 믿음을 영예롭게 하신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다(21절).
즉 그는 '철저한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인내했다. 이 말은 모든 돛을 다 달고 입항하는 배를 두고 사용하는 은유이다. 아브라함은 의심과 두려움의 폭풍우를 보았고 그 약속을 반대하여 일어나는 시험들을 당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항해사로 약속을 나침반으로 삼고 대담한 모험가처럼 바람과 구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항해사의 지혜와 신실함만을 의지한 채 돛이란 돛을 다 달고서 용감하게 항구로 향하였다. 그는 의기양양한 승리자처럼 집으로 향하였다. 그의 전적인 확신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해 있었다. 우리의 동요는 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불신으로부터 일어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능히 이루실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2절). 그가 하나님의 약속에 그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자비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에게 응답하셨으며 그의 기대를 넘어 그를 의롭다고 하셨다. 이 사실은 왜 믿음이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선정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Ⅳ. 이 칭의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한다. 4:23-25
그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칭의는 우리의 본보기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결론짓는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23절). 그 사실이 기록된 것은 단지 언아브라함을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칭찬하거나 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어떤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 성도들에 대한 기사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지도하기 위한 선례와 거울(고전 10:11)이 되고 또 우리에게 교훈을 (롬 15:4)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 특별히 아브라함에 관하여 이 사실이 기록된 것은 '우리도 위한'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 기록은 족장들을 위할 뿐 아니라 세상 끝에 오는 우리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이다.
1. 우리의 공통적인 특혜(23,24)
그 특혜가 즉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것이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23절).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 자비가 계속될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교회를 두시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그 칭의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미래 동사를 쓰고 있다.
2. 우리의 공통적인 의무(25)
이러한 특혜의 조건이자 의무는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시는 장차 올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고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계시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가 믿음의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능력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이 사실을 25절에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25절). 그는 죄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사실상 범죄자로서 죽으셨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보상하시기 위해 죽으셨다. 예수는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의 빚을 다 갚으셨고 부활로 우리의 채무가 소멸되었다는 증서를 받으셨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특별히 강조한다.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도 그리스도이시다(34절). 이제 모든 문제를 살펴 볼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의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본 장과 전 장에서 우리의 모든 위로의 원천이며 위대한 근원으로서 확증해온 진리이다.
5장
Ⅰ. 칭의의 열매 5:1-5
칭의로부터 나오는 귀한 은혜와 특혜들은 우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얻는데 열심을 내도록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1]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죄이다. 칭의는 죄책을 없앤다. 그 장애물이 치워지면 곧 평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팔을 붙잡고 그의 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이 평화에는 단지 불화가 그친 상태 이상의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친목과 자비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장 철저한 원수가 되시든가 가장 절친한 친구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15:13-15). 사람이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것만큼 자기를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즉 이것은 화평케 하는 자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화평을 조성하는 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화평의 내용이시며 유지자이신 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2절). 이것은 더욱더 귀한 특혜로서 평화뿐만 아니라 은혜를 또한 늘이는 것이다. 성도의 행복한 상태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에게 미치고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는, 은혜의 상태이다. 이 은혜 속에 우리가 들어감을 얻었다. 우리가 이 상태 속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리고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가 스스로 거기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우리는 소경이나 절뚝발이, 혹은 병약한 자드리 다른 사람의 인도를 받아가듯이 그리로 인도되었다. 우리가…들어감을 얻었으며, 우리는 이 들어감의 장본인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수단인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는다. 성도들은 이 상태 가운데 행복하게 서 있다. 우리가…서있는. 우리는 거기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있다. 이 표현은 또한 우리의 진행을 나타낸다. 서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간다. 우리는 도달한 것처럼 결코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둘러 가는 사람처럼, 그리고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시중드는 종처럼 서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그 표현은 우리 인내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확고하고 안전하게 서 있다. 우리는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군인처럼 서 있다. 하늘의 군인처럼 서 있다. 하늘의 궁전은 높은 것일수록 미끄러지기 쉬운 지상의 궁전과는 달리 확고부동하며 안전하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현재 누리고 있는 행복 외에 바라고 즐거워하는 행복이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다.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자들은 장래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랄 수 있다. 은혜는 영광이 시작되었다는 표이다. 즉 영광의 확실한 전조이며 보증이나 장차 누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자들은 현재 즐거워 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4]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절). 우리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환난 중에서조차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행복이란 참으로 점점 증가하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특별히 의를 위한 환난).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므로 바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와 이유를 보여 주려고 노력한다. 환난은 여러 가지 원인을 거쳐 크게 소망을 이루는데, 사도는 그 원인의 사슬을 각각의 원인이 영향을 미치는 순서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환난은 인내를. 환난이 인내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가 환난 가운데서 그리고 환난과 더불어 역사하기 때문이다. 쇠가 불에 의해 단단해지듯 이 환난은 인내를 시험하며, 시험을 통해 인내를 향상시킨다. 우리는 인내를 가져오는 환난을 기쁘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인내는 환난이 우리에게 끼치는 해보다 더 많은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환난 자체는 초조함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환난이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적용될 때는 인내를 가져온다. 인내는 연단을(4절). 인내는 하나님의 연단을 이룬다. 즉 인내로 고난을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크게 경험한다. 인내는 우리 자신의 연단을 가져온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서 자신의 진실성을 시험하게 된다. 시험에 합격하였다는 것이 드러날 때 인내는 인정을 받게 해준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처럼 연단을 받아 황금같이 되어 나오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소망을 갖도록 용기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연단은 우리의 소망을 받쳐주는 버팀목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단은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도록 돕는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5절). 이 소망은 우리를 속이지 아니할 것이다. 실망만큼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우리는 소망 때문에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 않는다. 그 소망은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선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이…부은바 됨이니. 이 소망은 의이신 성령으로 확증되었기 때문에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식은 다시 우리 안에서 그를 향한 사랑을 끌어낸다. 우리의 모든 위로와 성결 그리고 양자에 있어서의 이내의 근거는 하나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에 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 할 때 우리는 그에게 거는 우리의 소망이나 그를 위해서 받는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