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적 성서·

라기스와 드빌의 유적발굴/ 수10:32,38,39

제이비젼 2014. 7. 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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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도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격 당시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하여 진멸당한 곳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두 도시와의 전쟁 때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군사들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신비적인 사건들처럼 이 사건도 신화적으로 치부되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사건들이 실재했음이 속속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라기스와 드빌과의 전쟁중에서 태양과 달이 멈추었다는 기록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미항공우주국에서 지구의 연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단 하루가 태양의 주기와 어긋 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관자이리사른 단순하면서 심오한 진리를 신뢰한다면 이러한 성경의 사실들 때문에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초월적이며 주권적인 개입은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들의 간증거리로 등장한다. 그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들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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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기스와 드빌은 남부 가나안 지역의 중요한 도시이며 요새였다. 두 도시 국가의 왕은 다른 세 왕과 연합하여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태양을 멈추시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두 멸망되고 말았다. 이 기적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나, 여기에서는 두 성읍의 고고학적 발굴을 중심으로 두 도시의 역사성을 살피고자 한다. 또한 두 성읍의 현재 위치와 유적지 발굴 단계 그리고 유적을 통한 시대 측정 등을 알아 보고자 한다.


 1. 라기스와 드빌의 현재 위치


 1) 라기스(cykl, Lachish)의 위치

 라기스는 예루살렘과 블레셋의 가자(Gaza)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 현재 라기스로 추정되는 곳은 고대의 엘류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였던 베이트 지브린(Beit Jibrin)에서 남서쪽으로 약 8㎞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텔 에드 두웨이르(Tell ed-Duweir)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이다. 텔 에드 두웨이르가 고대의 라기스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거의 인정하고 있었다.


 2) 드빌(rybd, Debir)의 위치

 남부 가나안 전투에서 여호수아에게 점령되 드빌은 유대 남부의 산지 네게브 지역에 있는 여러 왕도(王都)들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본래 장대한 아낙 사람들이 거주했으나 처음에는 여호수아에게 정복되었고 그후에는 갈렙의 후손에게 완전히 점령되었다(수11:21; 수15:15-17; 삿1:11-15). 드빌은 '기럇 세벨'으로도 불리던 곳이었다. 현재 드빌의 유적지로 거론되고 있는 가장 유력한 곳은 두 군데 이다. 한 곳은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17.6㎞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텔 베이트 미르심(Tell-Beit-Mirsim)이다. 그리고 다른 곳은 헤브론에서 서남쪽으로 약 12㎞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키르벳 라부드(Khirbet Rabud)가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2. 라기스와 드빌의 위치에 대한 근거


 1) 라기스에 대한 근거

 텔 에드 두웨이르가 고대 라기스의 유적지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근거가 있다. 첫째, 유대 사학자인 유세비우스가 고대의 라기스라고 지적한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청동기와 철기 시대의 유적지가 두웨이르이기 때문이다. 둘째, 두웨이르에서 발굴된 철기 시대의 유적지가 니느웨에서 발굴된 라기스에 대한 그림묘사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고고학으로 확인된 두웨이르의 역사가 문학자료에서 얻어낸 라기스의 역사와 똑같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2) 드빌에 대한 근거

 첫째,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Mirsim)이 드빌의 유적지라는 주장은 전통적이다. 텔 베이트 미르심이 드빌의 유적지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주로 유적지의 유물을 조사한 결과에 의존한다. 먼저 텔 베이트 미르심은 지형학상으로 드빌의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곳이다. 그리고 후기 청동기 시대(B.C. 17세기 - B.C. 15세기)의 유적에서 발굴된 주전 1500-1200년 시대의 힉소스 유물과 약 90-100m 두께로 덮인 재의 지층을 근거로 알 수 있다. 이는 유물의 연대가 출애굽 후 광야 생활 40년후에 가나안을 정복한 연대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키르벳 라부드(Khirbet Rabud)가 드빌의 유적지라는 주장은, 텔 베이트 미르심이 고대의 드빌이라는 주장에 불만족스러운 것을 보완하던중에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이곳 역시 중요한 근거는 유적지의 북방 2㎞ 지점에서 발견된 두 개의 우물이 성경의 기사(수15:15-19; 삿1:11-15)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3. 라기스와 드빌의 발굴 단계와 중요 유물

 

 1) 라기스의 발굴 단계와 중요 유물

 고대의 라기스라고 여겨지는 텔 에드 두웨이르에 대한 발굴은 제임스 스타키(J. starky)가 지휘하는 웰컴 마르스톤(Wellcome Marston)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1932-1938년에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1938년에 스타키가 죽자 찰스 잉게(Charles Inge)가 뒤를 이어 계속 발굴하였다. 그 후 잠시 중단되었다가 아하로니(Y. Aharoni)에 의해서 1966-1968년에 다시 발굴되었다. 이러한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것 중 여호수아 시대에 근접하는 시기(B.C. 1600-1200)에 속한 유물들도 상당수 있었다. 문자가 새겨진 청동단검, 외호(外濠)위에 세워진 신전의 유적, 스카랍(Scarabs, 갑충석, 투구 풍뎅이 모양의 부적인데 당시 애굽과 가나안에서는 보석으로 취급됨) 그리고 시내(Sinai)식 알파벳이 새겨진 도기조각 5개, 아멘호텝 2세(Amenhotep II)의 이름과 프타(Ptah) 신의 이름이 양면에 새겨진 위조도장, 애굽 문자가 새겨진 조각들 그리고 글이 새겨진 그릇들(명각-名刻)이 다수 출토 되었다. 그리고 주전 1400-1200년경으로 추정되는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에서 라기스에 주둔한 애굽의 군대가 하비루(Habiru)에게 공격당한다는 내용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2) 드빌의 발굴 단계와 중요 유물

 첫째, 텔 베이트 미르심에 대한 발굴은 카일(Kyle)과 올브라이트(W. F. Albright) 교수에 의해 1924년에 발굴되었다. 그리고 1926-1932년에 올브라이트 교수가 이끄는 예루살렘에 있는 미국 연구소의 탐색대와 구세니야 신학교 팀이 4회에 걸쳐 다시 발굴하였다. 출토품 중에서 주전 1600-1200년에 속한 유물들은 주로 점토로 쌓은 성벽터, 집터, 금속제품과 상아 공예품 그리고 기타 석조물, 아멘호텝 3세의 이름이 새겨진 스카랍 등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는 그 시기가 주전 14세기에서 13세기에 속하는 두께가 약 1m에 달하는 불에 타버린 재의 지층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드빌을 파괴할 때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키르벳 라부드에 대한 발굴과 결과는 갈링(K. Galling)에 의해 1968년에 보고되었다. 그에 의해 발견된 여호수아 시대와 연관된 유적들로는 후기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취락지구, 지형적인 조건의 충분성, 유적지 북방 2㎞에 있는 두개의 우물 그리고 15에이커의 성터등이 있다. 드빌의 유적지에 대한 견해는 일반적으로는 올브라이트(W. F. Albrght 1891-1971) 교수가 주장한 텔 베이트 미르심이 인정받아 왔으나, 최근에는 갈링이 주장한 키르벳 라부드가 더 나은 장소로 인정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악사가 요구한 윗샘과 아랫샘(수15:15-19; 삿1:11-15)에 대한 성경의 기사와 유적지 부근의 두 개의 우물이 더 나은 배경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연구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라기스와 드빌의 역사성은 분명하다. 물론 라기스와 드빌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추측일 뿐이고, 라기스와 드빌이 여호수아에게 멸망당한 정확한 시기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역사적 사실임은 고고학적으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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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양이 머무른 이적에 대하여 

 1) 태양이 머물렀다는 것을 하나의 시적인 표현으로 해석한다. 즉 그들이 하루종일 싸울 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나절 만에 마친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은 14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2) 여기서 '머물렀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wd'(돔)인데 그것은 '멈춘다'라는 의미로 태양이 빛을 비추는 것을 멈추었다는 소리로 해석한다. 즉 햇볕이 너무 뜨거워 싸우기에 어려웠는데 구름이 그 빛을 가려줌으로 그들이 잘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이적을 전무후무하다고 말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3) 어떤 학자들은 태양이 머물렀다는 것을 일광이 저녁때 이후에도 굴절되어 계속적으로 전쟁 마당을 비추어 준 것이라고 해석한다.

 4) 태양이 머문다는 사실은 초치성적인 것이요, 이적에 속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적은 그 자체로 믿어져야 하지 발생한 사실에 대해 이러저러한 해석을 덧붙인다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바빙크도 말하기를 "우리는 마땅히 성경이 표현한 방법대로 표현할 뿐이다." 라고 했다. 성경은 그 이적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이고 그 방법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적을 믿기란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쉽지 않다. 또 드러나는 현상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믿기 어렵다. 그러나 이적이 흔하게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이적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죄악으로 물든 인생들은 죽는 날까지 고생하도록 되었으니(창3:19) 하나님께서 이적적 간섭으로 사람들의 고생을 면제시키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합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한 구원 운동으로 이적을 행하셨는데 성경에 기록된 것들이 바로 그러한 사항들이다. 찰스핫지(Charles Hod-ge)도 말하기를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은 거기 계시된 진리의 일대 체계에 응당하는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2. 라기스의 최근 발굴

 1) 유대인 성전 : 고고학자들은 최근 텔 아랏(Tell Arad)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국 시대의 이스라엘인 신전 하나를 발견했다. 이 신전의 건축양식은 태양신전의 건축양식과 유사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발굴 범위를 태양신전과 그 인접 지역으로 한정하였다. 이 구조물은 아랏 신전의 구조물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두 개의 큰 방과 하나의 뜰로 구성되어 있다. 또 솔로몬의 궁전과 광야에서의 상막과도 그 구조가 유사했다. 따라서 이 구조물은 B.C. 200년경의 유대인 성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이스라엘인 성소 : B.C. 900년경에 쌓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파른 길이 성전 밑으로 뻗어 있으며, 그 양편에는 방들과 생산 시설들이 있다. 이 길은 성소에 연결되어 있는데 이 성손는 3×5m의 장방형의 방으로 이곳에는 B.C. 1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의용 그릇들과 돌제단 하나, 네 개의 향로, 기타 잔들이 산적해 있다. 

 3) 페르시아 시대의 산당 : 1973년 발굴 작업이 재개되었는데 이 작업의 결과로 유대인 성전 남동쪽 40m 지점에 하나의 성전이 더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하나의 향 받침대와 몇 개의 도기들이 발견되었는데, 페르시아의 것이며 유대인 성전의 건립으로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지역과 함께 '총독의 궁'과 성문 사이의 전지역의 발굴이 재개되었다. 

 3. 드빌의 최근 연구

 드빌은 가나안의 여러 성읍들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로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기럇세벨로 알려졌는데(수15:15;삿1:11) 여러 설화를 통해서 웃니엘이 이곳을 정복했다(수15:15-19)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여호수아가 점령의 주인공이라고 가르친다(수10:38-39; 수12:13).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갈링에 의해 제안된 의견, 즉 키르벳 라부드가 드빌의 유적지에 더 적합하다는 의견이 지지를 받고 있다. 이곳은 헤브론에서 서남쪽으로 12㎞ 가량 떨어진 해발 671㎞ 지점에 위치해 있다. 식수 공급은 이곳의 바위를 파서 물저장 탱크로 사용해서 충당하고 있고 그 밖에도 북쪽으로 2㎞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2개의 우물을 이용했다. 이것은 윗샘과 아랫샘을 이야기했던 악사의 이야기에 대한 좋은 배경이 된다(수15:15-19). 키르벳 라부드에는 B.C. 3000년 동안에는 간헐적으로 거주했으며, 후기 청동기 시대가 되어서야 성벽을 갖춘 도시의 모양을 띠게 되었다. 후기 청동기의 지층 위에 있는 이스라엘 제1주거지층은 가나안의 정복 설화와 부합되고 B.C. 10세기 지층의 유물들은 이곳이 레위 지파의 거주지였음을 증명한다. 그 밖에도 두께 4m 정도의 성벽은 B.C. 9세기에 세워졌으나 B.C. 701년에 산헤립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다. 성 밖의 주거 지역은 B.C. 7세기에 세워졌는데 재건된 드빌 성과 더불어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잘 지어진 가옥들, 금속공예품, 상아와 뼈의 상감, 석제품, 기타 뛰어난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을 통하여 드빌은 번화한 통상로상에 위치한 번창한 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