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여리고/수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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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여리고 성 함락은 성경상에 등장하는 통쾌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이 성을 성공적으로 함락시킬 수 있었던 힘은 순수한 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이스라엘 군인들의 강성함과는 상관이 없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그것은 전쟁은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주권적 사실에 대한 재인식이다. 나아가서 세상만사는 인간의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절대주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신비로운 상황 속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최근까지 학문적 견지에서는 여리고 성 함락사건이 신화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을 통하여 드러난 것처럼 여리고 성의 파괴는 동시적이며 강한 지진과 불에 의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는 성경이 증거하는 바와 일치한다. 우리가 좀더 겸손하게 이성을 신앙에 종속시킨다면 훨씬 빠르고 선명하게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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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는 성경의 가나안 입성의 연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사실성을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가나안의 기후는 지중해의 영향을 받아 습한 기후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자료들을 얻기가 힘들다. 그리고 정치적, 군사적 통로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이유로 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문화 유물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역사를 명쾌하게 밝혀 주는 유물들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학자들의 꾸준한 탐사 덕분에 나타난 몇몇 자료들이 그나마 성경에 과학적인 빛을 던져주고 있다.
1. 여리고의 위치
1) 구약 시대의 여리고
구약에 나타나는 여리고(Jericho)는 요단 강에서 서쪽으로 약 8-9㎞, 길갈에서는 북서쪽으로 약 3㎞ 사해에서 북방 약 12㎞,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3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여리고 성의 크기는 약 8에이커(1에이커는 약 4㎞2)밖에 안 되는 매우 작은 도시 국가였다. 당시에 존재하던 므깃도 성은 14에이커, 라기스는 18에이커, 하솔은 200에이커였다. 하지만 크기에 비해 여리고는 지정학적으로 곡창 지대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며, 교통의 요지로서 고지대에 오아시스를 지닌 요새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난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성읍이었다. 현재 위치는 텔 에스 술탄(Tell es-Sultan)이다.
2) 신약 시대의 여리고
신약에 나타나는 여리고는 구약에 나타나는 여리고의 위치와 다르다. 신약의 여리고는 구약의 여리고보다 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위치는 툴룰 아부 엘 알라이크(Tulul Abu el-Alayig)이다. 신약의 여리고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2. 여리고의 함락
1) 함락의 원인
고고학에 의해 드러난 여리고 성은 위치나 구조상 적에게 쉽게 점령될 수 없는 요새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략에 따라 공격했을 때, 여리고는 힘없이 무너져 버렸다. 수6:20에 의하면 7일간의 침묵 행진 후에 나팔과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이는 학자들에 의하여 지진으로 무너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이 여리고를 지진을 통해 멸망시키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함락 시기
① 주전 1400년경(B.C. 15세기)
이 학설은 존 가르스탱(J. Garstang)이 1930년부터 6년간 텔 에스술탄(Tell es-Sultan) 지역을 탐사한 후 내린 결론이다. 이때에 주전 1400년경의 미케니안 형식의 도기들과 애굽 보물의 하나인 스카랍(Scarabs, 갑충석-딱정벌레 모양의 부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이 스카랍에는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멘호텝 3세는 주전 1414년경부터 애굽을 다스린 왕이었다. 이런 증거로 인해 가르스탱은 여리고가 주전 1400년 이전에는 점령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리고의 함락 시기는 주전 1440년부터 그 이후에 해당한다. 이는 왕상 6:1과 삿11:26에 근거한 출애굽 연대인 주전 1446년에다 광야 40년을 뺀 연대와 매우 비슷한다.
② 주전 1500년경(B.C. 16세기)
가르스탱의 연대에 불만을 품은 캐드린 케년(K. M. Kenyon)이 1952년부터 5년간 발굴한 후에 얻은 결론은 여리고 유적의 대부분은 주전 16세기 이전의 것들이라는 것이다. 케년은 주로 가르스탱이 발굴한 언덕 부분에서 다시 발굴하였는데, 가르스탱은 그곳을 후기 청동기 시대로 보았다. 그런데 캐드린 케년은 중기 청동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지층으로 보았다. 케년은 여리고 지역이 중석기 시대(B.C. 8000년경)부터 문화가 시작되었다. 최후 멸망 유적지인 맨 윗부분의 텔은 중기 청동기 시대(B.C. 1500년경)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3. 여리고 발굴 단계와 구조
1) 여리고 유적지 발굴 단계
텔 에스 술탄(Tell es-Sultan)지역은 대한 발굴은 1907-1911년에 젤린(E. Sellin)과 바칭거(C. Watinger)가 처음으로 도기류를 발견한 이후 가르스탱에 의해 1930-1936년에 발굴되어졌다. 그 후 캐드린 케년이 1952-1957년에 여리고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젤린바 바칭거의 유물에서 도시 유적은 중기 청동기(B. C. 17-16세기) 시대로 판정됐고 도기류는 주전 13세기의 것들로 판정됐다. 가르스탱은 자신이 발견한 스카랍과 자기류들을 주전 15세기의 것으로 판정했다. 그리고 캐드린 케년은 텔(Tell)의 윗부분을 발굴한 결과 주전 16세기의 유물이라고 판정했다. 여리고의 파괴 연대는 위에서 보다시피 매우 혼란스럽다.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아직도 논쟁중이다. 그러나 일치하는 것은 여리고 지역이 큰 지진과 불로써 멸망했다는 것이다.
2) 여리고의 구조(이중 성벽)
여리고 성의 구조에 대한 논쟁점은 주로 성벽에 관한 것이다. 가르스탱은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는데 동시대의 것이라고 하며, 캐드린 케년은 이중으로 된 성벽은 각각 다른 시대의 벽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두 학자의 견해에 대해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학자에 의해 드러난 성벽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가르스탱은 주전 15세기 시대의 지층(D 성읍)을 발굴하여 외벽은 높이 9m, 두께 1.8m, 그리고 내벽은 높이 9m, 두께 3.6m의 벽돌 성벽을 발견하였다. 이 구조물이 파괴된 파편을 살펴보면 큰 지진과 화재로 인해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캐드린 케년의 보고에 의하면 이 두 성벽은 동시대의 것은 아니다. 케년은 가르스탱이 발굴한 D성읍의 석벽을 주전 3000년대의 것으로 판정하였다. 하지만 가파른 언덕의 정상에 있는 여리고 성은 바깥 부분에 방어용 석벽을 3-4m 높이로 쌓았는데, 그 석벽은 여리고 성쪽으로 약 35°정도 기울어지게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이 비록 연대에는 차이점을 갖고 있지만 파괴된 방법과 석벽이 두 개였다는 사실은 서로 일치한다. 여호수아에 의해 무너진 그 성벽이 외벽이든 방어벽이든, 아니면 외성, 본성 둘 다 무너졌든지 사람에 의해 파괴된 것은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여리고 성이 파괴된 시기나 성벽의 구조등에 대해 어느 것이 확실하다고 정확히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적 측면에서는 성경적 연대와도 비슷한 주전 1400년경일 것이라는 가르스탱의 견해가 더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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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구약 중간 시대의 여리고
헤롯 대왕이 이곳 여리고에 겨울철 수도로 사용하기 위한 성읍을 세웠다. 그 까닭인즉 이곳의 상쾌한 겨울이 뼈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예루살렘의 습기 찬 겨울과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요단 계곡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한 작은 헬레니즘식 성채가 세워져 있었다. 이 여리고를 요새화하였던 작업은 바기데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적이었던 마카비 가(家)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폼페이우스가 B.C. 63년 여리고에서 트렉스와 타우루스라고 불리는 두 개의 성채를 점령하였는데, 아마 그것들은 마카비 시대의 것들과 동일한 성채로 간주된다. 켈트의 양쪽 제방 꼭대기도 마찬가지로 수비를 위한 성채였는데, 특히 남쪽에 있는 키프러스는 헤롯 대왕이 그의 어머니에게 주었던 곳이다. 이들 두 도시 중에서 여리고가 비용을 훨씬 더 많이 투자한 곳으로 이곳엔 그리스-로마의 대도시에 있었던 정상적 도시 건축물들처럼 연못과 공원, 별장 등을 갖춘 많은 방들이 있었다. 와디 켈트가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갔고, 도시의 주요 건축물 중 일부는 그 건천(乾川)을 향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는 길이가 도시의 약 두 구획에 해당하는 것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45m 길이의 대형 계단을 가진 것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50개의 조소(彫塑)된 벽감(壁龕)과 중앙에 반원형의 행각 정원을 가진 낮은 화원 정원도 있었다. 이 화원 정원에 있는 양끝 건물들의 벽 중에는 두께가 약 1m에 달하는 것들도 있었음이 발견된다. 이 지역에 관해서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약에 가서 헤롯 대왕이 죽자 그의 궁전 및 여리고의 다른 건물들 중에서 일부가 불탔지만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곧 그 도시를 복굼했다고 한다.
2. 종려의 성읍 여리고
1) 지정학적 조건
여리고는 지정학적 조건상 아열대 기후로 온난하여 예로부터 종려나무가 잘 자랐다. 그리하여 일찍부터 이곳을 '종려나무의 성읍'(삿3:13;신34:3)이라 일컫기도 했던 것이다. 여리고는 연강수량이 118mm로 극히 건조한 곳이지만 이 일대는 샘물이 풍부한 큰 오아시스 지대이기도 하다. 이곳의 물은 식수로 쓰일 뿐만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쓰이며 관개조직도 발달되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해서 관개농업의 기원이 여리고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와 같은 천혜의 조건으로 여리고에는 B.C. 8000년경에 세계 최고의 취락이 성립되고, B.C. 7000년경에는 이곳을 방위하는 견고한 요새가 건설되었다. 현대의 성읍은 비잔친 시대 및 십자군 시대의 여리고 시가지였던 위치에 재건한 것이며, 부근의 요단 강 가까이에 가설한 '아렌비' 다리에 의해 서쪽 예루살렘과 동쪽 요르단 왕국의 수도 암만을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
2) 정보 탐지 시설로서의 여리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여리고 시가 중에서도 최고(最古) 시가의 유구(遺構)는 면적이 약 4ha에 그 주위를 석축(石築)의 방벽으로 둘렀고, 방벽의 내측에 원형석탑을 세웠다 바로 이 탑은 하부의 직경이 8.5m, 윗부분이 직경 약 7m, 높이가 약 10m로 속까지 돌을 채운 견고한 것이며, 중심부에 설치한 계단을 사용하여 탑의 정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이 탑이 적의 내습을 감시하는 정보탐지 시설이었다. 이것은 B.C. 8000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세계 최고(最古)의 석조 건축물임에 틀림없음으로 알려진다. 이 성안에는 당시 1500-2000인 가량의 거주자가 있어 농업에 종사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3. 함락 시기에 대한 논란
여리고 성 함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통용되는 실정이다. 요단 종단에 관한 글릭(Glu다)의 연구에 의하면 라기스나 하솔처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서로간에 관련성이 거의 없는 도시들까지 휘말린 이와 같은 광범위한 전쟁이 일어났을 가능성의 유일한 시기는 B.C. 13세기라고 한다. 이때 여리고는 두 전쟁의 연결점이었다. 그곳은 요단강 너머의 첫 도시였으며 요단강 저편의 교두보였다. 그 두 전쟁과 여리고 자체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들을 해석해 볼 때, 여호수아 당시 여리고는 다만 소도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더 크며, 13세기경 여리고에 어떤 점령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언덕위에서와 무덤들 안에서 발견된 미케네식 도자기의 몇몇 지역적 모조품들을 통해 입증이 된다. 이는 피에르위고 뱅상이 독일인의 발굴 때와 같이 아주 오래전부터 주장했던 바이다. 한편 13세기 이전에 있던 파괴의 흔적들은 다음 세 가지 요인들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더 오래되고 강한 여리고 요새들, 즉 가르스탱이 발굴한 것들 중 하나의 붕괴, 둘째, 여호수아로 하여금 사전 군사행위 없이도 세겜에서 율법을 제정할 수 있게 해준 더 이전의 중앙 팔레스틴에 대한 군사적 침공, 셋째, 역대상의 족보와 관련이 있는 다른 자료들이다. 이와 같이 여리고 성의 함락 시기의 문제는 진지한 논의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