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부른 에노스/창4:26
에노스(Enosh)는 아담, 셋, 에노스(대상1:1)라고 기록된 대로 모든 인류의 조상이며 메시아의 족보에 기록된 인물이다. 셋은 109세에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90세에 게난을 낳았고 815년 동안 자녀를 낳고 905세에 죽었다. 가인의 시대가 죄와 폭행으로 표현되고 있듯이 에노스의 시대는 경건으로 표시되었다. 에노스의 시대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을 가리킨다. 에노스가 메시아의 조상이라는 점은 가인과 아벨보다 셋이 중요하고 또 셋에게서 에노스가 태어날 때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다시 재개되었다는 점이 중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벨의 죽음 이후 중단된 제사의 회복은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죄악이 관행했던 당시 셋의 집안에서 예배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죄지은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내용이 있다. 즉 아벨(Abel)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여호와(Jehovah)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셋의 아들 에노스(Enosh)에 이르러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제사도 다시금 시작되었다.
에노스의 이름이 지닌 뜻은 '사랑'으로 인간의 연약성과 유한성을 나타낸다(시8:4; 시103:5). 다시 말하면 에노스는 그 이름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요, 그 겸손은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1.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세상
1)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인류는 본래 하나님을 가까이하던 삶과 하나님을 잘 알던 지식에서 멀어져 버렸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류의 구원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비롯된 믿음을 통하여 시작되기 때문이다(요17:3). 그런데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을 알던 영적 지식을 상실하고 심히 타락하여 그 지식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완전히 잃고 말았다. 즉 하나님과 교통하던 위치에서 그 동안 누려오던 모든 특권과 에덴 동산에서의 영화를 박탈당하고 사단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빛의 세계를 떠나 어둠에 지낼 수밖에 없게 된 인류의 비참한 모습인 것이다.
2) 하나님이 관심을 거두셨으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절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무관심 속에 던져진 것을 의미한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타락한 인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놓는 분리의 벽 그것은 죄인들을 돌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관심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할 인간이 무관심이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다. 이 무관심은 인류의 죄의 결과대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3) 인간이 비천해졌으므로
피조물인 인간이 그를 지으신 창조주를 떠난 상황은 교만하던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와 열등감에 빠지게 하였다. 그 결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무리 많이 취해도 탐욕은 채울 길이 없었고 언제나 목마름을 느끼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에서도 참된 만족이나 평안을 소유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 그것이 곧 재앙이다.
2. 다시 회복된 예배
아담과 하와로 인해 실낙원 곧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제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이 드렸던 제사는 인류 최초의 살인을 가져왔고 더 큰 불행과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아담의 가정에 셋(Seth)을 주어 위로하신 하나님께서 셋에게 아들 에노스(Enosh)를 허락하심으로 조상의 비참하였던 전통은 중단되었다(창4:26). 여호와를 부르는 새로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 하나님의 권고하심에 따라
권고(favor)는 기억하며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품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첫 제사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 남아 있는 슬픔을 위로하시고자 셋(Seth)을 주셨다. 그 후 셋의 아들 에노스(Enosh)때에 새로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큰 기쁨을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권고하신다는 강력한 표현이고 증거이다.
2)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따라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기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부터 출발한다. 버림받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용서와 사죄함의 은혜에 대한 표현, 그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아벨이 드린 첫 번째 제사는 아담의 범죄 후에 드린 예배이지만, 셋의 가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드렸던 제사는 아벨 대신 셋을 허락하사 에노스를 낳게 하신 뒤에 드린 감사의 예배였다. 따라서 감사가 없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며 진정으로 감사하는 참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3) 신앙 부흥의 섭리하심에 따라
그때에(창4:26)라고 일컫고 있는 당시의 영적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사람들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지 않는 혼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창6:2-4).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참된 신앙을 위하여 공개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은 참된 신앙 부흥의 섭리였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세상의 정욕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그의 진리, 그의 자녀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4:18-24; 창5:24). 이러한 신앙 부흥은 하나님이 그 시대마다 준비된 사람을 통하여 이루셨다.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로운 비를 내리시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 부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묵은 땅을 기경하라"(호10:12)고 명령하신다. 주 앞에서 유쾌한 날이 회복되게 하기 위하여 교만과 탐욕의 우상을 깨뜨리고 온 마음을 합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진정한 예배의 자세를 회복하여 생기 넘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벨의 죽음 이후 중단된 제사의 회복은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하기 시작했다(대상16:8; 시105:1). 죄악이 극심했던 당시 셋의 집안에서는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시며 세상을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경배하였다. 우리들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한다.
1. 성호(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명칭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학적 표현으로서의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특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이다.
1)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학적 표현
'엘 샤다이', '엘 울람', '아도나이', '체바옷' 등과 같은 이름들은 하나님의 인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명칭들이다. 특히 이들은 '벧엘'이란 특정한 지명을 전제로 해서 언급된 '엘벧엘'과 같이 특별한 수식 어구와 성호를 나타내는 명사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표현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계시라기 보다는 어떤 특정한 인물과의 관계 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특별 수단
구약성서의 '여호와', '엘로힘' 등의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의 본체론(本體論)적인 존재 양식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단어들이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실재성을 나타내기 위해 특별히 계시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철저하게 신적인 계시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엘로힘'이란 성호는 창2:4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있는 '여호와'(아도나이)와 함께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이다.
이 두 명칭은 경우에 따라 한 문장 안에서 교대로 쓰일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다른 하나님의 속성과 각각의 용법으로 구별된다. 그 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① '여호와': 주로 이방신들과 구별하여 오직 이스라엘의 유일신임을 표현하는 고유명사이다. 특히 선택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사랑과 심판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 이 명칭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언급할 때도 사용된다.
② '엘로힘': 이스라엘에만 국한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진 하나님의 존재의 일반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보통명사이다. 이 명칭은 자기 백성과 관련된 민족적인 신으로서보다는 창조로써 세상을 보존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2. 셋의 족보에 대한 특징
셋의 족보는 아담의 계보(창5:1-31)를 이끄는 선행 족보로서 뒤이어 본격적으로 시작될 아담의 족보에 대한 예고편이다. 셋의 족보는 가인의 족보(창4:16-22)와 내용면으로는 유사한 형태이지만 가인의 족보가 하나님께 항거하는 '칼의 노래'로 끝을 맺고 있는 반면 구원에 대한 열렬한 동경으로 종결되어 그 의미를 더해준다. 셋의 족보에는 몇 가지의 특징적인 사실이 나타나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구원의 씨를 보존하시려는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이는 뒤이어 나올 아담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셋의 탄생이 아벨을 대신한 하나님의 깊은 배려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모세는 이를 반영하기 위해 히브리 원문에 '그녀가 이름을 셋이라 불렀더라'고 기록함으로 셋의 이름을 하와가 지어주었음을 강조한다. 어머니가 자식의 이름을 지어 주는 행위는 특이한 경우인데, 이 같은 사실이 종종 나타난다(창29:32-35; 창30:23,24; 창35:18).
이는 친히 해산의 고통을 겪은 어머니의 각별한 애정과 기대를 드러낸 행위로서 자녀의 이름은 대개 아버지가 짓는 히브리 사회의 관행(습)과는 대조적이다(창5:28,29; 창31:3; 눅1:62,63).
2) 제의에 대한 최초의 기록
모세는 셋의 아들 에노스 시대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성호)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출3:14;출 6:2,3과 비교되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최초로 계시된 출3:14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호칭했다기보다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공적인 예배가 시행되었다는 의미이다.
3. 셋의 족보와 가인의 가계 비교
창세기 4장은 셋의 족보와 가인의 가계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같은 비교는 '가인/아벨'→'에녹/에노스'→'가인의 7대손 라멕/에녹'등으로 점차 극대화되어 가고 있다. 물론 가인의 족보는 '노아'에서 끝나고 셋의 계보는 계속되어가고 있지만 이런 대조는 '이스마엘/이삭'→'에서/야곱'→'사울/다윗'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