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학적인논쟁/고전1:18
초대교회가 설립되어 기독교 신앙이 곳곳에 전파되자, 여러 곳에서 많은 무리의 기독교인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제시해 줄 수 있는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분명한 가르침을 받기를 권하였고, 역설적으로 잘못된 가르침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는 원래 헬라의 이원론적 철학 세게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해석하는 잘못된 사상이다. 이것은 이원론, 가현설, 유출설, 반유대주의 영지에 의한 구원 등을 가르침으로 기독교인들을 미혹하였다. 그리하여 사도적 교부(속사도)들이 이들과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단들과 외부에서 오는 오해와 박해에 대응하기 위하여 변증가들이 나타났다. 박해와 이단은 긍정적인 것들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기독교 신앙의 체계를 세워나가셨다.
2, 3세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고발되기만 하면 체포되는 시대였다. 기독교에 대한 갖가지 헛소문이 난무하였고 그것들에 대해 해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리하여 변증가들(Apologists), 즉 신앙의 수호자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단의 공격은 기독교의 신앙을 정리하게 하는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이러한 로마 정부의 박해와 일반대중의 오해에서 기독교 진리를 효율적으로 변증하기 위해서 상당 수준의 학식이 요청되었고, 기독교 신학의 체계화가 시도되었다.
1. 사도적 교부
이들은 사도들의 직접 혹은 간접적인 제자들로서 박해중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고, 일상생활에서의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1)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분쟁이 난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교회 분쟁의 치유책으로 사랑과 겸손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바울의 이신득의 사상이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2) 이그나티우스(Ignatius)
안디옥 감독으로 트라얀 황제 때에 순교하였다. 그는 로마로 호송되던중 신자들에게 7통의 서신을 썼다. 성도의 단결을 권면하면서 세상 영화보다 순교의 영광을 찬양하였다. 그가 가르친 내용은 이단 경계, 교회의 조직적 통일, 감독의 권위에 복종, 순교자의 영광 등이었다.
3) 폴리갑(Polycarp)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이레니우스의 스승이며 또한 이그나티우스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사랑이 넘치는 감독으로 전경을 받았지만 이단에 대해서는 엄정하고 단호하였다. 그러나 교회조직과 권징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의 서신은 특별히 구약보다 신약을 많이 인용하였다.
4) 파피아스(Papias)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으로 폴리갑과 함께 버가모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사도들 및 속사도들의 구전을 모아 5권으로 된 「주의 가르침의 설명」을 썼다.
5) 헤르마스(Hermas)
바울의 친구이며 파피아스의 형제였다. 그의 저서 중에「목자」(Shepherd)가 있는데 이것은 묵시문학에 뛰어난 책이다. 그의 사상은 선행 공적적인 율법주의의 색채가 짙다. 또한 순교의 미덕을 중시하였다.
2. 영지주의(Gnosticism)의 등장
1) 의의와 유래
영지주의는 대중적인 헬라의 지식체계로 헬라 사상과 동양의 세계관, 기독교의 교리를 절충한 혼합 종교철학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원전으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다. 영지주의는 2세기 후반에 절정에 달하여 당시 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만큼 영향과 도전을 주었다.
2) 주장과 특징적 교리
영지주의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이원론 : 영지주의는 세계를 물질계와 영계로 나눈다. 이들은 물질을 죄악시함으로 하나님의 물질세계 창조를 부인한다. 세상 창조는 열등한 신 데미우르고스(Demiurgos)의 사역이라고 한다. ② 가현설(Docetism) : 이들은 물질을 죄악시함으로 예수의 육체 탄생을 부인하고 다만 잠시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예수의 구속 사업을 백지화시키는 작업이었다. ③ 유출설 : 영지주의는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유츨설을 주장한다. 최고 존재인 하나님께로부터 유출되어 아이온(Aeon)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유출된 아이온들은 플레로마(The pleroma) 세계에서 산다. 특별히 이들 아이온 중에서 타락한 존재가 데미우르고스인데 그가 물질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와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④ 반유대주의 :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했다고 가르치므로 그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거부한다. 하나님이 물질세계를 창조했다고 가르치므로 그들은 유대주의를 배척한다. ⑤ 구원론 : 영지주의는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부조화에서 회복을 위한 방편으로 지식을 제시한다. 영적인 지식, 즉 영지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변증가와 변증가 신학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반론과 이단의 공격들은 단순히 부정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근거있는 반박이 필요했고, 이것이 곧 변증가들의 임무였다. 이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변증하였다. 첫째는 황제나 총독 등의 고위관리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며, 둘째는 이교 철학자들의 공격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술하였다.
1)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
팔레스틴 출신인 그는 처음에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배웠고 계속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철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Aplolgy」를 써서(153) 안토니우스 피우스에게 올려 정부의 박해와 이방의 비난을 반박했다. 그 후 에베소 방문 중 유대인 랍비인 「트립포와의 대화」를 써서 유대인의 반대를 논박하였다. 그는 로마에 귀환중 순교하여 이름에 '순교자'(martyr)가 붙었다.
2)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
아테네 철학자로서 회심하여 변증가가 되었다. 그의 변증은 "탄원서"는 당시 기독교를 무신론이라고 중상모략한 데 대한 변호문이다. 여기서 그는 예배로서 성례식을 거행하며, 결코 난잡한 남녀교제가 아닌 순수한 예배를 드린다는 것과 성도의 도덕적 우월성을 변증하였다. 「인간의 부활」에서는 인간의 개체성이 신에 의해서 예견·욕구·선택된다는 독자적인 인간 파악을 하여 기독교 신앙에 합리적인 기초를 닦아주었다.
3) 변증가 신학의 특성
변증가 신학의 문제점은 지나친 토착성에 있다. 기독교에 대한 변호가 강한 나머지 당시의 헬라 철학의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플라튼의 철학이 바울의 사상보다 더 많이 인용되었다. 이들은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저스틴의 경우에는 기독론에 성자 종속설에 관한 약간의 오류가 있었다. 그러나 최초로 짜임새 있는 독창적인 신학연구가 개진되고 있다는 긍정적인 요소도 간과할 수 없다.
1. 당시 기독교와 로마정부의 관계
처음 얼마동안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법적 보호 하에 있던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유대인 자신들의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정이 이 둘 사이에 분명한 구별을 짓게 했다. 비두니아 총독 플리니에게 보낸 트리얀 황제의 답신에서 기독교가 이미 범죄단체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트라얀은 가벼운 방법으로 기독교를 다루었다. 기독교인들은 수색하는 일은 없었고 신전에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의 신앙을 포기하기만 하면 벌하지 않았다. 다만 끝까지 고집하는 경우에만 처벌되었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련은 순교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최고의 형벌이 걸려 있던 기독교 신앙고백은 그 고백자들에게 끊임없는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실제적인 순교자 수는 3세기와 4세기의 수효에 비해 적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기독교에 부여된 협의는 무신론과 무정부주의였다. 기독교인들의 옛 신들을 부정한 것이 무신론으로 간주되었고, 황제 숭배의 거부가 반역 행위로 보여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성만찬 교리가 오해되어 식인종의 혐의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의식이 대부분 저녁에 비밀리에 행해졌음으로 인해 매우 방탕한 집단으로 지탄되었다. 정부의 기독교 박해는 폭도를 자극하여 기독교도들을 공격한게 하였다.
2.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의 중심 사상
열렬한 철학도였던 저스틴은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피타고라스 사상, 플라톤의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중심 사상은 기독교가 모든 철학 중 가장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스토아적 방식으로 이 로고스를 인식하여 언제 어디서나 일하시며, 소크라데스나 헤라클리투스와 같은 희랍인이거나 아브라함과 같은 '야만인'이거나를 막론하고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분으로서 언제나 그분의 지도를 따르기만 하면 진실로 기독교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인류 전체를 제공하는 신적인 로고스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확신에서 스토아 개념을 뛰어넘는다. 그는 복음을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보아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가르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이며 그의 대행자이시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는 없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그와 하나이신 신적 로고스에 강조점을 두었다.
3. 영지주의 창시와 지도자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기독교 영지주의의 창시자는 시몬 마그누스(Simon Magnus)이다. 이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영지주의 지도자로서 A.D.150년 이전에 활약한 안디옥의 사토르닐루스(Satornilus of Antioch), 13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가르친 바실리데스(Basilides) 등을 들 수 있다.
이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는 135년과 165년 사이에 로마에서 활약했던 당시의 가장 유능한 사상가 중의 하나였던 발렌티누스(Valentinus)가 있었다.
발렌티누스 학파는 대부분 영지주의자들의 구원이 가능한 영적 인간과 사상의 전수가 불가능한 물질적 인간의 구분 이외에 한 부류를 첨가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부류인 영적 인간,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구원이 가능한 정신적 인간, 구원의 가망이 없는 물질적 인간 등 셋으로 구분하였다.
4. 영지(지식)의 뜻과 기원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를 전수받은 사람은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 세계로부터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근본주의적 구원론을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신비주의 사상과 유사하나 혼합 절충주의에 현저한 특색이 있다. 여러 근거로부터 여러 가지 요소를 자체 내에 흡수하고 여러 가지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를 한 가지 형태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지주의의 기원은 그리스도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독교가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이 사상에는 유대교적 형태와 이방종교적 형태가 있다.
이 사상의 가장 근본적인 관념, 즉 현상(現象) 세계를 전적으로 악한 것으로 보는 이념적 관념은 아마도 실재하는 이데아(Idea)의 세계와 보이는 현상 세계를 대조시킨 플라톤의 이론을 페르샤의 이원론적 개념, 즉 한쪽은 인간이 항상 돌아가려는 선한 세계로 보고 다른 한쪽은 인간이 갇혀 있는 전적으로 악한 세계로 보는 관념으로 해석하여 부연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혼합 절충주의적 경향이 농후해진 영지주의는 기독교에서도 많은 요소를 채용했다. 특히 그리스도상은 이 사상이 가지고 있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고차적 지식에 관한 이해에 명확하고 구체적 중심점을 부여하기에 적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