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시대/교회의시작/행4:31
교회의 시작을 언제로 잡느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견들이 있다. 혹자는 구약의 출애굽 공동체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약의 오순절 성령강림이 교회의 시작이라고 본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때까지도 일정한 조직이 없던 예수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하는 계시기 되었다. 그렇게 하여 설립된 교회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차츰 세분화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조직만이 아니라 예배와 예전도 구체적인 방식들이 정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것들을 위한 문서들도 작성되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독교가 유대지역에 한정되던 편협한 모습을 깨뜨려 버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과 같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적 기독교가 세계적 기독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대교회는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와 문화적으로는 헬라의 영향,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백성은 대개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를 했으나 디아스포라의 영향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도 꽤 많았다. 교회의 탄생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였다. 당시의 살벌한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하였고, 부흥의 불길은 퍼져 나갔다.
1. 초대교회
1) 교회의 시작
교회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구속성취를 목격한 사도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다. 생전에 하셨던 말씀, 곧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흘이 되던 날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임재하셨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은 교회가 시작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성령 충만은 복음 전파의 열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도들에게는 증인으로서의 힘과 용기가 필요했다. 성령 충만으로 인하여 베드로의 설교에 3천 명의 사람들이 돌아오는 등, 초대교회는 시작부터 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들의 부흥을 시기하여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선교를 금하였다. 이때부터 박해가 시작되어 베드로가 옥에 갇히고, 야고보는 순교하였다. 스데반 집사 역시 순교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와 핍박은 교회 부흥에 박차를 가하였다.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핍박자 바울을 변화시켜 이방 선교의 주역으로 삼으셨다. 그의 30년간의 사역을 통하여 지중해 세계 전역이 복음화되었다.
2) 오순절의 의미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사도들에게 큰 열정과 담대함을 불어넣었다. 누구든지 예수를 위해서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또한 성령 충만은 그들에게 말씀의 사역을 일으켰다. 생전의 예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구속사적 의미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성전과 회당에서 모였던 엄격한 이스라엘 회중 중심의 색채를 탈피하였다. 둘째, 구약의 성전 중심의 제사가 신약 교회의 말씀 중심의 예배가 되었다. 셋째, 하나님의 백성은 선민의식이라는 유대적 국수주의를 버리고, 국제적이고 우주적이 되었다. 넷째는 안식일과 주일의 문제이다. 초대교회의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을 모두 예배 드리는 날로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서히 예배일이 주일로 옮겨가게 되었다.
2. 초대교회의 조직과 예배
1) 교회의 조직
처음에는 특별한 조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단지 성령의 지배와 능력에 의해 지도받는 사도들의 인도로 다스려졌다. 정치 구조와 조직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필요에 의하여 발생하였다. 구제의 문제에 대하여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는 집사를 세웠다. 집사는 일반적으로 행정, 관리의 기능을 담당하고, 사도들은 계속하여 설교와 가르침에 전념하였다. 얼마 안 되어 다른 유대교 조직들과 비슷한 '장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후에 사도들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게 되었을 때에 이들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2) 예배와 예전
성도들은 오순절 이후 매일 모여서 예배를 드렸으나 점차 날을 정하여 모이게 되었다. 안식일과 주일에 모이다가 후에는 주일로 정착되었다. 공예배 때는 설교와 기도와 찬송, 신앙고백, 그리고 성례가 뒤따랐다. 설교는 구약의 성취를 강조하였다. 신약 설교의 핵심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성취의 시대가 도래하였다(행2:16; 행3:18). 이 성취는 예수의 생애, 죽음 및 부활에 의해서 입증이 되었다(행2:30; 행5:30; 행10:39). 그리스도는 심판자와 구세주로서 다시 오실 것이다(행3:20 이하; 행10:42; 행17:31). '회개하고 죄사함과 성령의 은사와 구원의 확신을 얻으라'(행2:38; 행3:19; 행10:43).
3. 예루살렘의 멸망과 기독교
1) 예루살렘의 멸망
예수께서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고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는 열심당의 60년 동안의 끈질긴 반항과 이에 대한 군사적 탄압이 전쟁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직접적인 원인은 성전의 지도자가 로마의 주권을 결정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티투스는 70년 4월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반란군들은 5개월 동안 절망적으로 견디었으나, 8월말에 성전이 점령당하고 불태워지고 말았다. 9월말에는 그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잔류자들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함락 마지막까지 견딘 요새는 난공불락의 마사다였다. 이들은 73년 4월까지 견디다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자, 적들의 손에 사로잡혀 죽기보다는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다고 결정하고, 거의 모두가 자결을 하였다.
2) 기독교에 미친 영향
당시 일부 사람들은 유대인과 기독교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눈에는 두 종교, 즉 유대교와 기독교가 모두 같은 근원으로 보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가지이므로, 만일 뿌리를 뽑아 버리면, 그 가지는 자연히 죽어 버릴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중에도 남아 있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유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을지라도, 또한 성전이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력에 찬 생명력으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성도들은 소아시아와 로마 등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곳곳마다 복음을 전파하고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 등의 박해 아래서도 끗끗히 살아 남아 로마까지 정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어 처음부터 그 힘과 능력을 발휘하였다. 비록 핍박과 고난이 내·외적으로 밀려왔을지라도, 복음의 힘은 이를 감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현대에는 무감동하고 미미한 신앙 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이제 우리는 초대교회 역사의 진정한 의미, 즉 성령 충만하여 생동력 있고 활력이 넘치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1. 오순절(Pentecost)
50번째를 의미하는 구약의 칠칠절에 해당하는 신약의 헬라어 단어인데, 이 절기는 이스라엘의 3대 순례절기 가운데 두 번째 절기로서 유월절에 시작된 한 주기의 기간을 끝맺는 절기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로 유대인들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절기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유월절 의식을 거행하는 중에 보릿단을 바친 후 50일째에 해당하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불렀다. 오순절은 첫 열매를 드리기 시작하는 때였는데, 신약성경은 유대인 사회에 잘 알려진 이 절기와 관계가 있다. 즉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에 강림하셨기 때문에(행2:1), 기독교인들은 그 사건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이 절기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2. 산헤드린 공회(Sanhedrin)
포로기 후기에 예루살렘에 있던 71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최고의 유대교적 평의회 또는 23명의 회원들로 구성된 하급 법정들 중의 하나로서, 그 최고의 평의회는 사법적 기능은 물론이고 입법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의회의 실제적인 권위의 정도는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크게 차이가 있었다. 이 산헤드린은 A.D.66-70년의 대반란 때까지 기본적으로 귀족적인 단체로서 남아 있었는데, 유대의 붕괴와 얌니아에서의 학자들의 모임과 때를 같이하여 전체적인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헬라어 자료들인 외경과 신약성경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술들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근본적으로 제사장적 귀족으로부터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탈무드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율법 해석 전문가들의 모임이었으므로, 제사장적 요소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몇몇 유명한 랍비들은 B.C.160년경부터 힐렐과 샴마이시대(B.C.30-A.D.10)에 이르기까지 의장직과 부의장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두 개의 산헤드린이 있었는데, 하나는 정치적 제도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제도 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에 의해 범해진 종교적 범죄들만 취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국수주의
민족주의(Nationalism)의 한 형태로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타민족이나 타국가에 대하여 배타적 초월적 성격을 지닌다. 역사적인 실례로서 일본의 메이지 이후의 국수보존 사상,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등을 들 수 있다. 국수주의의 주장에 따르면, 종족집단은 역사적 형성과 함께 생겨난 종족문화가 외래의 이질문화에 위협받을 때 민족문화는 스스로 문화방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의 침입을 방어하는 소위 '토착주의'(Nativism) 운동이 일어난다고 하고, 이 운동은 단순한 정신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전통사회의 혁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행동은 근본적으로 자국민의 우수성을 편협한 배외사상으로써 고집하였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국가주의임에 틀림이 없다.
4. 열심당(Zealot)
외국의 통치, 특히 로마 통치에 반항하던 매우 과격하고 호전적인 유대인 반항자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던 용어이다. 열심당원들은 하나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우상 숭배와 배교와 그 밖의 율법위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다. 질투와 열심은 동일한 히브리 어원을 지니고 있다. 열심당의 기본적 동기를 형성했던 열심의 신학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인 예배에 근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열심당의 행위는 예방의 의미를 지닌 화해적이며 보상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열심당은 날카로운 검으로 배교자들을 이스라엘에서 근절시켰으며, 또한 율법의 엄격한 해석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을 지키는 데 있어서 죽음도 불사했었다.
5. 마사다(Masada)
히브리어로 '신의 요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마사다는 오늘날 에스세베(Es-Sebbe)라고 부르는 곳으로 엔게디 남쪽으로 약 16㎞ 지점에 위치한 사해 서쪽 해안에 있는 난공불락의 바위로 된 요새이다. 이 요새는 A.D.66년에 발발했던 유대인의 혁명에서 그들이 최후까지 항전했던 고이었다. 마사다의 역사는 짧고 격동적이었다. 마사다는 처음으로 유다 마카비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대제사장 요나단에 의해서 요새화되었다.
광신적 혁명주의자들이 반란전쟁의 본거지로 사용하던 이 요새는,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가 제10군단의 사령관이 되어 거대한 토루를 쌓아 올려, 5년만에 이 성벽을 깨뜨림으로 점령당했다(A.D.73). 요새에 거주했던 960여 명의 거주자들은 7명의 부녀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살할 것을 결의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