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직제의 완성/행9:31
초대교회는 매우 자연스러운 공동체였다. 교회의 제도나 직제를 만드신 적이 없는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제자들은 계속적으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성장해 가는 교회의 질서와 보다 효율적인 선교활동을 위해서 사도들은 직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함으로 집사와 장로, 감독등의 직제들이 서서히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성장해 가는 교회의 물량적 제어와 직책 분담의 필요성을 위해서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카톨릭은 오히려 체제와 직제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교회의 영성이 현저하게 쇠락하였으며, 교회는 권위주의와 경직성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현재의 개신교는 그보다는 자유스럽지만, 필요성에 의하여 교단마다 직제가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인데, 파당이나 분파 혹은 견제세력으로의 지향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팔레스틴에서 발생하였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열두제자 역시 모두 유대인이었다. 팔레스틴은 지정학적 장점 때문에 열강이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계속적인 수난과 고통을 감내하며 침략과 포로 생활을 지나야 했다. 교회의 탄생 시기에 팔레스틴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에, 사회·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에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유대교라는 토양에 서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토양 위에서 초대교회는 서서히 조직을 확립하고 예배 제도를 정착하며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1. 신약교회의 배경
1) 유대인의 세계
당시 유대교에는 몇 개의 분파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당파는 바리새당(Pharisees)이었다. 이들은 일반 대중들의 당으로 평화롭게 성장했으며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보다 보수적인 당은 사두개당(Sadducees)이었다. 이들은 유대 귀족층에 속하였으며, 로마인들의 후원을 통하여 유지하였던 성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은 사두개당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 로마 통치에 반항하였던 극단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곧 열심당이었다. 또한 금욕주의적인 엣센파(Essens)가 있었다. 이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율법 준수에 힘썼으며, 묵시적인 종말론에 강렬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 가운데서도 모든 유대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윤리적 유일 신앙과 종말론적 소망이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인들이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핍박하는 이유는 자명하였다. 메시아인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의 종교적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2) 디아스포라 유대교
유대주의는 팔레스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구약 시대부터 페르시아와 메소보다미아 지역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계속하여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 로마 등 여러 지역에 중요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개종한 이방인들과 더불어 디아스포라(Diaspora)를 이루어서 제1세기 유대주의의 중요한 양상을 띠었으며, 초기 교회의 성립과 확장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방 자치 정부를 조직했으며 율법을 연구할 수 있는 회당을 세웠다. 또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독교 전파를 위해 가장 유용한 수단을 제공했는데, 곧 구약의 헬라어 번역이었다. 이를 70인역(Septuagint)이라 부른다.
3) 헬라-로마 세계
주전 4세기의 알렉산더의 지중해 정복은 이상적인 정치저가, 문화적 연합 상태였다. 그 후 계속되는 로마도 역시 병합정책을 사용하였다. 알렉산더와 로마 제국은 모두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초대교회는 로마 법률과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로마가 이룩한 정치적 통일은 초대 기독교 전파에 유익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종교는 혼합절충주의(Syncretism)였다. 로마는 각 지방의 신들이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오직 자기들의 유일한 하나님만을 예배하기를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사회 질서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암적 존재들로 보였을 것이다.
2. 교회의 시작
1) 오순절·성령강림 사건
초대교회의 결정적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였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 이로써 성령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제자들은 인식하게 되었다.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로 하여금 담대하고 열정적인 복음 전파자가 되게 하였다. 단 한 번의 설교로 3천 명이 회개하는가 하면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의 사건은 5천 명의 신자를 낳았다. 이로써 예루살렘에서는 허다한 무리가 예수의 복음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
2) 초대교회 공동체
기독교인들(Christian)이라는 명칭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이방인들 사이에 생기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운동을 가리켜 '도'(the Way)라고 불렀다. 또한 유대인의 회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점차 에클레시아(ekklesia), 즉 교회(church)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날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 드리며 유대 율법을 지키고 사도들 집에 모여 기도하고 권면하며 떡을 떼었다(행2:46). 떡을 떼는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신도간의 친교와 가까운 신자들을 돕기 위한 것과 성만찬의 기억이요 지속이었다.
3. 초대교회의 조직과 예배
1) 초대교회의 조직
초대교회의 조직은 간단하였다. 초기에 교회의 수석은 베드로였다. 그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맛디아를 제비뽑아 얻었고, 오순절날에 첫 설교를 하기도 했다. 12명의 상도들은 모두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에 구제 문제에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을 위하여 일곱 사람을 집사로 임명하였다. 집사는 일반적으로 행정, 관리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얼마 안 되어 다른 유대교 조직들과 비슷한 '장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2) 예배와 교회 생활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차라리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확신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계속하여 안식일을 지켜 성전에 모였다. 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주일의 첫 날을 첨가하였다. 이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찬미하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었다. 그들의 성찬식은 주님의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가져왔던 그의 부활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관습으로 말미암아 일주일에 두 번의 금식도 시행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배반당하심과 십자가에 달리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명히 기독교는 유대인의 토양 위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인들의 누에 유대교 중의 맹신적 한 분파로 보이는 이 집단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천하를 소요케 하며 전파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 속에 역사하셨던 성령의 역사인 것이다.
1. 사두개파(Sadducees)
1) 사두개파의 유래(由來)
'사두개'라는 명칭은 '사독'(Zadok)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설(說)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독'은 다윗 시대의 제사장으로 솔로몬이 아비아달 대신에 대제사장으로 삼은 사람이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안티고누스 소코의 제자인 '사독'(Zodok)이 사두개파의 시조(始祖)라고도 한다. 신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들과 그 파(派)를 사두개파라고 불렀다(행4:1,5). 요세푸스는 사두개파(Sadducees)를 제사장이나 귀족 가문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사두개파가 하나의 파(派)를 이루게 된 것은 '마카비 혁명' 이후이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제사장 제도가 재조직되고, 유대교의 분파(分派)들 사이에 서로 구별되는 요소가 나타났다.
2) 사두개파의 주장
①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운명을 철저히 거부하며 심지어 하나님도 부인한다. 왜냐하면 운명과 하나님을 악 자체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이든 악이든 자유로이 선택하며, 그가 무엇을 택하는가의 여부는 각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②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고 스올(죽은 자는 누구나 가게 되는 지하세계, 음부)에 관한 교리(敎理)를 주장한다.
③ 바리새인들이 '천사론'을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사두개파는 천사도 영(靈)도 부인한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함께 멸망한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는 결국 미래의 모든 상급과 형벌을 부인했다. 이러한 것들은 율법주의적(律法主義的)인 사두개인들에게 합당치 않게 보였다.
2. 엣센파(The Essenes)
엣센파는 B.C.150년경에 생겨난 종파로 사해(死海) 부근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였다. '엣센파'라는 명칭은 이 종파의 도덕적·사회적 특색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엣센'(Essen)의 뜻은 '사색' 또는 '헌신' 이라고 한다(A.P. Stanley). 엣센파를 따르는 사람들의 수는 얼마안 되었지만 그들이 유대인 사회에 미친 영향은 코다. 이들은 청빈한 독신 생활과 수도원적인 은둔 생활을 특색으로 삼았다. 말세의 심판을 믿고, 기다리던 엣센파들은 A.D.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자 일반 교회에 흡수되어 버렸다. 엣센파의 특징을 한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약성서만을 믿고 바리새인들이 믿는 전통과 구전(口傳)을 따르지 않았다. ② 바리새인이 율법을 준수했던 행동파인 데 비해 엣센파는 율법의 뜻을 명상하는 사색파이다. ③ 엣센파는 금욕적이어서 결혼을 반대하고, 공동생활을 위하여 사유재산을 포기하였다.
3. 디아스포라(Diaspora)
'디아스포라'는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말한다. 그들은 곳곳에서 유대인의 종교적 규범과 관습들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이를 다시 해석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본향으로 하고 이 땅 위에 흩어져 있는 교회(敎會)들을 상징한다.
1) 배경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에 의하면 '디아스포라'의 근본 원인은 이스라엘의 범죄 때문이라고 한다(렘9:16).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의 유대인들은 강제적인 추방 정책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한 후에 유대인들은 유랑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다른 곳에서 보다 나은 기회와 안전을 찾기 원했기 때문에 스스로 그 땅을 떠났다. 셀류커스 왕조의 왕들은 유대인들을 안정 세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새 도시들에 이주하도록 적극 권장하는 정책을 썼다.
2) 특징
① 정치 : 유대인들은 어디에 흩어져 있어도 엄연한 '유대민족'으로 살아간다. '아브라함의 자손' 모두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다만 유대 민족이 겪어온 역사적인 상황 때문에 세계에 흩어진 것이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통치 체제 속에 통합되어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자신들의 통치 기구를 만들어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② 사회·경제 : 유대인들은 다양한 경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인·행상인·대금업자뿐만 아니라 농부·장인(匠人)·세리 등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특권층에서부터 노예까지 각계각층에서 유대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소아시아, 시리아 등지의 유대인들의 대다수는 가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 반(反)유대주의 : 유대인들의 생활 방식은 타민족과 다른점이 많았고, 또 유대인들은 타 문화에 동조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적대감을 받게 되었다.
④ 회당 : 유대인들이 정착하는 곳에는 유대교 회당이 제일 먼저 세워졌다. 디아스포라 전지역에 걸쳐서 이 회당은 유대인들의 생활에 깊이 관여했다. 이곳은 종교·포교·예배의 장소였다. 즉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심장부인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시고 섭리하신 복음 전파의 교두보(橋頭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