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로마지배하의 팔레스틴/마2:1

제이비젼 2014. 6. 7. 09:56


  이스라엘은 포로기 이후에 회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회하여 유일신에 대한 민족 종교를 유지해 갔다. 그러나 당시의 패권자인 로마의 세력하에 놓여 있던 팔레스틴 지역은 급속도로 헬라화의 분위기에 휩쓸려 갔으며, 유대땅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로기 이후에 계속 약소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유대나라는 이러한 헬라화의 경향을 물리칠 수 없었으며, 당시의 정치가,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파당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권력투쟁의 갈등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으므로, 민중들은 유대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희망없는 시기에 예수께서 등장하셔서 새로운 역사적 기원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의 역사상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역사를 이루어내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귀한 교훈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가장 귀한 사역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스몬 왕국의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자(B.C.67) 그의 두 아들 사이에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진격하여 시리아 셀류커스 왕조(Seleukiden)를 로마 제국에 합병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유대의 두 파벌은 경쟁적으로 폼페이우스와 영합코자 했으나 유대 백성은 양편 중 어느 쪽도 왕으로 인정치 아니하고 제사장 중심 통치권의 회복을 갈망했다.


1. 폼페이우스 예루살렘 침공


 1) 유대의 3파전

 시리아를 정복한 폼페이우스(Pompejus) 앞에 유대의 서로 다른 노선을 지향한 아리스도불루스 2세의 귀족들, 힐카누스 2세와 안디바의 재산가들, 사제정치 회복을 원하는 민중세력 등 3개 파당이 아첨하였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결단을 미루며 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다. 성급한 아리스도불로 2세의 극우파 세력이 지배권 확보를 위해 군사 행동을 취하려 하였다. 아리스도불로 2세의 군사적 조치를 의심스럽게 여긴 폼페이우스는 그를 두 아들과 함께 즉각 체포하고, 3개월간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B.C.63).


 2) 로마의 봉토가 된 유대

 폼페이우스의 공략 때 힐카누스 2세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으므로 그는 로마의 봉신으로서 통치(B.C.63-40)를 맡는 대제사장이 되었다. 봉토는 유대와 베뢰아와 갈릴리로서 하스몬 왕조 때 유다화되었던 지역이므로 헬레니즘 문화권이 아니다. 그러나 헬레니즘의 도시 문화를 복구하려는 로마 정책으로 인하여 이 지역과 함께 팔레스틴 전지역이 헬레니즘 생활권으로 잠식되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 예수, 사도들의 활동무대는 헬레니즘의 토양을 갖게 된 것이다.


2. 폼페이우스의 팔레스틴 통치


 아리스도불루스 2세의 세 부자(父子)를 로마로 압송하고, 유대와 베뢰아와 갈릴리를 힐카누스 2세에게 맡긴 폼페이우스는 침공 당시 힐카누스 2세를 지원한 안디바(Antipater)가 끌어들은 다메섹의 아레다(Aretas) 왕에 대하여서는 로마의 시리아 속주에 편입 조치하였다. 안디바는 그의 아버지가 이두매(에돔) 사람이었으며 부역자요 이두매의 총독으로 하스모네어 왕국의 알렉산더 얀네우스(본명 요나단)에게 충성하였던 자이다. 안디바는 형제간의 왕위 쟁탈권을 부추키며 시대적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적 출세를 노리는 새 인물이었으며, 나중에 왕이 된 헤롯(Herod, the Great)의 아버지이다.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틴 해안 지역의 도시들을 독립시켜 데가볼리(Decca Polis:10개의 도시동맹-마4:25; 막5:20; 막7:31)로 통합하였다. 여기에는 하스몬 왕국에 종속되었던 요단 동부의 헬라주의 도시들과 북구 다메색에서 남부 빌라델비아(오늘의 암만)에 이르기까지의 도시들이 포함된다. 사마리아도 독립시켰으므로 유대주의 제의(祭儀) 공동체로는 유대와 요단 동부 갈릴리와 베뢰아 내륙 지역이 소속하게 되었다.

 한편 시리아 주재 로마의 식민지 총독 가비니우스(Gabinius)는 팔레스틴을 5개 행정 구역으로 다시 분할하였다(B.C.57).

 로마에 잡혀갔던 아리스도불루스 2세와 두 아들이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여 정치 활동을 재개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비록 힐카누스 2세의 나약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백성이 많이 있었으나 로마는 무력으로 아리스도불루스 2세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3. 로마 제국의 권력 투쟁


 로마 제국 동부를 지배하던 폼페이우스가 시이저(Caesar)에게 살해(B.C.48)되었다. 이때 힐카누스 2세와 안디바(Antipater)가 시이저를 지원했으므로 승리자 시이저는 유대 공동체의 특권을 높이고 통치 영역을 넓혀 주었다. 힐카누스 2세에게는 로마의 작위(동맹자 大公)가 주어졌고 안디바(Antipater)는 세습적인 로마 시민권과 함께 유대 지방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이때부터 유대는 대제사장과 총독이 설 대항하는 권력으로 양립하게 된 것이다. 시이저는 성전공동체에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고 로마 제국 내의 회당공동체의 활동을 보호함으로써 이때부터 유대교는 로마 제국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이두매 사람 안디바는 상당한 재산가로서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였는데, 힐카누스 2세의 고문으로 로마점령 기간중 비공식 '재상'(Efendi B.C.63-55)이었고 시이저의 암살에 연루되어 처형될 때까지 총독(B.C.55-43)으로서 로마 정세의 변천에 따라 잘 적응하면서 유대에도 상당한 유익을 주었으나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였다. 안디바가 죽은 뒤에는 헤롯 1세와 파자엘이 땅을 다스리고 힐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4. 헤롯 왕의 지위 강화


 1) 유대 왕으로 임명

 항상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아리스도불루스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Antigonus)는 이방 유목민 파르테르와의 동맹으로 힐카누스 2세와 파자엘을 제거하였고, 헤롯이 로마로 망명하였으므로 대제사장과 유대 왕이 되었다(B.C.40-37, 하스몬 가문 최후의 왕).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서로 협력할 때에나 적대적일 때 모두 그들과 각각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헤롯 1세는 국토가 없음에도 유대 왕으로 임명받았고,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는 유대 왕의 자리를 스스로 물러났음에도 호의를 얻어 다시 유대 왕으로 확정을 받았다. 지위가 강화된 헤롯 1세는 정적을 숙청하는 반면 하스몬 왕족의 마리암네 1세(Mariamne)와 결혼함으로써 이두매 출신으로서 자기에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반감(反感)을 반감(半減)시켜 보고자 노력하기도 하였다.


 2) 예루살렘 성전 건축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 개축하여 솔로몬 왕 시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흩어진 유대인공동체(diaspora)에 대해서는 유대교의 보호자로서 회당 공동체의 자율을 부여하려고 하였다. 또 처남 아리스도불루스 3세를 대제사장에 임명하면서도 항상 축출 내지 암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아리스도불루스 3세, 부인 마리암네 1세, 그녀가 낳은 두 아들(알렉산더와 아리스도불루스)을 차례로 처치하였고, 첫 아내의 소생인 장남 안디바마저 배반자, 내란 선동자라고 정죄하고 죽었다. 그 뒤 얼마 있지 않아 그 자신도 죽었다. 베들레헴의 유아학살을 명령한 것에서도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그는 죽기 직전에 아켈라오(마2:22), 헤롯 안디바(눅9:7,8), 빌립 2세(눅3:1) 등 3명의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분할 통치하도록 유언하였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직전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가운데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도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남을 믿고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1. 셀류커스 왕조(Seleukiden)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 중 한 사람인 셀류커스가 세운 왕조. 이 왕조는 B.C.65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왕국에는 소아시아 연안에서부터 흑해에 걸쳐 그리스인 도시들과 아시아인 도시들이 많았고, 알렉산더가 새로 건설한 도시도 있었다. 민족 적으로도 그리스인을 비롯해 셈인·이란인 등 언어·생활양식·관습이 각기 다른 여러 종족이 포함되어 있었다. 셀류커스 왕조는 복잡다단한 아시아 지역을 페르시아 제국 시대처럼 25 혹은 그 이상의 사트라프랭으로 분할했다. 여기에는 장군을 파견해서 지배를 맡기되 세금을 징수하는 일은 중앙에서 직접 파견한 재무관이 맡았다. 도시에는 그리스풍의 민회(民會), 평의회 같은 자치기관이 설치되고, 그리스풍의 법률이 시행되었으며,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셀류커스 왕조는 3개의 헬레니즘 왕조 가운데 가장 광대한 아시아 지역을 차지했으며 도시 건설 사업면에서도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2. 폼페이우스(Gnaeus Pompejus Magnus B.C.106-48)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시대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아버지의 배경으로 활약한 폼페이우스는 먼저 동맹시(同盟市) 전쟁에서 아버지 휘하의 군인으로 제1보를 내딛은 후 정계에 진출하였다. B.C.67년에 콘술로서 해적을 토벌하고 동방을 평정하였다. B.C.60년에는 크라수스, 케사르와 함께 제1회 삼두정치를 실시하였고, B.C.55년에 콘술이 되었다.

 그러나 B.C.49년 원로원 보수파의 충동으로 케사르와 싸웠는데 B.C.48년 케사르에게 패배하여 도망하다가 이집트에서 암살당하였다. 그의 업적은 해적 토벌이나 미토리다데스 전쟁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로마를 괴롭혔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 헬레니즘 시대의 문화

 1) 특색 : 헬레니즘 문화는 고전 그리스 문화의 줄기를 이어 받으면서 그 성격을 달리해 나갔다. 즉 고전 그리스 문화의 폴리스적·민족적 요소를 지양해서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에 의하여 양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리스 문명의 세계화, 자연과학의 발달, 사실적 미술이나 논리학의 발전 등이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2) 다양성 :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오리엔트 두 문화의 접촉에서만 다룰 수 없다. 고전 그리스 문화는 이미 B.C.4세기부터 헬레니즘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리엔트 세계 역시 그 내부에는 독자적인 문화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리스 문화를 기초로 하는 통일성과 함께 소아시아·시리아·이집트·메소보다미아·이란 등의 다양성 있는 문화를 포괄하고 있었으며, 동방에는 그리스·인도 문화, 서방에는 로마 문화를 발생시켰다.

 3) 저항 : 헬레니즘 문화의 전파 보급이 멀리 이란·인도 지방까지 이르고 있을 때 이에 대한 저항도 생기게 되었다. 그중의 하나는 문장 스타일에 있어서 아테네 시대의 문체·어휘를 본떠 헬레니즘 어법을 배격하여 문어와 구어의 차이를 뚜렷이 하였다. 한편 오리엔트도 그 저항이 점차 표면화되어 갔다. 즉 오리엔트적 저항문학이라 할 수 있는 '묵시문학'을 낳아 그 전통이 기독교에까지 연결되었다. 이러한 저항도 헬레니즘 문화의 침투를 전제로 해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전파 : 알렉산더 대왕 및 셀류커스 왕조 초기의 셀류커스 1세와 안티오쿠스 1세 등에 의해 메소보다미아·이란·인도 변경 등에 건설된 수많은 그리스 도시는 헬레니즘 문화의 동방 전파의 발판이 되었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천문학과 페르시아의 종교를 섭취해서 이것을 서방에 보급시켰다. 한편 메가스테네스가 셀류커스 1세의 사절로 인도에 머무른 후 귀국하여 「인도지」4권을 써서 인도에 관한 귀중한 지식을 헬레니즘 로마 세계에 보급했다.

4.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B.C.63-A.D.14)

 고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B.C.27-A.D.14). 로마 제국의 창건자이자 예수가 출생하던 당시 지중해 세계의 통치자였다. 그는 B.C.43년에 안토니우스, 페피두스와 제2회 삼두정치를 실시하면서 반대파를 추방하였다. B.C.42년에는 필리피 전투에서 케사르의 암살자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삼분하여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그리고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각각 장악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를 탈락시킨 후 서로간에 대립이 심화됨에 따라 B.C.31년 안토니우스를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이후 100년에 걸친 공화정 말기의 내란의 진정자가 되었다. 질서 회복 후에는 비상대권을 원로원과 민중에게 돌려주었고, B.C.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속주를 원로원 속주와 황제 속주로 나누고 신분 질서를 수립하였으며, 풍기 숙정 및 치안과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갖고 로마시의 질서를 정비하였다. 또한 대규모의 건축사업도 일으켰으며 내정에 충실을 기함으로 41년간의 로마 시대의 평화를 구가하였으며 라틴 문학의 황금시대를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