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즉, 구원(Salvation)이 없다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 신학을 말함에 있어서 구원론(Soteriology)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을 다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작업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가장 방대한 일이기도 하다.
본서의 성격상 학문적인 방법으로 밀도 있게 구원론에 대해서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원적인 진리 구원론에 대해서 개략적이나마 사상적인 지류와 맥락을 더듬어 가며 서술하려고 한다. 한정된 지면과 자료의 미비상 심도 있는 언급이 되지 못할지라도 독자들이 이 구원론에 대해서 대략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자료적 의미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 소고를 엮는다.
제1장 구원의 본질적 요소
1) 연속적 경험으로서의 구원
역사 속에서 교회가 존재할 수 있는 근원적 근거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에게로 향함에 있다. 그리스도께 향하는 그것으로 교회는 새롭게 성장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새로운 출발을 늘 가지는데 그것은 곧 살아 계신 주이시다. 살아서 역사 속에서 존재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는 어떤 경계나 한정을 지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는 언제나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성부 하나님을 완전하고도 거룩한 사랑의 사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유대(Solidarity)는 기독교가 역사적 과정을 지나오면서 형성된 제도적 형식이나 외형적 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되고 체험되어진 구원의 경험, 즉 그리스도를 주님(대속자)으로 믿는 현장에서 경험되어지는 독특한 체험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구체적 경험은 개인적 측면에서나 역사적 측면에서나 항상 본원적인 유대(Solidarity)를 이루며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다. 그리고 이 유대는 획일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보다 풍부한 하나님 역사의 다양성을 통해서 통일성(unity)을 견지하며 교회를 존재케 하는 토대(Base)로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2) 기독교 구원 경험의 독특성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도덕주의 혹은 신비주의와는 다르다. 도덕주의에서의 구원이란 인간적인 도덕적인, 혹은 양심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고, 신비주의에서는 신과의 직접적인 합일(合一)을 통해서, 신과 인간의 동일성(同一性)을 획득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기 때문에 명상이나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구원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구원이란 전적으로 신의 능력과 신의 의지에 근거한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신의 능력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한 내재적(來世的) 개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이루는 토대로서, 구원받는 자의 그 나라와 의(Kingdom and Rishteonsness)를 궁극적 목표로 사랑의 삶을 살아 가는 것에 있다. 이 사랑의 삶은 역사와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으며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초석이 된다. 또한 이 구원은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철두 철미한 하나님의 행위적 사건으로 발생하는 구체적인 일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이 구원을 통해서 결정지어지는 삶을 영위할 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3) 기독교 구원의 국긍 목적
신·구약 성서를 비롯한 모든 성서적 문헌에서 구원은 정적(靜的)인 의미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역동성(力動性,Dynamics)과 실천적 행동을 수반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한 상태(상황)에서 다른 상태로 단순히 결정론(決定論)적인 존재 이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즉 이는 삶의 근본적인 방향의 전환이며, 그 전환은 실생활의 모습과 자태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실천적 과정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 사랑의 통치를 통해서 그 나라의 모습을 구현(具現)하여 나가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섭리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 즉 구원의 보편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감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나라의 건설을 위해서 이 세상 소에서 그의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다. 이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피조물(참조;고후5:17)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대로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제2장 구원론의 시대적 고찰
1) 유대교의 구원관
유대교에는 따로 정해진 의미의 구원관은 없다. 그들에게 구원관이 있다면 그들의 민족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메시야니즘(Messiahnism)을 들 수 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니즘은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너무도 깊이 연관이 있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역사는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쳐서 그 이후에는 항상 외세에 짓밟히고 수탈당하는 피압박의 역사였다. 이러한 그들의 의식 구조와 마음속에 싹튼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날, 즉 메시야의 날이었다. 메시야가 오시면 자신들의 굴종과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삶의 뿌리 속에 이러한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즉 유대교에 있어서 구원이란 메시야의 날이다, 이렇게 볼 때 유대교의 구원관은 다분히 현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한 동시에 상당히 종말적인 의미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종말론적인 메시야니즘(Messiahnism)은 후대에 기독교의 종말론에 영향을 준다.
2) 밀의 종교(密議宗敎)의 구원관
기독교가 선교를 시작하던 때에 그리스(Greek), 로마(Rome) 문화권에서는 새로운 종교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로마의 퇴폐적인 문화 분위기 속에서는 올림푸스(Olympus) 신들에 대한 민중들의 경외감과 종교심이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즉 전통적인 의미의 로마 종교는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길목에 있었다. 따라서 로마인을 비롯한 이 시기는 로마 제국의 종교적·정서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종교를 상당히 갈망하고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종교적 공백기를 틈타 발흥(發興)한 종교가 밀의 종교였다. 정교하고 엄숙한 제의에 염증을 느낀 당시의 사람들은 보다 원초적이며 단순한 신비 체험을 가질 수 있는 종교를 찾고 있었다. 밀의 종교와 영지주의Gnosticism) 종파들도 바로 이론 종교적 유형에 속해 있었고 이 종파들도 인간의 구원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었다. 이들은 체계화된 시민 생활과 정치적 생활 혹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일정한 카테고리(Category)를 무시하고 모든 이들의 영혼에 깊이 침투해 들어왔다. 이들의 사상은 극히 보편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반면 상당히 주관적인 체험의 세계를 강조하였다. 또한 전통주의 종교의 범주를 뛰어넘어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 심성을 자극함으로써 극도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 종교의 사상과 기독교와의 공통점, 그리고 차이점 등을 알아 보기로 하겠다.
A. 밀의 종교의 기본 사상
첫째, 하나님 혹은 신(神)은 인간의 사고(思考)에 의한 이해의 범위를 상위(上位)하는 존재로서 이 우주의 근원이다. 그러나 신은 인격이 아니며, 인간의 모든 질병과 고통의 부조리들은 영혼이 신적 본성과 합일을 이루는 지경에서 없어진다.
둘째, 이 세상은 신과 반대의 위치에 설정(設定)되어 있으며, 신은 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구체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또 이 세상은 악한 세력에 의해서 지배되어지는데 인간의 삶이란 악한 세력들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외침이 된다.
셋째, 인간은 자신 내부에 신성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정사와 권세보다도 위대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신의 본성(本性)과 물질성(物質性)을 동시에 가졌기에 숭고할 수도 있으며 비천할 수도 있다.
넷째, 인간은 자신의 무능력(無能力)으로 인해서 자신을 악한 세력에서 건져 낼 구원자가 필요하다. 이 경우 구원자는 악한 세력을 대적하는 승리자이다.
다섯째, 신이 악한 세력들을 파괴하고 승리하는 모습들을 여러 신화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공통적인 것은 승리함으로 얻어지는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상이다.
여섯째, 인간은 마음과 육체의 깊은 수련으로 인한 활홀경을 통해서 신적 본성(神的 本性)과의 일체감(一締感)을 경험한다. 따라서 이들의 제의는 강렬한 감정적·감각적 본성에 호소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철두철미한 금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극도의 절제를 요구한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밀의 종교는 일정 부분 도덕적 의미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인간의 전존재론(全存在論)적 구원을 말하는 종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B.기독교와 밀의 종교의 공통점
여기에서 공통점이란 내적인 속성이나 본질상의 공통점이 아니라 종교적 유형상(類型上)의 공통점임을 밝혀 둔다.
첫째, 두 종교가 공히 인간의 구원과 지고의 행복을 신과의 관계에서 찾는다는 사실이다.
둘째, 두 종교가 공히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신과의 분리에서 영원한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셋째, 두 종교가 인간의 본성 속에 신의 품성(品性) 즉, 신의 형상(形象)을 지녔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넷째, 두 종교 모두 종교적 경험들을 예배 의식에다 결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두 종교가 다 구원이란 신에게로의 회귀(Returning of God)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C. 기독교와 밀의 종교의 차이점
첫째, 신에 대한 개념에서 밀의 종교는 신이란 인간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여 비인격적이고 알 수 없는 신적 본성으로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의 하나님은 살아 계신 존재이며 분명한 뜻과 목적을 지닌 계시적 존재로서 인간의 역사와 생활 속에서 인격적으로 운동하시는 사랑의 존재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자신의 낮아짐(Incarnation)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다.
둘째, 인간의 재난에 대해서 밀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재난이 세상 안에 있는 악한 세력으로 인해서 온다고 보는 데 반해서 기독교에서는 거룩하신 존재인 하나님과의 분리 즉 죄에서 온다고 보고 있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셋째, 인간의 품성을 말함에 있어서 밀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존엄한 육체 안에 있는 참 불꽃이라고 말하는 데 반해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속성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으며 비록 죄로 말미암아 그것은 파괴되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으로 회복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넷째, 구원자에 대하여 밀의 종교에서는 구원자란 신화적(神話的)인 존재이며 초인적으로 그의 행사(역사)는 초인간적인 영역의 노력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그의 세계의 성수한 것으로 보는 것에 반하여 기독교의 구원자는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인간으로 순수한 인간적인 경험을 가지시고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인간 구원에 있어서 복음이 되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인류 구원의 복음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구체적인 사건, 즉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한 방법만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원의 방법이란 측면에서도 차이를 갖는다. 밀의 종교에서는 그 속에서 고통을 직접적으로 당하다가 죽는 실제적 죽음을 통해서가 아닌 것을 이야기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이간이신 예수의 실질적인 죽음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밀의 종교에서는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중보자가 없으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중보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측면에서도 밀의 종교는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합일이 구원의 방법론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 즉 신앙을 인하여서 구원에 이른다.
여섯째, 구원의 내용과 그 범위에서의 차이이다. 밀의 종교에서는 감각적 세계로부터의 도피이고 악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며 나아가서는 일체(一體)를 이루는 일임에 반하여 기독교의 구원이란 역사적 진실과 윤리적 가치의 정절인 것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이고 그것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으로 구체적인 체현을 이룬다. 그 리고 구원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으로서 인간의 실질적 삶 속에 이루려고 의도하고 섭리하셨던 것의 점진적인 과정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한마디로 기독교의 구원이란 개인적인 실존(實存)의 문제일 뿐 아니라 역사적이고 나아가서는 종말론적인 전존재적(全存在的) 차원의 일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밀의 종교와 기독교와의 유형적 공통점 및 내적(內的)인 상이점을 통하여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총괄적인 평가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전파자들은 그 진리의 전파와 확산을 위해서 당연히 그 당시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표현하는 양식이라든지 사상의 형식을 인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종교의 종교적 메시지까지 빌려 오지는 않았으며, 모방하지도 않았다. 기독교 인간의 전체적 상황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메시지, 그리고 경험들은 밀의 종교의 그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관심사는 인간 삶에 있어서 총체적인 방향의 올바른 설정임과 동시에 윤리적이고도 역사적인 진리의 추구 속에 하나님 나라, 하나님 사랑의 체현인 것임에 반하여 밀의 종교는 단순한 존재 이전적(移轉的)인 의미로서 상태의 변화, 즉 악마적인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
3) 그리이스 철학에서의 인간 구원론
A. 플라톤(Platon)의 동굴의 비유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제 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진리(眞理)와 현상(現象)에 관한 자기의 사상, 참 존재로 이르는 길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다. 이 동굴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인간들은 감옥에 갇혀 있는 자와 같다. 우리들은 땅 밑에 있는 동굴 안에 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의자에 붙들어 매여 있어서, 뒤돌아 볼 수도 없으며 항상 출입구와 맞서 있는 벽밖에 볼 수가 없다. 이 갇혀 있는 자의 뒤쪽, 즉 입구 쪽에 동굴을 가로질러 사람 키 만한 벽이 있고 그 뒤에서 불이 타고 있다. 그런데 이 불과 벽 사이를 인간들이 지나다닐 때는 이 벽보다 높은 사람의 모습과 형체의 불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동굴의 벽에 비취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의 울림도 갇혀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리게 된다. 이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림자와 울임 이외에 다른 것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런 그림자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들이 뒤를 돌아 볼 수 있다면,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면 새로운 현실에 깜짝 놀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이 동굴에서 빠져나와 태양 광선, 인간, 살아 있는 진짜 사물들을 보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현실로 인해서 눈이 부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동굴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이 참된 현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참된 세계의 빛으로 인도해 주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들을 가상(假想)의 세계와 비유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참된 존재에로 인도해 주는 것이 구원이고 이 작업은 철학자가 해야 할 과업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동굴 속의 그림자의 존재는 물리적-실재적인 세계의 시·공간적(時空間的)인 바탕을 두고 있고 이 시·공간적인 존재는 다시 관념적(觀念的)인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념적인 존재는 절대자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구원이란 참 존재로 나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물질의 세계에서 관념의 세계로, 현상의 세계에서 초월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상은 초대 교회 시대 때 영지주의를 비롯한 밀의 종교, 그리고 기독의 초기 사상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었다.
B. 스토아 학파의 사상
스토아 학파의 사상가들은 철저한 윤리지상주의(倫理地上主義), 즉 절대론적 윤리론자들이다. 그리고 우주와 인간 삶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생각들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원론을 극복하였고 우주의 원리, 삶의 원리를 도출하는데 있어서 로고스(lsgo")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우주는 신적인 섭리의 작용, 즉 우주 생명의 지속적인 동원력을 보여 준다. 또한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 즉 절대자 안에 거하며 운동하고 존속·유지된다. 특별히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의 차원을 넘어서서 로고스를 그 자신이 참 자아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보유한다. 인간은 그 스스로를 우주의 원리의 자생적(自生的)인 한 지체로 화(化)할 수 있다. 즉 인간은 그의 존재적 모습의 단순한 개체성이 분리적 측면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이기적인 노력을 단절시킴으로써 그 자신이 모든 전체 인류를 포함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임을 확인한다. 인간 스스로가 그를 둘러 싸고 있는 환경의 단순한 외형성과 우유부단함을 탈피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깊은 개체적 존재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깊은 앎으로부터 그는 실로 정신적 보편성을 견지하게 되며 가장 근본적인 의미로서의 폭넓은 박애 정신을 토대로 해서 살아나가게 된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 즉 우주 속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받아들이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여기서 어떠한 외적인 환경적 요인에서도 허물어지지 않는 완전한 의미의 자아 정체성(自我停滯性)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에게 그가 무엇인가를 자각케 하며 그 자각한 내용을 삶의 실질적 의지로 채택케 한다. 동시에 그 의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일치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우주적 이성, 즉 로고스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의 삶이란 적극적인 면에서 보편성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불합리한 것에 대한 항거로써 대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억제하고 금욕할 수는 있으나 건설할 수는 없고 선언할 수는 있으나 창조력을 가지고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사상은 아니다. 그 속에는 개인과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 역동적 힘(Dynamics)이 결여되어 있다. 결국 그들은 세상에서, 삶에 대해서 금욕적인 염세주의(厭世主義)가 될 수밖에 없다.
C. 필로의 구원 사상
필로에게 있어서 신은 철두 철미하게 초월자로 존재하는 분이다. 그는 신인동형론(Anthromorphism)을 배격하고 아무런 것에도 제약받을 수 없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주장한다. 유한한 것들, 즉 피조계와 하나님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고 인간의 사고로는 따라 잡을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자족하시며 어떠한 유한한 존재와도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분이시다. 이러한 신 이해의 선상에서는 하나님과 유한한 세계 사이에 반드시 중재자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 피조계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그의 본질은 이 세계와 직접적인 접촉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영역 속에 있으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구별되어 있는 방법을 통해서 세상을 다스렸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방법은 의인화된 인격적 신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였다. 필로는 이러한 중재적 개념들은 오직 하나의 중재자 즉 로고스에게 집중시켰다. 필로에게는 로고스가 하나님과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로고스가 없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있을 수 없고 하나님과 피조계의 관계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로고스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사제이다. 그리고 실제로 로고스는 관념의 작용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현실로써 실현되어졌다. 신약 시대의 성서에 있는 로고스는 하나님에 의하여 투영된 그림자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나타내는 중재자인 것이다. 신약의 로고스는 애매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요1:14).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중을 분명하게 계시하신 역사적 경험으로서의 중재자이다. 필로에 의하면, 이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을 영혼의 감옥인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유한한 것에 사로잡혀 있기에 영혼은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한한 육체로부터의 해방인 구원을 도덕적 훈련, 명상, 황홀경 이 세 가지의 관계를 거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필로의 구원관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필로의 구원론에 역사적인 구속의 개념, 즉 죄에서 해방되는 근원적인 구원의 도리가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로고스는 해방을 가져다 주는 마지막 단계에서 소멸되기까지 한다. 즉 필로의 구원관은 신앙의 요소가 없으며 용서와 화해 그리고 화평의 복음이 없다.
D. 플로티누스의 구원 사상
플로티누스의 하나님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전통적으로 신비주의에서의 영혼 구원은 진리와 실재의 근원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는 인간의 비약이었고 그것은 현상의 실존을 초월하는 일을 반드시 수반하다. 플로티누스는 이원론자들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인 금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정결함을 얻게 된다.
둘째, 명상이다. 이 명상을 통하여 모든 모순들을 잊게 되며 자아와 하나님의 일체감을 가짐으로 구원에 이른다.
셋째, 황홀경의 상태이다. 이것은 육신적인 불균형 상태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상태로서, 이 지경 속에서 온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집중시키면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에 넘치는 순간으로서, 그 속에서 신과 만나고 현세에 속한 모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의 사물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세상의 도리로 생각지 않는 단독자(單獨者)로서 신에게 귀의(歸依)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이 상태는 인간이 성취하고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이다. A.D.3세기경 기독교는 이러한 신비주의적 요소들의 영향을 적지않이 받았다. 근본적인 구원 개념과 삽자가 사건 등은 아니더라도 종교적 경건 생활 면에 있어서는 이러한 유파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실제로 그 당시 교회는 바울의 사상보다도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더 많이 논의하고 있었다.
4) 헬라 신학의 구원 사상
바울 서신을 비롯한 히브리서와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헬라 사상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복음을 위하여 그 사상을 이용했던 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헬라 사상의 형식을 이용하여 당시 헬라 문화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헬라 철학의 실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전파하였다. 즉 그들은 헬라 문화의 형식 속에다가 기독교의 진리를 대변하였다. 당시 그들이 전하는 말의 내용은 언어상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헬라 사상적인 요인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초기 신약 시대를 지나서 계속 성장해 온 기독교는 그 양상을 달리했다. 교회의 교리가 발전하고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태동하면서부터 그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와 헬라 철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신학을 헬라화하려는 경향을 더 많이 소지하고 있었다. 헬라적 사고 형식과 히브리적 사고 내용의 절충을 넘어선 신학적 사조가 태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기독교 진리 자체를 헬라화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을 해설하고 변증하려는 데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 때부터 기독교 신학, 특히 구원관은 헬라의 철학적 성향을 다분히 반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필로와 플로티누스에게서 있었던 사상들이 헬라 신학자들에게도 사상적으로 함유되어 있었다.
헬라의 교부들은 헬라 철학이 가지고 있는 절대자 개념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어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해석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신앙은 형이상학적인 틀 속에 규정지워진 신지식(新知識)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신학은 세상과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철저치 이원론적이었다. 이 형이상학적 하나님 개념은 성서에로의 복귀 운동이 일어나던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잔재가 널려 있다. 헬라 신학이 말하는 구원 사상은 다음과 같은 틀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A. 헬라 신학에서의 인간 그리고 죄
헬라 사상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은 내면적으로 신의 영역에 속하며 플로티누스의 말대로 인간 개개인의 영혼들은 세계 정신에 속하여 그 근본을 세계 정신과 하나이다. 그들은 이 사상을 기독교에 적용시켜서 모든 인간의 영혼들은 신적으로 간주하지만 영혼이 신적 본질과 하나를 이루는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하였다고 말한다. 초대 교부 로이게네스(Origenus)는 영혼선재설(靈魂先在設)을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의 플라톤주의 사상과 거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에서는 영혼의 타락이라는 사상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을뿐더러 설명할 수도 없었다. 단지 이들이 말하는 영혼의 타락이란 그들의 사상을 위한 하나의 도식적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타락이란 영혼이 물질적 세계로 유입되는 것을 말할 뿐이다.
B. 헬라 신학의 구원과 그 과정
물질적 영역 속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가 원래 속해 있던 영역인 영혼 세계에로의 복귀이다. 플라톤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물질(物質)은 비존재(非存在)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물질적 상태에 타락해 있는 인간은 영혼의 상승으로 변화해야 되고 그 과정은 반드시 일종의 신격화(Deification)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신격화가 인간에 구현되면 그것은 지고(至高)의 선, 혹은 행복으로 간주되었고 이것은 구원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헬라 신학의 구원에는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 사랑으로 화해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인 문제, 그리고 새로운 관계 위에 세워지는 새 방향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견해도 갖고 있지 않다. 단지 물리적 차원에 머무는 인간을 하나님과 같은 차원으로 존재 이전(存在 移轉)하는 것이 구원이었다. 그런데 아니러니하게도 헬라 신학에서는 성육신을 중요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육신 사상과 그 의미를 그들이 갖고 있는 신학적 존재로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이레네우스(Ireneus)가 이야기하듯 이들의 성육신은 신적 존재 양식을 현실화시킨 것이고, 이러한 현실화는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본래적 계획었다. 그로 인해서 인간이 신적 양식 속에 흡수되고 신격화된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관심 역시 인간의 구원이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구원 개념과 수단은 헬라적이라 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구속의 참 의미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찾지만 그 의미는 성서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물질적 차원의 인간에게 주어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극복일 뿐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 즉 인간의 신격화 과정을 위해서 하나의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결합이었고 이 결합은 신적 존재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한 것에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 그리스도에게 위탁하고, 전적으로 자기 존재를 의지하는 엄밀한 의미의 신앙적 과정이 삭제되었다. 헬라 신학에서의 하나됨은 전능적인 그리스 종교 속에 타나나는 신비주의적인 신과의 일체를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참여로서의 연합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신과 동일한 차원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라틴 신학의 구원 사상
라틴 신학은 헬라 신학과는 다른 방향에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독교를 형성하여 나갔다.기독교에 대한 이들의 해석과 변증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고 사회적이었다. 헬라 신학이 헬라 철학에 의해서 세워졌다면 라틴 신학은 로마 제국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학의 삶의 자리는 로마 제국적 관념과 사상이었다. 라틴 신학에서는 신의 개념을 헬라 신학으로부터 아무런 수정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여기에다가 황제 중심 사상을 곁들여 체계화하였다. 즉 라틴 신학에서의 하나님(절대자)은 전우주의 대 황제격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언어상의 표현이 아니라 이 당시 신학의 지배적인 원리였다. 이 원리의 필연적인 귀결로 내려진 결론들이 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이한 것은 라틴 신학에서의 하나님 문제는 존재(存在)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意志)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의지는 절대적 주권을 가진 통치권자의 의지이다. 이 통치의 의지는 로마의 황제 사상에 기인하였는데 가장 선정을 베풀었던 황제가 그의 광대한 영토를 다스림같이 우주의 황제인 하나님도 그의 백성들을 잘 통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지의 엄청난 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러한 힘이 실질적으로 구사되어지는 구체적인 영토요 현장이다. 오직 로마 제국의 영역 안에서 안전된 평화가 있듯이 교회 안에서만이 악의 세력과 비극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도성의 두터운 벽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멸망시킬 악에서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 그들의 종교는 공포로부터의 종교이고 구원은 이 모든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공포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라는 조직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이 시대의 구원은 교회적 구원이었다.
라틴 신학을 집대성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으로 그의 위대함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다. 어거스틴의 사상을 보면 네 부류의 큰 영향들이 혼합되어 있음을 알 수 수 있다. ①바울 사상의 깊은 영향 ②성서의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 ③신플라톤주의의 영향④교회의 권위(로마제국주의)
이와 같은 복합적인 영향 속에서 세워진 신학 체계는 라틴 신학의 핵심을 이루었다. 특히 바울 사상에 대한 깊은 공감과 어거스틴의 체험에서부터 복음주의적 체험과 그 신학이 흘러나온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구원과 그것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신학적 전통은 어거스틴에게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고, 어거스틴에서 바울, 바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소급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러한 전통이 헬라적 이원론(二元論)와 로마 제국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된다면 그것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A. 라틴 신학의 개념
라틴 신학의 신 개념은 헬라 철학과 로마의 종교에서 유래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은 헬라적인 의미에서 절대자이고, 로마적 의미에서 의지(절대 의지)의 소유자이다. 이 하나님은 인간 지식의 한계를 넘어 계시고 유일한 실재이시다. 여기서 역사는 하나님의 불변 의지가 시간적인 영역 속에 옮겨지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예정도 외부로부터 와서 기독교인의 경험에 부여된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헬라적 개념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한다는 신약성서의 신앙인들 말은 헬라나 라틴적 사상 범주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다.
B. 라틴 신학의 죄
라틴 신학에서의 죄는 플라톤으로까지 소급되는 헬라 사상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어거스틴은 죄에 대한 책임성을 철저히 인식했다. 그러나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주관주의(主觀主義)적 경향은 그로 하여금 죄를 질병, 추함, 도덕적 무기력이라는 관점으로 보게 하였다. 그리고 죄를 육체적인 것에다가 연결시키고 특히 음욕(淫慾)에다가 엄청난 무게를 두었다. 그에 의하면 죄로부터의 구원은 해방이고 그것은 삶의 힘으로 해석되어진다. 그가 실로 문제 삼은 것은 죄의 노예가 해방되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상태에서 맛볼 수 있는 자유의 지경으로의 이르름에 대한 방법이었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관점에서 죄와 구원을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C. 교회 중심적 구원관
라틴의 교회는 구원의 집이다. 모든 구원하고 해방하는 능력은 교회를 통하여 가능해진다. 로마의 황제 사상에서 기인된 하나님의 개념과 그 속에서 새롭게 배태된 교회 중심주의(敎會 中心主義)는 교회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계획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대변하는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거룩하시고 지엄한 하나님의 은총은 교회를 통하여 신앙하는 자기 위탁(自己委託)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구원의 길을 가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말대로 그리스도를 간과한 교회가 어떻게 구원이 문이 될 수 있겠는가!
6) 중세 교회의 구원 사상
A. 중세 교회의 하나님
중세 교회의 구원론을 지배한 하나님의 관념은 우리가 라틴 신학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 절대주의 관념이 다분히 혼재된 존재, 또는 본질에 대한 추상적 존재이다. 그 하나님의 한 요소는 하나님의 초월적 본성이고 또 다른 하남의 속성은 로마적 절대 군주의 의지이다. 이런 속성을 지닌 하나님은 그의 세계 밖에 서 계시며 그 세계는 전적으로 그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한편 그 세계 내에서 발생되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늘 남겨져 있다. 또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제국의 백성과 전능한 군주의 관계와도 같다.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영토 내에의 일들을 조정해 나가심에 있어서 그의 절대적인 의지 외에는 어떤 다른 동기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으신다. 이 절대 의지의 하나님은 법을 통하여서 말씀하시는데 그 법은 교회에서 구체적인 효력을 발생한다.
B. 중세의 교회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성도들간에 나누는 공동체였다. 그러나 중세기의 교회는 법적인 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다루고 고도의 중앙 집권(中央執權)적인 정부에 의해서 사람들을 통치한 정치적 조직체였다. 당시의 교회는 고대의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보존해야만 했다. 또 한편으로 교회는 야만인들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고, 제국의 무너진 성벽들을 치고 들어오는 미개한 민족들을 진정시켜야만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뜻에 복종하게끔 해야 했다. 그리고 교회는 개인 영혼의 구원을 위한 중보자의 기능을 떠맡았다. 중세 교회에 의해서 형성되어진 구원의 방법은 성서의 개념들을 완전히 전이시켜서 사용한다. 성서의 공동체에서 개인은 그의 고립된 상태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사는 유기적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자기의 일을 발견하고 삶을 엮어 나간다. 한편 중세의 교회는 구원의 기관이었다. 이 기관의 조직적인 체계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기독교인이 되며 죄인들은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있으며, 성인(聖人)의 지위까지 얻는다. 중세의 교회는 항상 신적인 권위로 개인 위에 있으며 개인의 구원 문제를 가지고 영향력을 끼친다. 신약 시대의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순종시키도록 촉구하지만 중세 교회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도록 가르친다.
C. 중세 교회의 구원
신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자기의 죄를 시인하여 주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중세 교회에서의 구원은 정치적인 지배와 율법적인 계율에 의한 구원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사랑과 소망에 의한 내적인 것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이고 중세 교회에서는 힘과 공포에 의해서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구원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서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무거운 짐을 질 수 있고 온전한 교제를 통해서 인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모을 수 있는 신앙의 성장된 결과요,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 힘으로 보았다. 반면에 중세 교회에서는 헬라의 철학적 이원론(二元論)과 로마 제국주의(帝國主義)에 근거하였으며 멀리 있으면서 당신의 지상의 대표자인 교회의 힘을 통해 통치하고 지배하고 복종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중세 교회는 신약성서의 전통과 모습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참 교회의 모습이라곤 그 어느 한 구석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세속화되고 부패한 지도적 교회이었고, 이 교회가 내세우는 구원은 기실 구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상품이었다.
7) 종교 개혁(宗敎改革) 신학의 구원 사상과 그 이후의 사상들
A. 성서 신앙으로의 복귀
종교개혁(宗敎改革)은 중세의 부패하고 거짓된 교회를 정화하고 그것에서 모든 이방적인 신화들을 제거하여 교회의 신학에서 특별한 부분들을 성서에 맞추어 수정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종교개혁은 하나의 지적(知的)인 혹은 윤리적(倫理的)인 요구 이상의 또 다른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것은 성서에로의 복귀였다.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은 기독교인들의 의식에서 늘 희구하는 원시(原始) 기독교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의 일어섬이었다. 경건한 체험과 함께 복음서들을 그 경전(經典)으로 삼으며 살아 계신 주님이신 역사적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삼고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그 중심 교리(中心敎理)로 삼았다. 이것은 그에게로 만인이 직접 나아감과 그를 닮으려는 노력을 경전의 모티브(motive)로 삼는 일정의 신앙 운동이었다.
중세 교회의 절대성이 무너지자 개혁주의 신앙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고 구시대의 파괴적인 탄압 속에서도 살아 있었던 원형의 기독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 신앙은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역사와 인간의 체험의 길을 향한 환원이었다. 성서 속의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삶의 통일성'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한 개인이 이 통일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 즉 그가 전체 안에 그냥 흡수되지 않고 거짓된 분리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이 그 전체성 안에서 인정을 받고 또 자기의 완전한 인격의 구체적 보장을 받을 때 그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B. 중세적 사고(中世的 思考)의 연속
조직 신학의 측면에서 종교개혁시대의 전통적인 교의(敎義)를 형성하였던 두 지류를 들 수 있다. 루터교는 헬라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고, 칼빈주의는 라틴 계열의 신학적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교의 사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신비적인 연합, 그리스도의 인격 이론(人格 理論)으로서의 속성적 교통이나,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 교리 및 헬라 신학의 맥락에서 연유되어진 모든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주의에서 우리는 로마의 제국주의의 형식적 틀 속에서 인식되었던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러한 골간이 되는 관념을 토대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조직 신학이 만들어졌다. 또 이러한 맥락에 따라서 교회에 대한 생각도 새롭게 정리되었다. 교회는 하나의 독립된 제국과 같은 단체이고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고 대권을 대표하였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침략이나 핍박에 대해서는 굳세게 항거하며 권리주장을 분명하게 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단순히 지지를 받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모든 일에 있어서는 교회가 국가에게 지도와 통제를 가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교회에 대한 혁신(革新)적 생각을 새 시대 속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C. 중세 교리의 해체
종교개혁 시기에 과거의 교의(敎義)적, 교조(敎條)적 신학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특히 헬라 신학과 라틴 신학에 정면으로 반대해서 일어난 몇 개의 신학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경건주의
경건주의는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한 평가 기준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인간의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니는 위엄과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자유민이 누리는 위엄을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경건주의는 교의에 대해서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교의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가치를 평가한다. 즉 교의는 신자 개인의 내적인 생활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 경건주의에 있어서 교의에 대한 입장은 종교 개혁자들이 갖고 있던 사상가들과는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의 체계화를 부정(否定)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식적으로 그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교의의 체계 자체를 무시했고 그들의 실제적인 신학적 주요 작업은 '회심(Conversion)과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 관련지어 이뤄졌다.
② 신비주의
한쪽에서는 신비주의자들이 일어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에 맞선다. 신비주의자들을 선택된 영혼으로 하여금 제도화(制度化)된 기독교로부터 이탈해서 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초정한다. 이들 중에 가장 강력한 영적 개인주의자는 퀘이커였다. 스코틀랜드 사람 바클레이(Bacray)는 퀘이커파의 유능한 사상가였다. 바클레이는 지주였는데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칼빈주의를 자기가 보기에는 흑암에 불과하다고 믿고 반대하고 나선다. 바클레이는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의 구원의 근거를 삼는 객관적 근거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역사적 사실과 평행선에 서서 내적인 신비를 위치시켰다.
D. 종교개혁 이후의 새로운 사조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특히 강조하는 비평적 관점의 여러 학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서의 비평학적인 연구를 성서 연구의 방법론으로 삼았고, 기독교를 윤리적 관점에서 혹은 종교 사학(宗敎史學)적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사조에 따라서 지식에 의한 구원(합리주의), 감정에 의한 구원, 의지의 힘에 의한 구원, 과정에 의한 구원, 역사적 구속에 의한 구원 등을 주장한다.
제3장 구원에 관한 학설들
1)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삶의 모든 것들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또 칼빈은 인간을 말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나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인간성은 부패했다고 한다. 이 부패한 죄의 심성(心性)은 오직 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구원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함을 말한다. 이러한 골자를 가지고 칼빈의 구원론을 구원 서정의 측면에서 비평적으로 보려 한다.
칼빈은 구원 서정(救援 抒情)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배열하는 일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그 배열에 있어서 명확하지는 못하였다. 칼빈은 구원 서정을 논함에 있어서 구원적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목 아래에서 소명을 다루어 복음 전도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하고 다음에 신앙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논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그의 기독교 강요(基督敎 講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할 사실은 칼빈이 신앙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고 해서 결코 알미니안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행위를 선행시키는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칼빈은 신앙을 중생보다 선행(先行)시켰지만 그 신앙을 인간의 행위로 보지 않고 성령의 역사로 말하고 있다. 또 한편 중생이 신앙 뒤에 오게 된 것은 칼빈이 말하는 그 의미가 매우 넒은 것이어서 회심, 성화, 신앙적 투쟁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다음에 그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다루고 그 다음에는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예정을 다루고, 마지막에는 영생을 향한 부활을 다룬다. 그러므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있는 구원 서정을 요약하면 ①신앙과 소명 ②중생(회심, 성화, 신앙적 투쟁) ③칭의 ④예정 ⑤부활이 된다.
칼빈은 구원의 혜택이 우리 인간에게 적용되는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논리성(論理性)이 미약하고 안정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관하여 훅스마(H. Hoeksema) 교수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이 이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 이유는 칼빈이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잠재 의식(潛在意識) 속의 변화와 의식 가운데 일으키는 변화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칼빈은 모든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객관적 사역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관적 사역을 충분히 구분하지 아니한 때문에 성화가 칭의보다 앞서는 이상한 순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교수는 말하기를 '칼빈의 구원 서정론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인간의 활동면에 치중하여 주관적인 경향을 면치 못하였다'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뻘 코프(Ber kouwer) 교수는 이와 반대로 '칼빈은 구원 서정론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관심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치중하고 신앙하는 사람에게 두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의 약속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신앙은 성령이 우리 안에역사하시는 현상이라는 입장이 칼빈의 구원 서정 전반에 걸친 일관된 원리이다. 그는 먼저 은혜의 주관성을 파괴하는 주장들을 거론하고 정리한 후에야 그리스인의 생활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고 논평하였다.
2) 루터교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전기(傳記) 등 여러 가지 교리들을 인정하나 그것들로 출발점을 삼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들의 마음과 생활에 구속의 주관적 적용은 신적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구원의 서정을 묘사함에 있어서 강조를 하나님의 역사보다도 인간의 행하는 바에 역점을 둔다. 신앙, 즉 사람의 등장으로서의 신앙이 그들의 구원 순서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루터파의 구원 서정은 ①소명 ②조명 ③회식 ④중생 및 신앙 ⑤칭의 ⑥신비적 연합 ⑦갱신 ⑧보존 등이 된다.
루터파의 구원 서정을 보면 회심이 중생보다 앞에 오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구속의 적용에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노력을 앞세우는 표현이며, 이런 순서는 곧 그들의 구원관이 보편적 속죄 교리(普遍的 贖罪 敎理)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보편 속죄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만인의 원죄가 사하여졌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에 자초하다 보니 인간은 중생 전에 어느 정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알미니안
알미니안 구원 교리는 표면상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인간의 행위와 태도 여하에 중점을 두고 있다. 원시적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1610년, 다음과 같은 훌륭한 주장을 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선(善)을 시작케 하여 지속케 하고 성취케 하신다. 중생한 사람까지도 성령이 도우시고 협조하시는 역사 없이는 선행(善行)이나 모든 유혹에 대한 저항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최근의 웨슬리안 메소디스트파(감리교)의 대변인인 메트(Metz)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로 존재해야 하고 또 구원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를 성취하고자 하시는 인간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우선 예지 예정(豫知 豫定)의 기초 위에 구원론을 세운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모든 근원적 은혜의 원천이라고 옳게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의 신앙과 순종을 예견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서 인간 협동설(人間 協動設)을 여지케 한다.
② 보편속죄 교리를 바탕으로 구원론을 전개한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에 의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고 따라서 모든 사람의 원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사하여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원죄가 사하여진 고로 모든 사람을 '은혜로 회복한 능력' 가운데서 태어나기 때문에 성령과 협력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편속죄 교리가 구원론에 미치는 영향은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보다는 그 은혜에 협조하는 인간의 행위 또는 태도 여하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③구원적 은혜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한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인간의 믿음을 지속시켜 주고, 점차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든지 상실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오늘날 신앙으로 구원이 확실시된다 할지라도 내일의 구원은 전혀 보장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구원은 신앙을 유지하는 한도에서만 보장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