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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와 쓰러지는 현상

제이비젼 2017. 9. 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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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지는현상⑨] 마틴 로이드-존스와 쓰러지는 현상
편집부  |  gloriatime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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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4.30  0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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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와 쓰러지는 현상

  
▲ 로이드 존스 목사는 『부흥』에서 쓰러지는 현상을 적극 변호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Martin Lloyd-Jones, 1899~1981)는 20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며, 자타가 공인하는 개혁주의자이자 청교도주의자이다.

그는 19세기 말에 일어난 웨일즈 지방의 영적부흥 1백 주년 기념 설교집 『부흥』(Martin Lloyd-Jones, "Ch. 11. The Effects of Revival." Revival, Crossway Books, 1988, 132-147)에서 생소한 영적인 현상인 쓰러지는 현상을 변호한다.

 

그에 의하면, 영적인 부흥은 먼저 교회를 각성시키고 그 다음에는 바깥 세상의 관심을 끌어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의 축복이 바깥으로 폭포수처럼 흘러 넘쳐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흘러 넘쳐 나가는가?

그의 견해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부흥은 언제나 기존 세대들에게 도전을 주어왔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처럼 그들은 “다 놀라며 의혹하여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12절)하고 반문한다. 이들이 놀라는 주된 이유는 부흥운동에 자주 동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 때문이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부흥으로 인해 방언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새 술에 너무나 취해있었기 때문에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며 술 취했다고 말했다(13절).

교회사를 살펴 볼 때 부흥에 부수되는 현상에 대한 오해나 편견으로 부흥 자체를 기각하는 오류가 계속 반복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부흥에 수반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첫째 부흥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나(로이드 존스)는 감정적인 요소가 없는 부흥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대단히 감동되고 다른 사람들은 대단히 흥분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두 번째 가장 오해를 받아 온 현상이 있는데 이 때문에 부흥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있어왔다.
이러한 현상들은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각성하고 회심되고 교회가 새로운 힘을 얻은 것 외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현상들은 부흥기에 반드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러한 현상들은 부흥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즉 이런 현상들이 없는 부흥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부흥이 일어날 때에는 자주 동반되는 현상들이다.

그러면 이런 현상들은 무엇인가?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먼저,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다.

강력한 능력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죄의 책망하는 능력에 압도되어 바닥에 쓰러지거나 의식을 잃거나, 상당한 기간, 무의식 상태에 있기도 한다.

1859년 북아일랜드 지방의 부흥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 때, 마치 사람들이 무엇에 두드려 맞아서 쓰러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두드려 맞았다”(struck)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현상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일어났다. 또한, “무아의 경지”(trances)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좌석에 앉거나 서서 멀리 보는 것 같은데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빠져있거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1859년의 북아일랜드의 부흥기간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더 나아가서 심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 있다.

특히 부흥기에는 말씀의 은사(gift of speech)가 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기도 모임에서 더듬거리며 기도하던 사람이 갑자기 유창하고 낭랑한 어조로 기도하는 것을 본다. 말씀의 은사는 기도나 대화나 무엇을 설명을 할 때 두드러진다.

이뿐만 아니라 예언의 은사(gift of prophecy)도 주어진다. 문자 그대로 앞날의 일을 예언하는 은사를 말한다. 우리들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지식과 학문으로 성령을 소멸시키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위험에 빠지기 쉽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의 관심을 유발시키는 주요한 현상들―신체적이고 심리적인 현상들―이 있다. 부흥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자주 일어난다. 이런 현상들이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현상들 때문에 부흥 전체를 기각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체적인 현상에 대한 이해

오늘날 특히 이러한 현상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나도 특별히 염려하는 바다.

과연 이런 현상들에 대해 완전한 대답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세뇌공작’(brainwashing)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나 히틀러가 사상교육을 시키기 위해 사용한 기술과 비교하다. 이 방법은 사람들에게 어떤 사상을 집중적으로 투입시켜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다. 세뇌공작을 받는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감방 같은 곳에 기거하며, 잠과 식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훈련을 받는다. 피교육자들의 마음이 절망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더욱 심하게 교육을 시킨다.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하고 또한 행해지고 있다. 부흥 기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점은 부흥 집회와 전도 대회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 집회 중에는 부흥사들이 기술을 교묘하게 사용하지만 부흥 집회에서는 기술이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흥이나 그에 부수하여 일어나는 현상들이 “세뇌공작”이라는 주장은 부흥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예를 들어, 북 아일랜드의 부흥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미국의 부흥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사상을 집중적으로 투입시킨 적은 전혀 없다. 이들 한 사람이 거듭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더군다나 부흥은 여러 나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백년 전에도 그랬고 2백년 전에도 그랬다. 왜 서로 교류가 없는 다른 나라들에서 부흥이 동시에 일어났는가? 세뇌 공작설은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책을 보고 선진들의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부흥은 오지 않은 경우가 많다.

 세뇌 공작설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그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세뇌 공작설은 부흥기간 중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도저히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집단 히스테리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흥집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때로는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주장의 오류는 세뇌 공작설과 같이 부흥의 기원과 시작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백년 전에 살았던 북 아일랜드 지방에 거주했던 닥터 카슨은 기독교 메디컬 닥터이다. 그는 부흥기간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그는 부흥의 여러 현상들을 분석한 결과 집단 히스테리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미국 제1차 영적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 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관찰자는 드물 것이다. 그는 2백년 전의 부흥기간 중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들을 예리하게 관찰했다.(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 기간 중에 회심했으며 프린스톤 신학교의 초대학장을 역임한) 알렉산더 아키볼드도 이러한 현상들을 목격했다. 이들 모두 그런 현상들이 집단 히스테리라고 한 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열매를 보자. 히스테리의 결과는 참혹하다. 그러나 부흥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사랑을 만끽한다.

 -셋째 사이킥(psychic) 현상으로 설명하는 방법이다.

사이킥이란 생각을 읽고 마음을 읽는 텔레파시(telepathy)같은 것이다. 최면술 같은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타고 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소위 말하는 부흥집회 때에 최면술에 의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전에는 이런 능력이 없던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최면하는 능력이 나타날까? 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흥집회에서 일어나듯, 동시에 최면 능력이 나타나는가?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부흥의 결과 나타나는 영적인 열매를 살펴보아야 한다.

-넷째 마귀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천주 교회는 1백년 전에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했다. 이런 일은 유니테리언들(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단종파)이 자주 하는 주장이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하는 주장이다.

그러면 왜 마귀들이 갑자기 이런 일을 시작하는가?
마귀가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는가?
왜 마귀가 냉랭하고 메마른 교회에 생명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게 하는 짓을 하는가?

부흥의 주된 열매는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진정한 신자들이 되는 것이다. 부흥의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일에 헌신하고 놀랄만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한다. 부흥 자체가 마귀를 물리치고 있다. 이러한 일을 마귀가 한다면 천하에 마귀처럼 어리석은 존재가 어디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틀린 설명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바른 설명은 어떤 것인가?

“다 놀라며 의혹하여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2-15).

이런 현상들은 마귀의 장난이나 심리적이 현상이 아니라 요엘이 예언한 바 하나님이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신실한 주의 종들 사이에서도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이다.

백년 전에 J. H. 무어 목사는 교구 내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런 현상들을 싫어하고 방해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조나선 에드워즈는 그런 현상들을 변호했다. 그는 그런 현상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라고 변호했다. 2백년 전에 동 앵글리아 지방의 존 베리지 목사는 이런 현상을 장려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런 현상들이야말로 성령의 독특한 표적이라고 생각했다. 웨슬레나 휫필드는 그들의 집회에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심시켰다.

 

그러면 이런 현상들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구약의 선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라. 그들이 메시지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전달했는가?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은 황홀경에 빠졌다. 때로 그들은 무아지경(trance)에 빠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성령이 그에게 임했을 때 사람들은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삼상 10;11)라고 말했다.

신약을 보자.
사도행전 2장을 볼 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어떤 행동을 했는가?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해 날뛴다고 조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의 임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이 가라사되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니”(행 2:17-18).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으며, 바울은 성령의 인도로 마게도니아에서 복음을 전했다(행 16장). 사도행전 22장에서 바울은 “환상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으며, 고후 12장에 보면 셋째 하늘까지 갔다왔다.

 

그러면 어떻게 결론을 내릴 것인가?

먼저 이런 현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전인격에 영향을 미친다. 신체에 일어나는 일은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에 일어나는 일은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또한 부흥기에는 제각기 반응하는 양상이 다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성령이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각자의 개성이나 배경 학문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고 다르게 사용하셨다. 한 하나님 한 성령이시지만 현상을 다르게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부흥기간 중에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보다 더 난폭하게 반응하며, 어떤 성격의 사람이 다른 성격의 사람보다 더 광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로이드 존스)가 강조하는 바는 현상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상들이 추구되고 장려되고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현상들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것들이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부흥이 진행됨에 따라 현상들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전혀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이유 때문에 현상들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병약한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이 강한 능력이 임하면 타격을 받는 수도 있으므로 준 의료학적으로 치유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은 위대한 부흥기에는 항상 마귀가 틈을 노려 부흥의 물꼬를 다른 데로 몰고 가게 한다는 사실이다. 마귀는 가짜를 양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침에 빠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하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현상들은 부흥의 필수 요건이 아니며 부흥의 핵심도 아니고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부흥의 시작은 항상 하나님의 성령이지만 인간의 마음이나 육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심리적, 육체적, 마귀적으로 복합된 현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이 있다고 해서 부흥 전체를 기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이 세상에 없다.

이런 현상들은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해 부흥기에는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상한 현상이나 체험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권능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부흥이다. 부흥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이상한 현상들이 동반되지만 우리 사이에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을 소멸하지 않도록 조심하여, 우리들의 눈을 영광의 하나님께 고정시켜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기대하자.

마틴 로이드-존스의 이런 주장에 비하면, 오늘날 비판자들의 주장은 얼마나 편견과 독선과 아집에 사로 잡힌 주장인가 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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