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 논쟁/갈4:4
기독론은 기독교의 중요 사상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만큼 초대교회 때부터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왔다. 제일 먼저 등장한 영지주의적 가현설을 필두로 해서 수많은 이단적 사상들이 순수 기독론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덤벼들었다. 우리는 종교회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기독론이 등장하였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게 된 기독론이 참으로 비싼 값을 지불하고 완성되었음을 깨달을 때에 교회의 참된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론에 대한 많은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진보적인 신학사상들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주성에 대한 묘한 왜곡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많은 이단들은 심지어 자신이 바로 재림주라고 서슴없이 공언하기도 한다. 교회는 이러한 끊임없는 사단적 공략 속에서 참된 신앙을 후대에 전승할 고결한 사명을 안고 있는데, 그 뼈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이다.
기독론 논쟁은 앞에서 다루었던 니케아 논쟁(삼위일체 논쟁)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내용이다. 니케아 회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임을 확정함으로 그의 신성을 인정했다. 한편 가현설(假現設, Docetism)과 같은 이단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주장하다 보니 그 두 개의 속성이 어떻게 그의 인격 속에 존재할 수 있는지 하는 상호 관계의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오리겐은 이미 예수의 영(靈)은 선재적(先在的) 상태에서 '로고스'(logo")를 완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빛과 영광을 가지게 되어 범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로고스는 예수의 몸 안에 들어오셨고, 예수의 영은 그의 몸과 그리스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인간적 본성의 위치가 불분명하여 환영받지 못했다. 후에 유스타티우스(Eusthatius)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인성이 항상 신성과 동일하게 의지하게 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적인 몸과 영을 소유한 사람이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인격은 인간으로 존재하며 비인격적 신성은 그 안에 거주한다는 소위 '성전이론'(temple theory)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후기 안디옥 학파의 주된 입장이었다. 결국 기독론 논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간에 발생된 문제였다.
1. 아폴리나리스 논쟁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310-390?)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장로를 거쳐 360년에 감독이 되었다. 그는 신앙심이 강하고 학식이 많아서 그의 대적자들도 그의 인격을 존졍했다고 한다. 또한 신학적으로도 아다나시우스 못지 않았으며 강력한 니케아파였다. 아폴리나리스는 살전5:23에 근거하여 3분설(三分說, Trichotomy)을 주장했으며, 플라톤(Platon B.C.427-347)의 심리학설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의 영혼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경우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의 영을 대신하여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결국 예수의 인성을 한정함으로 '인성제한설'이라고 한다.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 대하여 갑바도기아의 두 그레고리는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영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로고스는 인성을 모두 섭취하고 동화하여 인간적인 행위와 감정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논쟁이 일어나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소집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모두가 완전하다고 결론지었다.
2. 네스토리우스 논쟁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시리아의 게르마니키아(Germanicia) 출신으로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엄격하고 성실한 생활을 했으며 정직했으나 성격이 급하고 사려가 깊지 못했다.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었고 '제2의 크리소스톰'이라고 불렀다. 안디옥 학파의 데오도렛(Theodoreth of Tarsus)과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등은 그리스도 양성의 연합은 예수의 덕성 발달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의 성육(成肉)을 간과하였다. 그리하여 구원을 종교적인 것이 아닌 윤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이들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는 양성의 관계를 기계적인 것으로 복 상호 교통을 부인했다. 실제적인 논쟁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장로인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처음부터 완전히 결합된 것이 아니므로 마리아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을 싣고 다니는 것'(Theophorus)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일반인들과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시릴(Cyril 376-444)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시릴은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이 '결합'된 것이 아니고,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낳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인격의 통일성을 중시하여 그것을 분리시킬 수 없다고 했다. 데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에베소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노리우스를 정죄하고 아라비아로 귀양을 보냈다.
3. 유티케스 논쟁
431년의 에베소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시릴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 시릴의 추종자 중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유티케스(Eutyches)인데 시릴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끌고 갔다. 유티케스는 콘스탄티노플 부근의 수도원장으로 '일성론'(Monophysitism)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 성품이 합치된 후에 신성은 인성을 섭취하였고, 결국 그리스도의 몸까지도 우리와는 다른 것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은 콘스탄티노플 지방회의에서 부인되었으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고루스(dioscorus)는 유티케스를 지지하였으므로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권하여 449년에 에베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유티케스를 복직시키고 안디옥 학파의 지도자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하여 로마의 감독 레오 1세는 '도적회의'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450년에 데오도시우스가 죽고 마르키안이 즉위하자 451년에 칼케돈(chalcedon)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다시 유티케스를 정죄하고 칼케돈 신조를 작성했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그리스도가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심을 강조했다. 그의 신성은 하나님과 동질이며 인성은 우리와 동질인데, 그것들은 서로 섞이거나 나누어지거나 변하지 않으며, 동시에 하나의 인격을 이룬다고 하였다.
4. 칼케돈 이후
칼케돈 회의로 기독론 논쟁은 일단락지워졌다. 그러나 논쟁은 계속되어 유스티니안(Justinian 527-565) 황제는 일성론자들과 타협했고, '3강령'(the Three Chatters)을 발표했다. 이것이 문제를 일으켜서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소집되었고 결국 일성론을 주장하는 교회들이 분리되어 나갔다. 그들은 이집트의 곱트(Goptic) 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등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일의론'(一意論, Monothelitism)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논쟁들은 일견(一見) 하찮은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으며,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들을 분명하게 지키는 것은 기독교의 존재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이단적인 사상들이 교회에 그대로 유입되었다면 교회는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키는 많은 무리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분명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그 본질을 잃고 세속화되고 방향을 잃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1. 초대교회의 기독론
초대교회의 기독론은 가장 심각한 논쟁의 대립은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에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립이다.
안디옥 학파는 신학적 사상의 추출보다는 성서주석에 열심이었다. 복음서에서 예수에 대한 구절을 읽는 가운데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신성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두 본성의 완전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두 본성처럼 두 완전한 실재가 어떻게 하나로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강화시킨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두 가지 본성의 합일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결합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카릴루스를 대표자로 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다른 입장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 접근 방법은 아다나시우스의 구원론 사상을 도입하여, 인성의 완전함을 고집하면서도 인성이 신성에 대해 수동적 또는 수용적 역할을 갖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 신성이 인성과 교류한다고 까지 했다.
또한 카릴루스는 두 본성, 즉 두 본성의 연합에 대해 '자연스러운 연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두 경쟁학파간에 결정적 충돌이 발생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이자 열렬한 한디옥 학파의 일원이었던 네스토리우스가 마리아를 '신모'(神母)라고 부르자 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 문제를 가지고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기독론은 이 두 학파의 교리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레오의 기독론
레오의 기독론은 독창적인 것은 거의 없다. 그의 기독론은 서방 교회의 가장 훌륭한 사상을 반영하고 있으며,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의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상당히 공헌을 하였다.
그의 기독론은 두 본성이 존재론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안디옥 학파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두 본성이 신인 속에서 연합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두 본성이 각자의 완전성을 보유하면서 각자의 특유한 성질을 발휘한다고 보았다.
즉 두 본성은 한 인격의 일치 속에서 서로 번갈아 작용하는 식으로 공존하며 한 인격에 의한 두 본성의 협조가 서로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레오는 기독론을 기능적인 연합으로 주장하고 있다.
3. 로고스(lsgo")
로고스는 고전 희랍어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그 말이 파생되어 나온 동사levgw(레고)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levgw의 근본적인 의미는 '좁다'로 나타난다.
따라서 로고스의 의미는 ① 셈, 설명, 규칙, 비율, 이성(논리적 사고의 근거로서의 의미와 그 기능의 의미에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② 설화, 격언, 담화, 사람이 그에 대하여 말하는 주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로고스는 희랍철학에서 ① 사물의 존재를 한정하는 보편적인 법칙, ② 행위가 따라야 할 준칙, ③ 이 법칙과 준칙을 인식하고 이를 따르는 분별과 이성을 뜻하였다.
최초의 로고스 사용은 B.C.500년경에 태어난 에베소의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사용이다. 스토아 학자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우주가 '이성' 또는 '법칙'이란 의미의 로고스에 의해 통제된다는 그들의 학설의 선구자로 이해하였다.
또한 초기 스토아주의는 플라톤적 관념론과 민간 신앙에 모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으나 후기 스토아 학자들은 양자와 타협하게 되었다. 이제 로고스는 더 이상 물질적인 술어로 노해지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는 신적 이성이 되었다.
그러나 희랍 철학자 필로는 구약의 말씀과 스토아주의의 로고스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논리적 귀결을 맺었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절대적 초월자이며, 로고스는 창조시에 하나님이 표본인 동시에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 요한은 필로를 능가하여 필로의 로고스는 의인화에 지나지 않는다, 즉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4. 칼케돈 신조의 사상
칼케돈은 어느 쪽도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네스토리우스 추정자들은 그들의 눈에 존재적 또는 위격적 결합이 본성적인 결합과 다름없이 보였으므로 그 신조를 좋아하지 않았고, 단성론자 역시 그들에게 있어서 위격적 연합이 본성적 결합의 대용물이 될 수 없었던 까닭에 그 신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의 한 위격 속에 두 본성이 있는 것으로 믿는 자들을 양성론자(dyophisites)라고 불렀다.
이 신조에 대해 이집트의 단성론자들은 매우 완강했다. 그들은 정치적 설득이나 타협 신조에 의한 칼케돈 신조 대신에 제안된 타협안은 '헤노티콘 신조'(Henoticon 482년)로서 이 신조에서는 본성의 구별을 없애버리는 방식으로서 위격의 일치가 다시 주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