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방의 교부들/히12:1
소위 교부의 황금 시대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등장했던 수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의 업적을 대단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재능을 통하여 교회의 영적이며 신학적인 재산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초대교회와 속사도에게 가까운 만큼 그들의 신앙과 사상은 비교적 순수했으며, 이러한 신앙의 천재들 이후에 중세 카톨릭의 신학적 우매함이 등장했다는 점은 못내 아쉽다. 우리는 초기 카톨릭 신학의 대부들로부터 신앙과 교회를 위한 열정을 본받게 된다. 반면에 그들중 더러는 비성서적인 카톨릭 교리를 산출했으며, 사소한 신학적 대립으로 말미암아 인간적인 한계와 분열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또한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구별되는 동방의 신학과 서방의 신학이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지양하며 변증법적인 일치를 이루었다면 이후의 교회가 그토록 심한 분열과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신학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3가지의 흐름으로 발전했다. 먼저 크게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어지고, 동방은 다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로 나뉘어진다. 동방의 교부들은 주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서방의 교부들은 반대로 실제적이며 목회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동서방의 신학사(神學史)는 각각의 흐름과 주제들을 가지고서 전개되었다.
한편 동방에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철학을 중시하여 기독교 신앙과 철학(이성)의 조화를 시도했으나 안디옥 학파는 그것과는 달리 성경을 중심으로 한 문자적·역사적 해석을 중시했다.
1. 동방의 교부들
1)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 지방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초기 인물들로는 판타이누스(Pantaenus)와 클레멘트(Clemet of Alexandria) 그리고 오리겐(Origenes)이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초기의 교부들"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그 후대의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①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260?-339) : '유세비우스 팜필루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260년경 팔레스틴에서 출생하여 가이사랴의 팜필루스(Pamphilus)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313년경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신조로 채택된 원안(原案)을 제출한 그는 사실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나 단지 교회의 평화와 통일성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다. 그는 콘스탄틴의 호의를 받아 궁중에 출입하면서 많은 연설과 저술을 했다. 그는 약 20여 권을 저술했지만 교리적인 숙달이나 명확성은 없다. 대표적인 책은 「교회사」, 「콘스탄틴 황제 전기」등이다. 그는 그의 「교회사」책 때문에 교회사의 시조로 불린다. ②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6-373) : 니케아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그의 서기와 대(大) 집사를 거쳐 결국 알렉산더의 후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성경, 고문학, 교부들의 글에 통달했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는데 사막의 수도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한 토사로서 무려 5번에 걸친 귀양에도 불구하고 든든히 그의 입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로고스의 성육신」, 「안토니의 전기」등이다. ③ 시릴(Cyril of Alexandria 375-444) : 413-444년까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있었으며 테스토리우스(Nestorius)와 논쟁했다. 그의 성품은 네스토리우스와는 달리 난폭하고 당파심이 강했다.
2) 그외의 지방
갑바도기아에는 3명의 신학자가 있어서 아다나시우스 사후 니케아 신앙을 보전했다. ① 바실(Basil the Great 330-379) : 닛사의 그레고리의 형이며,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수도자들과 함께 은둔 생활을 했다. 364년에 사제로 안수받고, 370년에 갑바도기아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373년 아다나시우스 사후 동방 정통신앙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신학자요 설교자로서 특히 교회 정치에 탁월했고 수도원 생활 규칙을 제정하여 '동방수도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저작으로는 「신성론」, 「성경론」등이 있다. ②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issa 332-395) : 바실의 동생으로 수사학(修辭學)의 교사가 되어 결혼 생활을 하다가 형의 감화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372년에 닛사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학문과 사상이 깊었으며 사상경향은 오리겐에 가까웠다. 대표작은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이다. ③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330-389) : 나지안주스의 장로이며 설교가로 374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의장으로 활약했으며, 388년 은퇴하여 명상과 저술에 힘썼다. 그의 설교는 크리소스툼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④ 크리소스톰(Chrysostomus 347-407) : 본명은 콘스탄티노플의 '요한'인데, 설교가 매우 뛰어나므로 '황금의 입'이라는 뜻의 '크리소스톰'이라고 불렀다. 그는 안디옥 출신으로 리바니우스에게서 수사학을, 멜리티우스에게서 신학을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374-381년까지 수도자 생활을 하다가 안디옥의 집사와 감독이 되었다. 397년에는 50세의 나이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신학적인 논쟁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설교와 성경해석 등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엄격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함으로 미움을 받았다. 그는 특히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의 아내인 유독시아(Eudoxia)의 미움을 받아 404년에 추방당했다가 다시 아르메니아로 유배가서 사망했다. 저작으로는 「설교집」이 있으며 그것은 그의 건전한 성경해석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2. 서방의 교부들
1) 힐라리우스(Hilarius 295-368)
프랑스 포와티에 출신으로 철학과 문학에 뛰어났다. 그는 장년이 되어서야 기독교에 들어왔으며 350년에 고향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정통교리를 위하여 열심이어서, '아리우스파를 쳐부수는 방망이'(Malleus Arizosum)라는 별명을 얻었다. 저작으로는 「삼위일체신론」, 「신앙론」 등이 있다.
2)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
고울(Gaul)의 수도인 토리에(Trerevess) 출신으로 로마에서 교육을 받고 밀라노의 집정관(Perfect)으로 재직중 그곳 감독인 옥센티우스(Auxentius)가 죽자 감독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때 세례도 받지 않은 상태여서 세례를 받은 후 감독으로 세워졌다. 그는 교회의 위엄을 유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 등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결국은 교권을 국권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어거스틴에게 감화를 주기도 했으며, 우화적 해석과 찬송에 관심을 기울였다.
3) 제롬(Hieronymus Jerome 346-420)
달마치아의 스트리돈(Stridon) 출신으로 고문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키케로 당이다"라고 심판 받는 꿈을 꾸고 각성했다. 374년부터 5년간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고 안디옥, 베들레헴에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그는 로마에 돌아왔다가 385년에 베들레헴에 가서 수도원을 세웠다. 특별히 382년 로마 감옥 다마수스(Damasus)의 권고로 12년간의 각고 끝에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불가타」(Vulgata)를 발간했다.
동서방의 교부들은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세대에서 충실하게 삶을 살았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위대한 신앙의 유산들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 능력을 갖춘 자를 사용하신다.
1. 교부(Fathers of church)
그리스도교 초기 시대부터 '교부'란 명칭은 주교들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러나 4세기말엽부터는 전시대의 교회의 저술가 중에 교리적인 면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는 사람들이라고 명확하게 규정된 저술가들을 일컬었다. 5세기에 이르러서는 주교는 아니지만 교회의 스승들인 사람들에게 교부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교부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정통교리를 가르치고 있고, 그 생활이 거룩했으며, 교회의 인정을 받았고 고대 인물이라는 점이가. 그러다가 18세기 이후부터는 서방 교회에서는 이시도레(Isidore of Seville), 동방 교회에서는 다마스커스의 요안네스(Johm of Damascus)에게까지 한정을 짓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그리고 그 밖의 몇몇 고대 교회 학자들이 교부라고 인정되고 있다.
2.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부
1) 라틴 교부
이 시대에 있어서 라틴 신학자의 대표자는 터툴리안(Tertullianus)과 키프리안(Cyprianus)이다. 이 두 사람은 그 국민성에 있어서, 또한 교육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파의 신학자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하였다. 후자는 특색이 철학적이었다면 전자는 법률적이었다. 그러나 터툴리안이라고 해서 전혀 철학 사상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었고, 스토아 철학의 많은 감화를 받는다. 터툴리안이 라틴 신학에 공헌한 가장 큰 장점은 한 마음으로 기독교적인 경험만으로 새로운 사상 세계를 개척하려고 했던 정신이다. 그는 많은 용어를 만들어냈다. 신약(Novium Testamentum)이라는 말과 삼위일체(trinitas)라는 말은 그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터툴리안이 신학 발달에 공헌한 것은 속죄론의 기초가 될 죄악론에 있었다. 즈 그는 원죄설로서 죄는 육체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대시하였으며 그의 죽으심은 곧 그의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키프리안은 교회론에 그 중심이 있었다. 그는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가르쳤다. 또한 교회는 하나, 즉 감독에 의하여 지배되는 카톨릭 교회 외에는 다른 교회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2) 헬라 교부
① 안디옥 학파 : 이 시기는 대략 A.D.170년경으로 변증가 시대의 끝으로 삼는다. 일명 소아시아 학파라고도 부르는 이 학파는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사람들로서 성경 해석에 중심을 두고 사상과 신앙의 온전함을 취했다. 이들은 이단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이 파의 유력자는 이레니우스(Ireneus)와 힙폴리투스(Hippolitus)이다. 이레니우스는 사도 요한의 계통을 계승하여 신약의 정신을 파악하였으며, 관대하고 사소한 차이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는 서유럽에서 활동한 신학자로 라틴 신학 발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힙폴리투스의 신학은 변증가처럼 철학적인 사변으로 치닫지 않고, 사도 아래의 신앙의 표준을 중히 여겼다. 그는 라틴 신학 발달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지만 성육신(成肉身)교리에 있어서는 동방의 신학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동서 신학의 연대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신학 사상의 중심은 로고스가 아닌 성육신과 속죄에 있다.
② 알렉산드리아 학파 : 이 학파는 처음 판타너스(Pantaenus)에 의하여 지도되었는데 그의 제자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이르러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Flavius Clement)는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저술과 설교에 힘쓰며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헬라인에게 주는 권면」, 「교육자」, 「잡설」 등이 있다. 오리겐(Origenes)은 185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성경연구에 일생을 다 바쳤고 성경을 중히 여겨 성경을 신학의 기초로 하였다. 이 점은 그의 스승인 클레멘트와 같다. 또한 그는 하나님에게 의식과 의지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에게 형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오리겐은 아버지와 아들 외에 제3의 인격으로서 성령을 더했으며, 또한 영혼 선재설을 주장하였다. 더불어 그는 악인도 사후의 시련을 통해 결국은 깨끗하게 되어 만인이 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3. 니케아 회의 이후의 교부
1) 동방의 교부들
알렉산드리아와 팔레스틴 지방에 속하는 교부는 다음과 같다. 가이사랴의 감독이며 교회사의 시조로서 유명한 유세비오, 아다나시우스(296-373), 이집트의 이시도레(Isidore)가 있으며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방의 테오도레, 갑바도기아의 바실과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시리아 지방의 에프라임,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톰 등이 동방의 교부 중 중요한 인물들이다.
2) 서방의 교부들
이 시대의 서방의 교부 가운데 가장 초기의 사람은 힐라리우스(Hilarius 295-368)이다. 이 밖에 암브로시우스(Ambrosius), 제롬(Jerome), 루피누스(Rufinus 345-410)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