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윤리/골2;8
군사적으로 강한 게르만족이 문화적 수준이 더 높은 로마를 완전 점령하였으나 정치적으로 통치하지 못한 가운데 유럽은 전반적으로 국왕의 세력이 약화되고 교회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안셀무스가 인간의 죄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함받는 구원이 윤리적 향상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아벨라르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동기의 선악이 윤리적 평가의 기준이라 주장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이 윤리적 결단을 담당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컴은 하나님의 결정이 선(善)이며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을 용납할 때 윤리적 요구가 만족된다고 말했다.
헬라 철학사상과 기독교교리는 상호 반목하면서도 수용하여 독특한 중세유럽 윤리의식을 형성하였는바 이는 정치권력이 쇠퇴하고 교회가 힘을 얻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신비주의의 영향도 함께 받았었다.
교부철학(敎父哲學)과 스콜라 철학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는 중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점점 그 세력을 잃고 있던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완전히 점령하였지만 이들이 문화적으로 로마에 뒤떨어지고, 또한 종교적으로도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로마계 주민들을 정치적으로 잘 다스리지 못함으로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라인강 하류에 자리잡은 프랑크는 게르만족이면서도 일찍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유럽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뒤이어 나타난 노르만족의 침입은 유럽의 형세를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여러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유럽은 국왕의 힘은 무력해지고, 이에 따라 변경의 백(伯)들이 지방 농민을 예속시키면서 군사와 행정권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실력을 키워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교회에 의지하게 하였고, 로마가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지라는 점과 페팽(Pepin 714-768)이 토지의 소유를 교황령으로 기증함으로써 '로마교회'가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중세기 전반에 걸쳐서 로마 교회의 권위는 크게 강화되었고 사상과 학문과 정치 등의 모든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런 가운데 나타난 중세의 윤리 사상은 당연히 기독교적일 수밖에 없었다.
1.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적인 은총론의 사상을 이어받아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신적인 은총을 통하여 온다고 주장하였다.
2. 아벨라르(P.Abelard 1079-1142)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고 도덕법보다 사랑을 강조하였다.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으로 그 사람의 덕이나 죄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행동의 동기를 보고 그것이 죄에 대하여 동의했을 경우에만 죄가 인정된다고 하였다. 그는 죄의 여부를 신적인 권위로만 판단된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있는 자유의지로 판단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3.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는 '자연과 은총'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수의 은총론과 페리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조화시켜 하나님의 은총이 자연을 더 값지게 만드는 것이므로 이들은 파괴의 관계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자유의지보다 인간의 이성을 더 강조하여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윤리적 덕이라고 하였다.
4.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
스코투스가 가지고 있는 자연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되 필연성에 의해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세계를 우연의 세계로 보는 입장이었다. 그는 도덕적인 행동이야말로 자아의 의지에 의한 행동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하였다.
5. 오컴(W.Ockham 1280-1347)
오컴은 개인적 힘과 의지를 강조하여 스콜라 철학을 벗어나 근대 자연 과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으나 하나님의 결정이 곧 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꼭 인간의 기준에 얽매이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의지로 행동하시는데 그의 행동이 곧 선의 기준이 된다고 하였다.
6. 베르나르(Bernard de Clairvaux 1091-1153)
베르나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형이상학과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설교자였다. 그는 인간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던 절대적 자유가 죄로 인하여 다 상실되고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존재라고 하면서, 아울러 자신의 노력으로 죄에서 재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는 구원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함께 자신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기도와 설교, 자기 부인(否認)과 예배를 포함한다고 하였다.
7.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
프란체스코회의 회장이었던 보나벤투라는 중세기 중엽에 사랑과 청빈의 삶을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모든 학문을 하나님의 실체의 그림자로 보고 인간의 영혼 안에도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인간은 묵상과 염도(念禱)와 관상(觀相)을 통해서 정화와 조명, 일치의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이 자기의 영혼에 임재하는 하나님을 직관하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단계를 따라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종교적 훈련은 사랑을 통하여 충족될 수 있다고 보고 그 사랑을 받아야 함으로 그것을 신적 은총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고찰한 중세기 기독교의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매우 밀접하게 접목되어 두 사상을 따로 떼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헬라의 윤리가 기독교화하는 독특한 상황을 만들었다. 비록 중세의 사상이 기독교적인 사상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미미한 부분이었다. 독자적 헬라 사상으로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적인 세계로 나아가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것은 에크하르트(Meister Exkhard 1260-1327)의 사상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모든 것을 초탈(超脫)함으로써 정신이 청빈 상태로 들어가 완전히 하나님께 의존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초탈의 구체적 의미는 덕행을 쌓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비적인 주장은 헬라 사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도입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중세기는 고대의 윤리 사상이 기독교를 통하여 많이 발전하는 면도 있었지만 반면 전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그 실제 사례들을 보면 성만찬의 실제적 임재론 및 화체설, 연옥설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 숭배, 고해성사, 화상 숭배, 사제 제도, 분향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카톨릭의 종교 행위들은 다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 인간 스스로 신의 세계에 나가고자 하는 헬라 사상과 신비주의가 복합적으로 만들어 낸 이교적 산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Ⅰ. 용어 해설
1. 교부철학(敎父哲學,patristic phliosophy)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교부들은 철학을 말한다. 교부들은 고대 문명 가운데 불멸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기독교의 교리는 인간의 유한한 이성으로서는 완벽하게 해명될 수 없는 신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가 세워졌다.
2.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스콜라 철학은 중세의 신학. 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이다.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 주석. 해석이 그 첫 번째의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경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신의 말씀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철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3. 게르만족의 대이동(民族大移動)
게르만계(系)의 세 부족의 로마제국 영토에로의 대규모적 이동을 말한다. 훈족(族)의 서진(西進)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대규모로 로마 제국의 영토 안으로 이주하고,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왕국을 건설하는 6세기 말 까지의 200여 년 동안의 과정을 말한다.
4. 아리우스파
4세기말 일어난 기독교의 이단(異端)으로 이미 3세기에 그리스도를 아버지인 신(神)보다 하위로 보고,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라고 설파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했다. 니케아 공의회(325)는 이를 이단으로 규정하였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 때는 전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황제의 사후(36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분쟁이 일어나 급속히 몰락하고, 제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고 아리우스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5. 도덕법(道德法)
모든 사람의 실천적 행동 기준이 되는 법칙으로 도덕법칙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중세에는 종교적 권위가 도덕적 선악의 기준이 되었으나, 근세에 특히 계몽 시대에 널리 성행된 자연법 사상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이성'에서 그 유래를 찾게 된다. 최고의 도덕률로서 정언명법(定言命法)을 내세워 격식화한 독일의 칸트(I. Kant 1724-1804)에 의하면 원래의 도덕률은 한마디로 보편성을 지닌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이성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Ⅱ.보충 자료
중세 철학
1. 중세 철학과 기독교 :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세철학은 그리스. 로마 초기의 고대 철학과는 확연히 이질적인 관심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중세철학은 기독교와 그 모태가 된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근본적 주제를 찾는다. 특히 교부철학 이후 스콜라 철학에 이르는 중세 철학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2. 중세 철학의 방법 : 중세 철학은 우선 기독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知的)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변증의 도구로서 출발하여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병용하였다. ① 인간 이성에 보편적으로 승인받아야 하는 논리학적인 제원리. ② 세계나 인간에 대한 경험이나 관찰에 근거한 지식, ③ 종교상의 권위에 의하여 진리로 인정된 계시나 교의 등이다.
3. 중세 철학의 전개 : 그리스 철학을 최초로 교부학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이다. 또한 13세기에는 풍부한 아리비아 문화권의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 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필요로 하였다. 이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학적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이 방법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때까지의 기독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 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4. 중세 철학의 의의 : 중세 철학은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니고 있다. 중세 철학의 또 다른 두드러진 특징은 신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