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인한 살인은 정당한가?
전쟁의 정당성은 불가피한 원인, 선한 의도, 수단으로서의 유일성, 사전경고를 통한 권위있는 선전포고, 목적 성취의 가능성 등으로 판단된다. 정당한 방어행위와 경찰기능의 공격행위일 때에만 외교적 국제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죄와 적은 미워하되 죄인과 적군은 종교적 인도적 차원에서 대우한다.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전쟁은 예수께서 화평의 목적 대신 분쟁의 수단을 인정하고 강조함(눅12:51)에서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마10:34). 악과 타협한 평화는 악을 제거하려는 의로운 분쟁을 유발한다. 거룩한 전쟁은 인간적 목적의 전쟁이 아님과 또 하나님의 목적임을 강조하고 헌신적 참여와 결과적 승리를 뜻하는 종교적 용어이다. 예수는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제자들을 파송할 때 당부하였다(눅22:36, 38). 성도의 삶은 거룩한 전쟁의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전쟁에 살상당하는 존재는 사탄의 군사들이다. 정당한 전쟁의 결과는 범죄가 될 수 없다.
오늘날 단일 파괴 수단의 폭발력이 엄청난 차원으로 비약된 핵무기의 출현이후 그것을 사용한 대규모 전쟁은 인류의 멸망을 예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쟁으로 인한 살인은 정당한가? 라는 문제가 윤리적 문제로 심각하게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특히 기독교인은 화평을 위하여 부름을 받을 자로서 전쟁을 방지하고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전쟁은 가장 무서운 악 가운데 하나이므로 전쟁 자체를 선호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정당한 전쟁으로 인한 살인은 가능한가? 라는 문제를 성서·역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진단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1.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
1) 행동주의
기독교인은 정부의 명령에 복종하여 모든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주의이다. 정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아담에게 땅을 지배하는 권한을 부여하신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후에는 정부를 세우시고 노아에게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침략한 창세기 14장의 왕들과 아브라함이 싸울 때에 아브라함에 의해 사용되었다(창14:1-16). 이 구절은 하나님이 침략자로부터 평화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승인한 사실을 보여준다. 모세의 신정 정치에서 정부권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다(출21:25).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실 때에도(삼상8:7)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통차하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통치자를 세우시기도 한다(단4:17). 예수의 말씀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는 말씀이 이 경우에도 인용된다(요19:11; 딤전2:2; 딛3:1; 벧전2:13,14). 신약성경에서 정부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계에 관하여 가장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은 롬13:1-7이다. 신약의 이러한 구절들이 특히 의미하는 바는 누구든지 정부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쟁에 나가라는 정부의 요구에 기독교인들은 순종해야 한다고 본다
2) 평화주의
전쟁에 나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견해는 평화주의라고 불려진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이러한 뜻으로 해석한다. 평화주의에서 살인은 항상 잘못이다. 성경은 생명을 빼앗는 일을 금하고 있다(출20:1 3). 전쟁은 대량 살인이다. 하나님이 도덕적 명령은 전쟁에 나가라는 어떤 인간의 명령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평화주의는 악을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하셨고, 바울 역시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 그의 제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수한 사명과는 조화될 수 없다.
3) 정당한 전쟁
선별주의자들은 일부 전쟁은 정당화되나 다른 일부 전쟁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당한 전쟁론은 행동주의와 평화주의의 종합이다. 즉 정당한 전쟁론은 오직 정당한 전쟁에만 참가해야 하며, 부당한 전쟁에는 참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실 성경에 나타나는 일부의 전쟁은 원칙적으로 정당하고 일부의 전쟁은 원칙적으로 부당하다. 수많은 전쟁 과정중에서 범해진 갖가지 살인은 예수의 가르침이 요구하는 바와는 위반되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주님이 가르치고 권고한 태도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데서 생겨난 것이며 여기에는 사랑과 정의가 요구되어 진다.
2. 정당한 전쟁의 신학적 이해
1) 어거스틴(St. Augustin 354-430)
정당한 전쟁에 관한 기독교인의 전쟁 이론은 처음 암브로스에 의해 형성되었다가 어거스틴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어거스틴은 지상에서의 완전한 평화가 불가능하지만 가능한 평화에 근접하려는 회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하나의 이상으로 생각하였고, 사랑이 전쟁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정당한 전쟁론의 목적 중의 하나는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철저한 신앙관에 입각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우주만물에 대한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에 대한 속성을 그대로 전쟁관에 피력하였다고 본다.
2) 루터의 입장(M.Luther)
루터는 권력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한 로마서 13장의 주장과 어거스틴의 두 왕국론에 기초된 혁명반대론을 항상 강조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의 정당한 전쟁론을 수정하여, 십자군 이념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반대는 그의 두 왕국론, 즉 그리스도의 왕국가 세상 왕국이라는 훨씬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루터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국가는 세상 왕국을 통치한다고 본다. 그에게 있어서 전쟁의 기능은 중세기적 의미에 있어서 영토의 방어에 있었다. 그리고 루터는 정당한 전쟁의 목적이 평화에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받아들였다.
3) 칼 바르트(Karl Barth)
바르트는 거의 모든 전쟁들을 부당한 것으로 단죄하면서도 현대적인 발전에 조화되도록 고전적인 정전론을 수정하여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전은 전면 전쟁이며, 또 모든 시민이 전투원인 동시에 공격 목표가 되어 있는 이상 전쟁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통치자들에게만 전가시킬 수는 없다고 하였다. 교회는 그 국가의 양심으로서 거의 모든 전쟁에 대해서 항의해야 되지만 극히 예외적으로 정당한 전쟁을 인정한다.
전쟁의 정당성은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 혹은 정당화되는가를 문제삼는 것이다.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의 기준은 ① 적법한 권위, ② 정당한 원인, ③ 정당한 의도, ④ 최후의 수단, ⑤ 합리적인 성공의 희망, ⑥ 정당한 행위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무력사용 및 국가에 대한 반항을 포함하는 형태의 행동과 관련해서 도덕적으로 고려될 때 나타난다.
1. 전쟁
전쟁이란 기본적으로 '조직들 사이에 발생하는, 무력을 사용하는 유혈 투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무기는 실제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위협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위협은 오늘날 강대국들의 대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핵무기를 사용한다면 교전국들이 완전히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물체나 재화를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무기 이외에도 인간의 정신을 직접 공격하는 심리적 기술들도 있다.
'냉전'이나 '신경전'이 참다운 전쟁인가 하는 문제는 논의되어야 할 내용이다. 국제전은 국가의 이익 때문에 발생하는 국가간의 무력 투쟁으로 교전국가운데 적어도 한 국가가 전쟁을 원해야만 일어난다.
내전과 혁명전은 똑같은 동족 상잔의 비극이며, 심리 무기에 주로 의존하는 전쟁이다. 내전은 매우 잔인하고 비참한 전쟁으로 매우 많이 일어났으며 인간 역사의 흐름을 주로 형성해왔다. 혁명전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결정적인 위치에 도달한 공산주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이들은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의하여 혁명적인 방법들에 의존하였고, 조직, 선전, 선동 그리고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지하음모로부터 국민을 통치하는 최후의 승리로 나아가는 데 사용한 이상적인 다섯 단계 등의 정복 전쟁의 수법들을 선호하였다.
2. 성전(holy war)
'성전'이란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전쟁의 실행 및 이데올로기에 들어 있는 종교적 평가 및 동기들을 가리키는 전통적인 칭호이다.
최근의 연구는 성서 안에 있는 증거 중의 많은 부분이 비교적 후대의 것이고 그 형식이 도식적이라는 점과 성전의 많은 '전형적인' 특성들이 산발적으로 제시된다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관념과 관습들이 폭넓게 나타나는 점 등을 강조한다.
3. 전쟁 거부론
전쟁을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한편 일부 사람들은 완전히 종교 또는 기독교적인 이유로 양심적인 면에서 전쟁을 거부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기독교 평화주의는 메노파 교회와 형제 교회와 퀘이커 교회를 통해 나타났다. 전쟁을 거부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가 취하는 보다 철저한 입장은 '신약적 무저항'이라는 칭호로서 선교 차원의 적극적 종류의 비저항이다. 즉 다른 쪽 뺨도 돌려 달라는 전략이다.
단순한 평화주의가 아닌 이것은 사회에서 구속의 사랑의 영향력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같은 관점에서만 우리는 복음주의적인 양심적인 전쟁 거부론을 이해할 수 있다.
4. 핵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적 평가
1) 십자군적 입장
핵에 관한 한 거의 선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핵이 얼마나 위험하고 핵공격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확실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기독교인은 전쟁을 먼저 시작하거나 핵을 강요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2) 정당 전쟁 이론
전쟁을 하기 위한 표준으로서 정당한 원인, 정당한 의도, 최후의 수단, 전쟁 선포의 권위, 성공의 희망 등을 내세운다. 전쟁을 하면서 비례원칙과 분별원칙을 주장하는데 재래식 전쟁개념에서 생존, 안보, 공생을 위한 최후적 수단으로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당 전쟁 이론의 차원에서 핵은 '국가의 필연성'에 속하게 되고 전쟁수행의 유혹과 핵억제라는 구실하에 전쟁 수행능력 증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혹을 받는다.
이것은 아무리 조건부로 하고 비전투요원의 면역성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핵에 관한 한 인정 될 수 없다.
3) 평화론적 입장
기독교인은 개인적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자이며, 집단적으로, 즉 교회적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공동체이다. 이러한 정체를 확실히 하고 오늘의 사회에서 평화를 증거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핵무장을 해체하고 인류가 아름답게 공생하는 것을 희망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