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배 학
목 차
서 문(신령과 진정의 예배) 7
제 1 장 예배의 근본 원리
서 론
Ⅰ. 예배의 실재
1. 예배의 어의
2. 예배의 정의
3. 예배의 표현 10
4. 예배의 본질
5. 특별 계시인 구약의 예배 11
6. 특별 계시인 신약의 예배 12
7. 예배의 요소
8. 예배의 목적 13
Ⅱ. 예배의 원리
1. 계시와 응답 13
2. 성령의 내적 증거 14
3. 본질적 공동체 예배 16
제 2 장 예배의 역사
서 론
Ⅰ. 족장 시대 이전의 안식 개념
Ⅱ. 족장 시대의 예배 17
Ⅲ. 율법 시대의 예배 18
1. 성전 예배
2. 규정된 예배
3. 위탁적 예배
4. 의식적 예배
5. 상징적 예배 19
Ⅳ. 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
1. 회당 예배
2. 회당의 구성과 운영
3. 회당 예배의 순서 20
4. 회당의 시설
5.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의 병행 21
Ⅴ. 예수님 시대의 예배
서 론 21
1. 예수님 시대의 예배 22
2. 신약 시대 예배의 기초 23
Ⅵ. 사도 시대의 예배
서 론
1. 사도 시대 예배의 장소 23
2. 사도 시대 예배의 특색 24
Ⅶ. 중세 시대의 예배 24
Ⅷ.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서 론
1. 말씀 중심의 예배 25
2. 성찬의 본질성 회복
3. 예배의 찬송
4. 예배 의식 문제 26
Ⅸ. 현대의 예배
1. 옥스포드 운동 26
2. 청교도 혁명
3. 현대 예전 운동 27
제 3 장 예배의 기본 개념
Ⅰ. 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 28
Ⅱ. 예배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29
Ⅲ. 영적 예배 30
Ⅳ. 공동체적 예배 31
Ⅴ. 예배의 질서 32
Ⅵ. 성경적 예배
Ⅶ. 자유케 하는 예배 33
제 4 장 예배의 순서
서 론
Ⅰ. 하나님의 인도를 소원함
1. 전주 35
2. 개회 찬송
3. 예배에의 부름
4. 신앙 고백 36
5. 기도 37
Ⅱ. 말씀의 선포
6. 성경 봉독
7. 말씀 전함(설교) 38
Ⅲ. 감사와 응답
8. 찬 송 39
9. 헌 금 40
10. 축 도 41
제 5 장 말씀 전함(설 교)
서 론
Ⅰ. 성 경
1. 성경의 환경 44
2. 하나님의 계약 46
3. 성경의 원전과 번역본들 48
1) 구약의 원전 50
2) 구약 원전의 번역본들 51
3) 신약의 원전 53
4) 영어 번역본들 54
5) 20세기 영어 번역본들 56
제 6 장 기 도
Ⅰ. 기도의 정의 59
Ⅱ. 기도의 유형 60
Ⅲ. 기도의 필요성 61
제 7 장 찬 송
Ⅰ. 시편과 찬송가
1. 시편 63
2. 찬송가 64
Ⅱ. 찬송가 사용법
1. 찬양의 응답
2. 찬송의 기도 65
3. 신앙 고백 66
제 8 장 성 례 전
Ⅰ. 성례 개관 67
Ⅱ. 세 례 68
Ⅲ. 성만찬 71
제 9 장 교 회 력
1. 유대력 74
2. 중세기의 교회력
3. 교회력의 정립 75
4. 교회력의 적용 76
5. 교회의 행사 77
제 10 장 예배의 처소
Ⅰ. 외부적 환경 79
Ⅱ. 교회의 시설 80
연구 문제 82
서 문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한복음 4:24에,?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요한 복음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 자신의 창작문구가 아니다. 이 말씀은 있는 그대로, 곧이 곧대로의 생생한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다. 기록자 사도 요한은 그 말씀을 직접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한 것뿐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셨을까? 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로,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먼저 밝혀 놓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이 말씀을 원문 읽기로 보면 그 본성의 주체가 명확해진다. ?Πνεύμα ό θεό??(G. N. T., 3nd Edition) - 프뉴마 호 데오스, 직역하면 ?영이신 그 하나님?이다. 다시 말하여 그 강조점이 <영>이라는데 있다. 영(Spirit)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적 감각이나 눈으로 식별할 수는 없는 존재이시지만, 순수한 영적 존재로서의 모든 특질들을 그 본성으로 소유하시는 분이시다. 곧 전인격적인 분으로서 자의식적(自意識的)이시고, 자기 결정적(自己 決定的)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우상화(偶像化) 한다거나, 또는 특정 장소에 매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둘째로,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예배 행위?이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이다. 신령(spirit)은 ?πνεύμα?(프뉴마)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속성중에 하나이다(살전5:23). 즉 인간 요소의 가장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 성령과 상통하는 곳(롬1:9)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요소는 타락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함을 이미 말씀하셨다(롬1:9).
다음으로 진정(truth)은?άλήθεια?(알레데이아)로서 모든 거짓과 대조되는 것을 말한다. 즉 인격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는 역시 인간 편에서의 참된 인격, 의로운 인격, 정직한 인격을 갖는 것이 그 의무이다(딛1:15).
이상에서 우리는 ?영이신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살펴보았다. 순수한 영(Πνεύμα)이시며, 무한하시고, 완전하시고, 전인격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이 화답하는 예배 행위는 신령(πνεύμα)과 진정(ἀλήθεια)이다. 그러나 이 신령과 진정은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의 어떤 공력(功力)과 그 의지(意志)으로부터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불가항력적인 은혜(Irresistible Grace)이다. 다만 이 은혜를 사모하기 위해서는 인간 편에서의 생생하고 현장감 있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즉 나를 사랑하사 선택하여 주시고 불가항력적으로 궁극적인 구원까지 인도해 가시는 그 하나님을 깨끗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과 전통, 관습을 깨끗이 벗어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참 진리이신 하나님의 사상보다는 타락한 세상의 거짓된 그 사상들을 더 우선적으로 받아드리는 그 인격 속에서는 진정과 신령의 참된 예배행위가 이로워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의 그 일반적 관념들을 보편 타당하다 라고 정당화시킬 때, 우리 속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 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 우리 자신에게는 덧없는 시간들이 한없이 흘러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가 나로 인하여 방해받고 지연되게 하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것은 마치, 내 속의 또 하나의 다른 나가 서쪽 하늘에 검은 먹구름처럼 몰려와서는 누렁 이빨을 드러내며, 선함과 깨끗함과 정직함을 온통 삼켜버린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각각 자기 조상들의 유전과 전통, 그 관습을 따라, 소위 참된 예배를 주장하였다. 모형 적이며 형식을 쫓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장소주의(Localism)에 집착해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향하여 거짓이라고 외쳐대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저주의 집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각각 자기들의 편견과 아집 속으로 자기들만의 하나님을 만들어 내었다. 역시 그 하나님의 꼭대기에는 자기 자신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이러한 반목과 적의는 조상 대대로 그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들의 사이는 영영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그 변절될 수 없는 약속과 함께 그들 앞에 계시되었다. ?내 말을 믿으라?(요4:21), 여기에서?믿으라?(πίστενσόν)는 명령어이다. 즉,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임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꼭, 그렇게, 틀림없이 해야만 하는 것(must needs)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필요요, 의무이다. 하나님의 이 강력한 주장하심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한 번 주신 이 명령을 인간은 적극적으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 이 서두의 강력한 신적 명령이?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확정적인 시간 개념까지 부여하시어,?지금 이 때?부터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신다(요4:23). 곧 참 예배는 일찍이 예언되었던(습2:11, 말1:11) 바대로?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예배의 혁신이 가해진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모형적(模型的)이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직접적인 예배이며, 솔로몬의 성전과 같이 사마리아인의 거룩한 그리심 산과 같이 가견적이며 장소 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예배인 것이다(고전3:16). 하나님을 물질적인 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 내 이익만을 추구하고, 명예와 권위와 군중 심리만을 따라 큰 교회만 선호한다면, 그것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라 하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 요소의 가장 높고, 깊고, 고귀한 부분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 님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적극적으로 순종해야만 한다.
제 1 장 예배의 근본 원리
서 론
예배학은 설교학, 전도학(선교학), 목회학, 상담학과 함께 실천신학 분야의 하나이다. 신앙 인으로서 참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는 필요하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정립을 위하여 예배 학이라는 학문적 탐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모쪼록 예배학은 하나님께 대한 참 예배를 바르게 연구하고 체계화 시켜 실제 목회 현장에 적용시키는 과정이 뒤를 따라야 한다.
Ⅰ.예배의 실재(實在)
1.예배의 어의(語義)
예배(Worship)라는 말의 뜻은 원래 앵글로 색슨어(語)의 Weorthscipe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Worth( ```가치가 있는) 라는 형용사와 Ship(신분) 이라는 형용사가 합성되어 추상 명사를 만들고, 다시 Worship 이라는 말로 변하였다. 그 뜻은 가치를 돌린다(to ascride worth)인데, 일반적으로 신을 경배하는 마음, 예배, 숭배, 숭앙(admiration, adoration)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이 말을 경칭어로 사용하여 각하라 하였으며, 고어에서는 명예, 존엄 등으로 사용되어 훌륭한 인물을 지칭하는 명사(n)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Divine Worship)도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와 그 엄위를 인정하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시29:2).
2.예배의 정의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의 기초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로워지는 교제(communication)와 만남(meeting)이다.
또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예배에 대하여 말하기를?만일 그대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면 그대는 마땅히 그에게 예배하여야 한다?(Habere Deu- m est coiere Deum)고 하였다. 그리고 헉스터블(John Huxtable)은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대화이다?라고 하였다.
3.예배의 표현
예배란 신앙의 필요 불가결한 표현이다. 그 표현인 예배를 통하여 어떠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여 나타낼 것인지가 문제인데, 그것은 실제적으로 헌물(offering)을 통하여 표현된다. 헌물이라 함은 봉사와 선물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여 받아 주시기를 바라면서 내놓는다, 또는 바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헌물을 원하심을 알 수 있다(시96:8).
4.예배의 본질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는 어디까지나 그 근본이 하나님의 자의식(自意識)과 자기결정(自己決定)에 기초한 인격적 계약 관계이다. 즉 자연적 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뜻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주관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생을 부여하여 영원한 교제를 허락하신다.
원래 예배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실제적으로 이로워졌다. 즉 교제(communication)와 만남(meeting)의 예배가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후 흠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 대화가 단절되었고, 따라서 교제를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그 죄의 결과이다.
그렇지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죄인이며 무능한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의 자유의지 안에서 동작된 예지(叡智)요 그 사랑하심이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미리 아시고 선택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또 그 가운데 현존하시고, 궁극적으로 인도하시어 영생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와 그 축복에 대해, 주신 믿음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응하고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인 것이다.
5.특별 계시인 구약의 예배
인간에게 특별 계시로 주신 성경에 나타난 구약에서의 예배는 가시적(可視的)으로 나타난다. 즉 구약에서의 예배는 성막과 성전에서 거행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하는 사람들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하였다(출25:8, 22. 민17:4)
1)성막 예배
구약의 성막은 면회하는 집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성막에 임재해 계시고, 그의 백성과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42:1-4, 63:1-2).
성막의 구조는 성소와 지성소로 되어있고 그 사이에 휘장을 친다(히9:1-8, 출25:10-40). 이렇게 휘장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기억하고, 또 그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이다.
구약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신약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마27:51, 1:23, 사7:14, 요1: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된 성전?이시다(요10:19-21, 막14:58).
①지성소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1인이 1년에 한 번, 곧 속죄일에 들어가서 자신과 신자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들어갔다.(히9:7)
②성 소
흠없고 순전한 동물을 잡아 제단에서 죄의 희생을 드림으로 제사장은 신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③향 단
향불은 항상 꺼지지 않도록 제사장이 관리하였다. 그리고 향은 오늘날 기도의 상징으로서 가장 순수한 예배행위이다.
6.특별 계시인 신약의 예배
특별 계시인 성경에 나타난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로 드려져 그 부활하신 날, 곧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에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이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로서의 그 사명을 다하였다.
신약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모은다는 뜻의 교회(ἐΚΚλησία : 에클레시아)에서 드려지는데 신약의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엡1:23), 하나님의 전(고전3:16), 성령의 전(고전6:19), 하나님의 집(딤전3:16) 등으로 불리워 진다. 사실 신약의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는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 및 신자와의 교제, 그리고 신자들의 봉사와 헌물등 구약 시대의 성전 예배와 동일한 영적 진리를 갖는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그 소속되는 자격에 있어서도 중생한 자들이 속해 있으므로 무형적 교회란 의미에서 같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본래 종말론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에서의 예배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종말론적 의미를 갖는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인 천국이라는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현재에 천국을 소유하는 자들이다. 즉 오늘 이 시간에도 거리에서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성스러운 만남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은 예배를 통해 비로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예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편재와 구별되어 특별 계시에 의한 임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의 임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성령과 말씀에 의한 임재인데 그것은 말씀의 설교와 성찬식에 의하여 가장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7.예배의 요소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성스러운 교제요 친밀한 만남인데, 여기에는 필연적인 두 요소가 있다.
①신적(神的) 요소
예배에서의 신적인 부분으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되어 신자 개개인에게 찾아오시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성경봉독, 설교, 예전, 축도 등이다.
②교회적 요소
예배에서의 교회적인 부분으로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기도, 찬송, 헌금 등이다.
③위의 두 가지 요소는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예배 자에게는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수동적 역사를 체험케 하고,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응답함으로 능동적인 역사를 체험케 한다. 신자가 예배에 참석하여 이와 같은 쌍방의 역사(신인화합:神人和合)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8.예배의 목적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높이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라고 하였다(고전14:3-5, 26. 엡4:11-16).
칼빈주의를 위시한 개혁파 교회에서는 예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하였다.
루터는 예배의 목적을 ?죄인의 개종? 또는 ?공중의 교육?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조심하여야할 경건주의 자들은 예배의 목적을 성도의 교제라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진정한 예배의 목적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성도가 완성되며, 죄인이 개종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Ⅱ.예배의 원리
예배에는 몇 가지 기본 원리가 있다. 이 원리들은 예배 행위를 바르게 정립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필수 불가결의 기본 원리이다.
1.계시와 응답
예배의 원리는 먼저 하나님의 계시에 입각한다. 하나님은 초월적 지식의 그 깊으신 예지(叡智)로부터 타락한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신 계획으로 인간을 끝까지 인도하사 영생토록 구원하신다. 이러한 주권적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로서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경외와 감사와 신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예배의 다음 원리는 인간 편에서의 응답이다. 이 응답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와 그 계시의 말씀과 이를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진정한 응답이다.
기독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실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종교이다. 즉 기독교의 사상은 불완전한 인간 이성의 논리 체계에 입각한 어떤 것이 아니고, 인간의 상상과 추상인식 속에서 창출된 고대 신 개념의 근거 없는 어떤 것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과 생생한 역사적 근거 위에 서 있는 확실함이 있다. 이러한 점이 기독교가 타종교와 다른 점이다. 기독교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생생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일하시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셨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특정한 히브리 민족들의 생활 속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히브리민족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 민족들의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의 종으로 나타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고, 그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언약하셨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도성인신케 함으로 타락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무능한 인간들을 다시 살리시는 구속의 대장정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폭로?(self-disclosure of God)이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 곧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와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이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선포(saving acts)이며 거기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당연한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예배자의 마땅한 도리인 것이다. 진정한 예배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배가 원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이라면 그 계시된 말씀의 선포는 예배 자들의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배하는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참회와 감사와 헌신과 찬양의 응답이 넘쳐나게 된다.
2.성령의 내적 증거
본 장에서 예배의 원리를 말하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참된 예배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그 내적 증거로부터 출발을 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뜻하심과 그 행동하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그리고 믿음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자에게 주어진 불가항력적 은혜의 사실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예배의 응답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신자에게 주어지는 그 은혜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의 응답을 할 수 있다라고 인간 자신의 자유 의지 안에서 합리화시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예배의 원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류의 말씀들이 생생하게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즉?믿으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그러하고, 또 ?믿어졌다?라고 하는 수동적으로 말씀하시는 그 계시의 뜻이 그러하다.
예를 들면?주 예수를 믿으라?(행16:31)는 명령문(VMAA)으로 그 뜻은?must needs?이다. 이는 반드시, 꼭, 틀림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는 그 시상이 부정 과거형으로 이로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뜻은 단번에, 계속하여, 변함없이 라는 강조 점을 더욱 부여한다. 그러므로 믿어라 라고 하는 말씀은 ?단번에 변함없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것이다. 여기에 신자 자신의 결정권이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반(反)하여 신자 자신의 전적 타락한 내적 자유가 습관적으로 발동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며 주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 하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예배의 응답이 하나님으로부터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한다. 그리고 성령의 내적 증거는 고정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신자의 마음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실이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감동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의 감동이라고 한다. 이 성령의 감동만이 참된 예배의 응답을 이끌어 낸다.
성경 말씀에 성령의 감동은 모든 기도의 참된 근원이라고 하였다(롬8:26, 히7:25, 요14:-16:). 이와 같이 참된 예배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성령의 간섭 곧 그 억제 하에서의 기도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의하여 일어나는 예배의 원리는 자유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억제라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일련의 무리들이 여기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편다. 즉 성령은 자유의 영으로서 바람처럼 임으로 불며 즉흥적 응답을 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무리는 성령은 자유로운 영적 은사의 표현을 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상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전적 타락한 인간의 자유 의지대로 하나님 자신의 사상을 왜곡되도록 방치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예배는 하나님의 뜻하시고 의도하시는 바에 의하여 분명히 제약을 받는다. 성령은 영원하며 자기 모순이 없는 진리의 영으로 곧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 성령의 기능은 그리스도를 증거 함에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각하심과 그 일들을 생생하게 갖고 계시며 그것들을 우리에게도 역시 생생하게 보여 주신다.
예배의 진실성은 예배 형식의 유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예배는 성령의 인도와 보호, 그 감동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밀접한 연합관계로 이끌어 간다. 이는 분명 참 예배 자는 성령의 지도와 억제아래 있고 그 분의 의도대로 자신을 복종시킨다. 예수님은 요4:24에서 기독교 예배의 원리를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
3.본질적 공동체 예배
예배란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의 행위이다. 즉 기독교 예배의 원리는 ?본질적 공동체 행위?(essentially a cooperative<corpo- rative> activity)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의 의지로 불러모은 무리인 교회(ἐΚΚλησία : 에클레시아)의 기능과 존재 이유는 ?본래 또는 반드시, 뚜렷이 하나님께 대하여 공동체적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적 공동체 행위는 ?없어서는 안될 긴요한 것으로서 완전한 것이며 전혀 나무랄 데 없는 엑스(extract) 같은 향기를 흘러 넘치게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공동체(共同體)라고 하는 것은 공동(cooperation)의 어떤 목적을 위해 서로 협력하고 서로 협동(work together)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롬8:28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였다. 즉 서로 합하여 협력과 협동으로 서로 작용하여야 선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선한 목적, 그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참된 예배란 이미 말한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러한 예배로서 응답하는 것은 그 깊으신 뜻 안에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전적 타락으로 죽을 수밖에 자리에서 궁극적 구원으로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적으로 죽어버린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贖罪)하여 다시 살려 놓으시고 그 하신 일에 대한 합당한 영광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요구에 본질적 공동체 예배로서 응답하여야 한다.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 공동체 안에는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이 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유형 교회라는 개념과 하늘에 있는 무형 교회라는 개념인데, 이 둘을 합하여?우리들의 교회?라고 하며, 이는 한 교회의 두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조직된 진정한 교회의 소속이라는 의미이다.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의 예배는 그 속성상 ?전 교회?(whole Church)의 예배라고 한다.
제 2 장 예배의 역사
서 론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역사를 탐구하는 것은 고래로부터 전승되어온 진정한 예배의 양상을 우리로 하여금 바르게 깨닫게 하여 준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나타난 그 예배의 역사를 바르게 탐구하여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현대에 있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참된 예배의 모습을 알아보자.
Ⅰ.족장 시대 이전의 안식의 개념
창 2:1-3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마치심과 함께 인간 창조 직전의 상황을 전개하여 안식의 개념을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서 이 개념이 무엇인가를 곧 창조될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 계시의 개념은 안식(ת??)이다. 그리고 이 안식의 개념은 3절에서 정확하게 밝혀진다.?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여기에서 복은 하나님의 ?선의의 효과적 발동?이다. 즉 이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라는 특별한 의도인 것이다.
다음은 거룩하게 하셨으니(שׁ???) 인데, 안식의 진정한 개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즉 거룩이란 구별되는 것이고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경외와 종교적 두려움)에 있는 것이다. 곧 일곱째 날 안식일은 다른 날과 구별되고 하나님께 바쳐진 날이라는 명확한 개념이다. 이 날은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은혜를 입은 객체들이 명령을 지켜 거룩하게(שׁוֹר? : ἅγιο?) 함으로서, 모든 것을 제쳐두고 하나님께만 경외와 존경과 헌신과 순수와 정결함으로,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준비한 제사나 번제물을 경건한 의식으로 드리는 날로 제정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의(義)의 영원한 법칙에 근거한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외적 관계에서의 신성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안식의 날을 지킴으로 도덕적, 영적, 의식적으로 순결한 축복을 받는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안식일에 개념은 인간 창조 이후 그들의 역사 속에 그대로 반영되어져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Ⅱ.족장 시대의 예배
창3: -4: 에서는 인간 타락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covenant of grace)이 제정된다. 이 은혜 언약은 장차 오실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 분이 오시기까지에는 타락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죄를 속죄하기 위한 어떤 것이 필요하였다. 곧 타락한 전 인류의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물론 이것의 제정은 인간의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 안에서 이로워진 일이다.
그러므로 창5: 이후부터는 아담-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고대의 족장시대가 열리면서, 인간 타락 이후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은 그 통일성을 변함없이 유지하면서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 족장 시대 예배의 확실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고대 예배의 최초 역사는 아브라함의 시대(B. C. 2166년)를 놓고 볼 때 그 이전의 시대인 아담까지로,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연대이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하여 인류 최초의 시작과 함께 동시적으로 일어 난 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이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예언자, 제사장, 왕 등으로 불려졌다(창14:18). 그리고 이들 족장들은 공적인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가족과 더불어 가정에서도 예배를 인도하였다(창18:19). 특히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는 구약 예배의 기사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예배 행위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창12:7-8, 13:18),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제단을 쌓고 예배할 때에 하나님은 그 자리에 친히 임재하셔서 순결한 축복을 내리셨다. 이 때의 제단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예표인 희생 제물이 단 위에 바쳐졌다(창15:9-10, 22:5-8). 이와 같은 기록은 야곱에게서도 나타나 그는 특히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념하여 ?엘벧엘?이라는 지명까지도 지어 불렀다(창35:1-8).
후기 시대의 여호수아도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극히 강조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섬기라?(수24:14)고 하였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고 하였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참 예배로서 응답하는 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들의 마음속에 임재하신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어떠한 처지, 어떠한 형편이든지 참된 예배가 존재한다.
Ⅲ.율법 시대의 예배
출애굽 후 모세는 아론의 반차를 쫓아 특별한 제사장들을 지명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 매주, 매달, 그리고 특별한 절기에 제사를 하도록 권장하였다. 이후 율법 시대에는 족장 시대의 예배보다 좀더 발전된 성막 예배 형태로 유지되다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치면서 한층 더 발전된 성전 중심 예배로 바뀐다. 이 성전 중심 예배에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1.성전 예배
율법 시대의 예배는 성전에서만 드려졌고, 희생 제물도 역시 성전에서만 드려졌다.
2.규정된 예배
성전의 시설 방법과 그 내용, 제사장의 예복, 희생 제물의 종류와 방법 등 예배의 세부 규정을 제정하고 이에 준하여 예배를 드렸다.
3.위탁적 예배
위탁(委託)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일을 대리(代理)로 했다는 말이다. 그와 같이 율법 시대의 예배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리하여 예배를 집행했다. 그러나 무교절, 장막절, 맥추절은 이스라엘 백성중 12세 이상의 남자에 한하여 모두 성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렸다(출2:14-17).
4.의식적 예배
율법 시대의 예배가 의식적(儀式的)이라고 하는 말은 예배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쳤다는 의미이다. 즉 이 때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기보다는 인간적인 행위의 요소가 더 크게 작용되었다. 오늘 날 카톨릭 예배의 의전이 그 비슷한 양상이다.
5.상징적 예배
상징(象徵)이라고 하는 말은 추상적인 어떤 것을 가시적(可視的), 또는 구상적(具象的)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든 율법 시대의 예배는 역사적 사실성을 분명히한 하나님의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소위 가시적, 구상적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구약의 예배 형태는 그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시기 전에 행해졌던 불완전한 예배의 모습들이다. 결국 구약에 나타난 모든 예배(제사)의 형태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신약의 예배로 인하여 더욱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그 불완전한 형태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뜻에 의
하여 이로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예배 의식은 그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象徵)이요, 그 모형(模型)이다.
Ⅳ.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
서 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한 성전 예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침공 당한 후 성전 파괴(왕하24:14. 여호야긴 왕, B. C. 597)와 함께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됨으로서 희생 제사를 포함한 전형적인 성전 예배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성전을 잃어버린 그들은 바벨론의 통치하에서 회당중심의 예배 형태로 허락을 받는다. 이 회당중심의 예배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 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회당 중심 예배의 특색은 다음과 같다.
1.회당 예배의 형태
①의 미: 회당(synagogues)은 헬라어 συναγωγή 에서 온 말로 함께 모음, 수확의 뜻이 있다.
②기 원: 바벨론 통치하에서 성전 예배 대신 허용된 것이 그 기원이다.
③예배의 중심 요소: 기도, 성경 낭독과 해석,
④특 색: 정규적으로 함께 모이는 유대인의 회당(집회소)으로 안식일이나 제일(祭日)에 모였으며 후에는 주 둘째 날이나 다섯째 날에 모였다.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의 모임을 가진 건물로 지칭되었다. 희생 제사 재건 및 회당 제도가 존속하여 성전예배와 회당예배가 병행(느8:1-6)되었으며 흩어진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어느 곳에서든지 회당이 설립되었다(행6:9,13:5,14:1,17:1). 그리고 회당은 유대인의 종교와 사상,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2.회당의 구성과 운영
눅7:3-5에 의하면 회당은 장로들로 구성되었고 그 장로회의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 회의에서 선출된 회장당이 있었으며 회장당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도 하였으며 회중에게 권면을 하기도 하였다(행13:14-15). 또 그는 회당을 관리하고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구제금을 모으고 분배하였다. 그리고 회당에는 랍비를 두어 설교와 권면을 하게 하였다.
3.회당 예배의 순서
행15:21에 의하면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희생제사가 없는 예배를 거행하였다. 그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쉐마(shema) 낭독
②기 도
③율법 낭독
④예언서 낭독
⑤설교 및 권면
⑥축 도
⑦찬송은 확실치 않으나 시편과 아론의 축복 시를 노래한 듯 하다.
4.회당의 시설 방법
강단에는 일곱 촛대를 세우고, 그 중앙에는 임시 법궤를 설치했고 그 속에는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이 기록된 두루말이를 넣었다. 회당 안의 기둥에는 포도나무 장식을 하였고, 건물 외부는 화려하지 않았다.
5.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의 병행
이미 언급한데로 포로 귀환 이후 유대인들은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를 병행하여 드렸는데, 성전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 제물과 함께 대속제를 드렸다. 그러나 동시대에 같이 이로워진 회당 예배는 각 마을마다, 각 지방마다 건립되어 있는 회당에서 제물이 없는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예배는 의식을 행하는 정규 예배를 비롯하여 유대인의 절기마다 큰 행사를 위해 각처로부터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고, 회당 예배는 정규 예배 외에 성경 공부와 선지자의 교훈을 가르쳤다.
Ⅴ.예수님 시대의 예배
서 론
포로 귀환 이후의 성전과 회당 예배 형태는 예수님 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성전은 오직 하나로 우리가 잘아는데로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들이 건축한 간소한 스룹바벨 성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B. C.40-4년 유대인의 관심을 사기 위한 헤롯 대제에 의하여 웅장한 건물로 대체된다. 이 성전은 소위 헤롯의 성전이라 명명하였는데 B. C. 19년에 착공하여 예수님 당시까지도 준공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요2:20), A. D. 64년에 이르러 완공하였으나 불과 6년 뒤인 A. D. 70년에 로마인들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성전의 규모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놀라워했을 정도로(막13:1), 최고급의 화려한 색깔, 거대한 돌과 대리석, 그리고 황금으로 지어진 것으로 성전이라고 하기보다는 복잡하고 위압적인 하나의 신전 건축물이었다. 예수님 당시 이곳에서는 제사장들과 성전 수종 자들의 집례로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제사 의식과 경배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성전은 상주 주둔하고 있는 로마 수비대에 의해 낱낱이 감시를 받고 있었고(행21:31), 이방인의 뜰에는 예수님의 노여움을 샀던 장사하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의 각 지역사회마다 있었기 때문에 이 곳 저 곳에 많았다. 여기에서는 제사 의식이 거행되지 않았으며 예배와 율법 연구 및 각 지방 중심 역할을 하였다. 안식일에는 남녀회중이 모였으며 그들은 각각 자리를 따로 하여 앉아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들었으며(눅4:16), 기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회당은 예배 처소 이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역사회의 학교요 공동체의 중심이요 또한 지역행정의 본부였다. 따라서 회당의 장로들은 지역사회의 행정 당국자들이요 행정관들이요 자칫 공중 도덕의 파수군들이였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 연구에 철저하여 자기들 유전의 목록에 의한 율법 학자 백성으로 비대해져 가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그 유전 목록에 의한 율법들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그들 사회를 지배하였다. 이에 맞추어 율법과 유전의 직업적인 전문가인 서기관이 생겨났고 이들은 자기들 유전 목록에 의한 율법과 규제를 만들어 하나님의 사상을 비하시키는 큰 오류를 범하였다(눅6:1-2, 행1:12, 막7:1-13, 3:4-5, 마232:23).
또,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의 당파와 당과 운동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 등과 묵시문학 운동 등이 일어나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빗고 있었다.
1.예수님 시대의 예배
위에 열거한대로 예수님 시대는 구약의 불안전한 시대의 마지막이요 인간 타락의 극치를 자아내는 타락한 그 유전, 전통, 관습의 형성기 이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의 응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대대적인 반대와 박해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성전과 회당 예배의 차원에서 볼 때, 본질적 공동체 예배의 그 근본을 바르게 제시하심으로서 일어나는 큰 혼란을 유대의 지도자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과 회당에서의 예배를 반대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그 예배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참 예배가 이로워지도록 그 오류를 시정하시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의 지상 생애에서 새로운 예배 형태를 만드시지 않으시고, 당시에 같이 존속한 성전과 회당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출석도 하시고 설교도 하시었다(막14:49, 눅4:16).
그러나 예수님 부활하신 후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제자들로부터 신약 시대 교회의 예배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즉 제사 제도는 없으나 성령의 인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있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할 때에 어느 시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 인간간의 흘러 넘치는 교제가 일어났다. 이제는 구약 시대 예배의 불완전한 피의 제사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단 한 번의 피의 산 제사로 그 완전한 성취를 이루었으며, 또한 누구든지 하나님이 선택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그 은총과 사랑을 단 한사람도 빠짐없이 그리고 끝까지 받게 되었다.
2.신약 시대 예배의 기초는 다음과 같다.
1)구약의 의식적 예배가 완전히 폐지되고 새로운 영적 예배가 탄생했다(요4:24).
2)신약 예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성찬식(마26:26-29, 고전11:22-29)과 세례식(마28:19-20)이 제정되었다.
3)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불완전한 구약의 의식적 예배는 참으로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Ⅵ.사도 시대의 예배
서 론
예수님 부활하신 후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오순절을 깃점으로하여 신약의 새 교회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하여 탄생되었다. 그 태동은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으로서 이곳에 처음으로 모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로 이로워졌고, 이들은 수많은 나라에서 모여들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는 이 혼합한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각 나라 방언으로 역사 하셨다. 그들은 각각 자기 지방의 말로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예배함으로서 큰 은혜가 넘치는 참된 예배로 하나님께 응답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지대하다. 성령은 인격체이신 제 3 위 하나님이시며(요15:26, 롬8:26), 그리스도의 사자요(행16:7, 1:4), 교회의 창설자요(행2:2-3, 2:43-46), 교회를 하나로 묶는 힘이요(행10:44-48, 11:1-18), 신자들 배후의 권능이요(행4:8, 6:10), 교회의 생명이다(행9:31, 15:28). 여기에서 기독교의 본질적 공동체 예배의 진정한 출발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설교 역시 종교적인 의무나 도덕적인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늘 날 교회 예배의 설교에서도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본질적으로 반드시, 뚜렷이 강조되어야 한다.
1.사도 시대 예배의 장소
사도 시대의 예배의 장소는 초기에는 사원이나 다락방 등에서 드려졌다.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를 중심한 예배가 있었고(행3:11, 5:1-13), 가정집에서도 매일 예배가 거행되어 기도와 떡을 떼었으며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행2:46-47, 5:42). 예루살렘 이외의 장소에서도 그렇게 예배하였다(행19:9, 20:8).
2.사도 시대 예배의 특색
1)전도 형식의 예배
전도 예배는 그 특성상 개방적이고 비형식적이다. 그러므로 이 예배에 불신자가 참석하였다가 결심하고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고전14:23-25). 이 예배의 특색은 오늘날의 부흥집회와 비슷하여 자유롭게 진행하는 집회로서 교인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청중들에게 덕이 되는 은혜로운 말을 하였다(고전13:34).
2)예배의 순서
예배의 순서는 기도, 찬송, 성경 봉독, 설교, 예언, 방언과 축도로 진행되었고, 즉석 기도의 장소가 마련되어 은혜를 더하였다(행1:24-25, 4:23). 특히 주기도문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딤전2:1, 눅1:46,68. 딤전3:16, 계5:9-13, 12:10-12, 19:1-2, 6-8).
3)예배의 시간
예배는 주로 밤에 드려졌다. 그 이유는 사랑의 축제 또는 사랑의 식사(agape meal)라고 하여 매일 밤 가정집에서 모여 각자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주의 만찬을 겸한 식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에 감사와 기도와 간증이 동반되었다(고전11:17-34). 그러나 이 예배는 시간이 감에 따라 많은 폐단이 생겼고(고전11:20-21), 후에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중지되었다. 그리고 성만찬은 교회에서만 행하게 하였다.
Ⅶ.중세 시대의 예배
중세 시대 예배는 두 말 할 것 없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식이다. 중세 시대는 로마 카톨릭의 전체적인 통제 아래서 그 의식이 집행되었다. 이들은 미사(mass)라는 행위를 통하여 의식 중심의 예배를 집행하였다.
1. 미 사(mass)
미사는 로마 교회는 기본적 예배형태이다. 그 특징은 구약의 성전 예배를 변형시켜 카톨릭사제가 집례하였다. 언어는 라틴어를 사용하여 청중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였으나 장엄한 분위기를 통하여 권위와 존엄성을 부각시켰다. 또 성경은 개방되지 않았으므로 무슨 말을 하든지 사제의 강론에만 의존하였다. 생활 속에서 이루워져야할 그리스도의 삶과는 거리감이 있는 의식 예배 이였다.
2.기 도
미사에 따른 중요한 부수적인 일과에 하나는 성무일과(聖務日課)였다. 이는 이들의 기도의 시간(hours of prayer)으로 수도원 일과에서 중요한 의무(officium)로 준수되었다. 보통 성무라고 하는 이 기도는 찬양대 석에서 읽거나 노래(quire offices)로 불렀다. 후기에는 카톨릭 교부들에 의하여 의무적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다가 일정한 형식을 갖춘 공중 기도(ordered public prayers)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4세기말에 가서는 매일 6회의 공중 예배가(daily public services) 행하여졌다.
Ⅷ.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서 론
중세 시대의 교회 예배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으로만 치우쳐 교황의 권위와 그 존엄성만을 위하였다. 기독교 본래의 교리적인 면도 크게 훼손시켜 성만찬 대신 화체설을 주장하였고, 7성사(sacramental system) 속에 교인들을 묶어 두고서 그것을 떠나면 구원도 은총도 없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들은 종교 개혁 이전까지 외형적, 가견적, 제도적, 계급적 교회를 유지시켜 교회의 본질과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종교 개혁은 교회의 본질과 그 의미를 되살리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신자들의 내면적, 영적 교제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을 찾았고 더 광범위하게는 신자의 주관적 교통에서부터 영적 실재를 찾고자 했다. 즉 초대 교회 성령의 역사를 간절히 바라고 찾았던 것이다. 참 예배의 합당한 교회의 개념이 정립되어 교회의 참된 표지는 말씀 선포, 성례의 참된 시행, 진지하고 열정적인 권징에 있다고 하였다(Reformed). 따라서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제도에는 근본적 변화가 오게되었다.
1.말씀 중심의 예배
종교 개혁 시대 예배의 가장 특별한 것은 말씀 선포가 그 중심이 되는 예배 형태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 개혁 시대의 개혁자들은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라는 의미에서 말씀선포 중심과 함께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自國語) 중심의 예배를 주장하여 예배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끌었다. 이는 공히 개혁 교회들의 공통점이다.
당시 개혁세력의 중심 인물 루터와 칼빈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말씀 선포를 우위에 두고 성경을 강해하며 신자들의 실생활에 말씀을 적극적으로 적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도 적극적으로 개방하여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개혁자들의 이와 같은 노력은 오늘 날 세계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중심이 되었고 하나님이 찾고 원하시는 참 예배의 본질적 의미를 되찾게 했다.
2.성찬의 본질성 회복
종교 개혁 시대 예배의 또 하나의 특성은 성찬의 본질성 회복이다.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化體設)에 의한 큰 오류를 개혁자들이 나서서 성경적인 성찬(Lord`s Supper) 이론으로 정립시키고 그대로 실천하도록 노력한 것은 주의 성찬의 참다운 의미를 본질적으로 회복케 한 쾌거라 아니할 수 없다.
3.예배의 찬송
중세 교회의 찬송은 소수의 성가대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개혁 교회의 찬송은 회중 전체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 참된 예배의 향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개혁자 루터는 손수 찬송을 작사 작곡하여 예배에서 사용하였고 칼빈은 새로운 찬송과 시편 송을 회중에게 적극 권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4.예배 의식 문제
예배 의식 문제에 있어서는 개혁의 중심 인물 루터와 칼빈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카톨릭 미사 의식에서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존속케 했다. 그러므로 그의 예배 의식은 라틴어, 의식, 등불, 향, 제복 등 카톨릭 미사의 요약 판을 방불케 했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미사 제도를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예배 형태를 취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교회 안의 각종 장식이나 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락시키는 것으로 단정하고 오로지 초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성경 적인 예배를 할 것을 적극 권장하였다.
Ⅸ.현대의 예배
종교 개혁의 새로운 예배 속에서도 점차 그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참된 예배의 빛은 쇠퇴하기에 이른다(18세기). 이에 새로운 각성 운동이 일어나 형식적인 예배 의식보다는 영적 부흥에 주력하는 운동이 현대(19세기)에 이르러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다.
1.옥스포드 운동(Oxford 運動)
19세기(1833-1845),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영국 국교회(國敎會)내에서 일어난 신앙 부흥 및 교회 개혁 운동으로 국교회의 세속화, 감리교 파의 성장, 카톨릭 개종자의 속출 등, 국교회가 위기에 처하자 퓨지, 키블, 뉴우만 등이 지도자가 되어 국교회 자주성을 확립할 목적으로 운동을 일으켜 어느 정도 성공은 거두었으나 이들은 의식주의(Ritualism)자라고 비난을 받았고 그 결과로 영국 국교회는 분열하였다.
2.청교도(淸敎徒) 혁명
청교도는 영국 Protestant의 한 파(派)이다. 이들은 영국에서 종교 개혁이 흐지부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개혁의 철저화를 추구하며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일어났다. 크롬웰의 지휘하에 청교도 혁명을 일으키고 일부가 신대륙으로 건너가 아메리카 뉴잉글렌드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들의 헌신적인 신앙과 금욕주의적 윤리는 프로테스탄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의 예배 구조는 영국 국교회의 아침 예배에 동화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성찬 예배의 특징인 그 중심성(centrality)과 객관성(objectiveness)을 잃게 되고 말았다.
3.현대 예전 운동(ilturgical movement)
성경적 근거와 기독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예배 의식에 대한 연구가 현대에 와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예배 의식의 혼란이 결코 예배 행위에 이롭지 못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나 개혁파 교회를 막론하고 예배의 변화와 그 방법론의 개선에 노력하고 있다.
제 3 장 예배의 기본 개념
예배의 기본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찾고 원하시는 참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기본 개념들을 찾아보자.
Ⅰ.예배의 주체이신 하나님
1.예배의 주체
예배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 아니다 라는 점을 먼저 강조한다. 타락이후 조상 대대로 내려온 그 유전과 전통, 관습에 길들여져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는 경향이 많다. 즉 우리의 자유 의지와 자기만의 이익 추구, 그리고 자신의 편리함만을 쫓아 예배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성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그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타종교처럼 인간이 신에게 봉헌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다. 이러한 개념들은 인간이 그 예배의 주체가 되어 인간의 공력(功力)에 의한 예배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인간으로 하여금 예배를 하도록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배란 그 기본 개념이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심으로 보다 본질적이다.
첫째,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예배이며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가 선행되는 예배이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뿐이다.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이후 전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이다.
2.예배의 객체
창 2:1-3은 창조의 주체(1절)를 강조하심과 동시에 그 창조 개념에 입각한 안식의 개념(3절)을 명확히 하셨다. 즉 천지간의 전 피조물은 안식이라는 구별된 의미 안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안식(ת??)은 하나님 주체의 날로 인간 편에서는 그 날을 축하하며 지켜야만 하는 ?객체로서의 의무를 이미 부여한 것?이다.
특히, 이 말씀이 인간이 창조되고 타락한 이후에는 레23:1-3에서 더 뚜렷하고 명확하게 규정되어진다. ?일곱째 날```, 성회```, 여호와의 안식일?. 특히 레위기 입법의 기본 원리는 ?말하다?(dibber) 라는 동사를 수없이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언급임을 강조함으로,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안식일에 드려지는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그 객체는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강조한 억제책(抑制策)이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예배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신 성령 안에서 참 신앙의 응답만이 있을 뿐이다.
Ⅱ.예배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1.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14:6-7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only Way)이심을 명확히 하셨다. 즉 성부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사이의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씀이다.
삼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창조의 행위등 모든 것을 함께 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그 근거는 창2:1-3으로 창조개념에 의한 예배의 규정에서 이미 나타났다. 그리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삼위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행위 속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동시적으로 동작하신다.) 인간의 타락과 그에 따른 자신의 거룩한 속죄의 죽음까지도 이미 작정하셨고, 인간 타락 이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작정에 필연적으로 응(應)하셨으며, 부활하신 이후에는 이미 작정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 그림자로 나타났던 구약 예배의 불완전한 모든 요소가 폐지됨과 동시에 그 성취 자요 그 완성 자로서 예배의 주체가 되셨다(히5:5-6, 6:20, 7:3,21-22).
따라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길, 그 오직 하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 중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타락하여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흠이 없고 순전하게 하는 그 중보에 의하여 비로소 하나님과 직접 교제(communication)하고 만남(meeting)이 있는 진정한 예배를 가능케 하셨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의 객체인 인간은 성령의 감동으로 인도되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속의 은혜에 의하여 참 예배가 되는 산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롬12:1).
2.예배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9: 전체는 그리스도 희생의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약 예배의 그림자요 모형인 구약의 제사와 제물에 대하여 구약의 그 불 완전성을 먼저 규명하고(1-10), 신약 제물의 완전성을 논하면서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피인 것(11-22)과 그 제사가 단번으로 영원히 바쳐진 것(23-28)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구약의 불완전성의 규명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새언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옛 언약의 인간 제사장의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속죄의 제사가 새 언약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하고 완전한 구속의 역사가 성취됨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예배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구약이 신약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 같이 구약의 제사는 신약 예배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며 제사와 예배의 핵심인 희생의 속죄를 흠없고 죄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심으로 예배의 완성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마18:20)와 그 중보 되심(요일2:1)과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의 인도(엡5:18, 골3:16, 고전14:26, 행13:2)이다.
Ⅲ.영적 예배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신약의 예배는 영적인 예배이다(요4:24). 이것은 완성된 예배의 그 본질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영적인 예배에도 어떤 형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형식과 의식인데 이것은 인간 주체의 형식과 의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주체의 형식과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서문에서 영적 예배의 본질을 말하였기 때문에 본 장에서는 성경에 나타나는 영적 예배의 형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1.영적 예배의 형식
예배가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배의 형식(形式)이나 의식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예배와 비교하여 그 형식이나 의식이 간소화 하기는 했으나, 형식이나 의식의 전면적인 부정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이 말의 참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한 내적 진리를 동반하는 형식과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영적 진리 안에서의 형식과 의식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초한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어떤 형식과 의식은 참된 예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적 예배에는 형식(form)이 필요하다. 형식이란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외형 또는 격식인데,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추상 인식에 의한 사물의 발현이나 방법이 아니다. 내적으로 위선이 없고 거짓이 없으며 참된 예배를 지향하는 그 외형과 격식으로 분명하고 명확한 성경 적인 방법의 형식(form)이다.
2.영적 예배의 의식
영적 예배에는 또한 반드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 이 의식은 참된 예배를 위한 예의나 의례를 말하는 것으로 본질적 공동체 예배에 있어서 질서 있게 하는 한가지 방법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서로 합하고 돕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참된 예배에로의 질서 있는 접근 방법이다.
이러한 형식과 의식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나아가며 경건한 태도로 질서 있게 그리고 예의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3.형식과 의식에 있어서의 주의 할 점
앞에서 언급한대로 영적인 진리 안에서의 형식과 의식이라는 점을 항상 앞세워 기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여야 하나, 자칫 그리 치기 쉬운 경향이 많다. 다음에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열거한다.
1)예배자의 자발성을 억제하여서는 안된다.
2)전통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에 주의해야 한다.
3)참된 예배를 위한 형식과 의식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Ⅳ.공동체적 예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εΚΚλήσια)는 그 기뻐하시는 자들이 서로 모여 공동체적으로 예배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공동체적이다 라는 뜻은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 행위의 집약 또는 개인적 교회의 행위라는 틀을 벗어나 하나님께서 불러모은 무리(εκκλήσια)인 그 백성들의 공동체적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다음 몇 가지 형태가 있다.
1.회중에 의한 공동체
한 교회에서 같은 찬송, 같은 설교를 부르고 들으며 또 같이 기도하며 봉사하는데서 회중은 서로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이 한 교회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이 그 원리이며 기초이다.
2.교파에 의한 공동체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들은 둘이 아니요 서로 하나이다. 하나님도 하나요 성경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로서 서로 같은 공동체이다. 같은 신앙고백과 같은 신조아래 교권이나 기타 정치적 이유 등으로 교파가 분리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하나된 몸을 찢는 비극이다. 그러므로 같은 신앙고백 같은 신조아래 모이는 교회들은 하루 속히 서로 하나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3.우리들의 교회라는 의미의 공동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하나된 이 세상의 모든 교회나 교파는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천상 교회와도 일치됨을 나타낸다. 그리고 지상의 유형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분열이 있을지라도 천상의 무형 교회와는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소규모의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이 불러모은 무리는 미래적으로 틀림없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그대로 맞이할 것이다. 우리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그 백성들의 준비요 그 기초이다.
Ⅴ.예배의 질서
고전 14:40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하였다. 절제(고전11:22, 13:5, 14:30)와 질서(고전11:3, 12:19, 14:27)는 영적 예배에 있어서 필히 갖추워야할 이대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소를 통해 교회의 신령한 덕을 세우며 또 신령한 은혜로 풍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심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절제와 질서로 조화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표현이다.
1.아름다운 예배
영적인 예배는 진리 안에서 내적으로 아름다운 예배이다. 즉 신앙인의 내면적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말씀으로 인하여 극히 아름다운 향기를 나타낼 때 그 예배는 아름다움이 충만하게 된다. 약 2:2-9에는 교회 안에서 사회적 신분을 초월한 이웃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내면적 아름다움의 그 구체적 실 예라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겉모습은 절제와 질서로 인하여 비록 초라하고 수수할지라도 그 내면의 영적 아름다움이 충만할 때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비할 수 없는 것이다.
2.기쁨의 예배
시 100:1-4에서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갈지어다?(2절)라고 하였다. 그리고 4절에서?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시로서 품위 높고 아름다운 예배에로의 인도함이다. 특히 여호와를 섬기라는 말은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장소에서는 감사한 마음으로 들어가고 나오라는 것이다.
3.절제와 질서의 예배
고전14:40의 말씀은 교회 내에서 신자 상호간에 발생하기 쉬운 신령한 세계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영적 세계의 무질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혼돈 시키고 분열시키며 파괴시키기까지 한다. 영적 은사를 사모함은 간절해야겠으나 그 은사를 소유함은 조용하며 성령의 인도대로 절제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질서 있게 창조하시고 이를 질서 있게 관장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 섭리에 조화하여 아름다운 예배를 드려야 한다.
Ⅵ.성경적 예배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은 성경으로부터 나온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 계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니 자연계시가 있다 해도 그것을 말과 글로서 인간에게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기록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인간에게 주셨다. 그리고 이 특별 계시로 주신 성경 안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같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일찍이?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히4:12) 라고 하였다. 또 예수님께서는 마5:18에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ήν λέΥω ύμίν)라고 하는 신적 권위의 그 진술과 그 선언으로?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그 진실성을 확인하여 강조하시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도무지 인정치 않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는지도 모른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평은 전문화 된 학문으로까지 자리를 굳히고 7대 부분으로 세분화하여 성경을 비평하여 왔다. 그 결과 성경 비평
은 인간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고무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하고, 성경 비평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조 속에서 도리어 긍정적인 반응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큰 힘을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간의 정신 세계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다.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참된 예배의 의미를 되새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로 전환해야 한다.(성경적 예배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되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그 예배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Ⅶ.자유케 하는 예배
요 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였다. 또 고후 3:17에 는?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자유란 진리를 터득함으로 오는 영적 해방이요 완전한 자유이다. 즉 함축성이 무한한 위대한 원칙으로 인간 정신 세계의 근본을 바르게 정립시켜 주는 위대한 말씀이다.
일반적인 무신론의 세계에도 각기 그 진리가 있다. 법의 세계에서는 진리, 정의, 공평을 부르짖는다. 철학의 세계에서는 이성적, 합리적으로 진리를 찾고자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과학적 이론과 그 증명으로 진리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들은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악법도 법이다 라고 하지 않는가?
일반적인 진리 탐구의 모든 것들은 보편적인 무지에서의 해방이지 더 근원적이며 진정한 죄에서의 해방이 되지 못한다. 곧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멍에요 속박이다. 타락한 인간군(群)의 그 소속에서의 종살이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멍에와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사 자유함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인간의 타락한 유전과 전통, 그 관습에 따라서 인간 자신들이 스스로 추구하는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되 대신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놀라운 구속의 은혜로부터의 자유함인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언급한대로 자유함에 근본이요 본질이다. 이 자유함에 근본과 본질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실 때에야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자유라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자유 함을 근본으로 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탐구하면 진정한 그 완성을 성취케 한다. 인간을 자유케 하는 예배, 그것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떠나서도 그리스도인의 실제 삶 속에서 이루어만 한다.
제 4 장 예배의 순 서
서 론
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하나 영적인 예배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형식과 의식을 따라 진행함이 올바르다. 왜냐하면 예배의 여러 가지 순서를 분산시키지 않고 참된 예배를 위한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어 하나님께 예배를 통한 감사의 응답이 성경 적으로 이로워지게 하기 때문이다.
예배의 순서에 있어서 개혁 교회의 특징중 하나는 각 교회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배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예배학적 요소에 따라 균형 잡힌 순서를 작성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보다 더 조화롭게 하여야 한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 백성의 적극적인 응답으로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인도를 소원함(Invocation for Divine guidance), 둘째는 말씀의 선포(Proclamation God`s Word), 셋째는 감사의 응답(Response of Thanks giving) 등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도록 적절하게 배열하여야 한다. 만약, 영적인 예배에 있어서의 형식과 의식을 소홀히 하고 인간적인 의도에 의해 계획을 세운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감동하심은 바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무계획적이며 불균형을 이루는 과오를 초래하게 된다.
개혁 교회의 예배 순서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복종과 감사의 응답이 충만하도록 성경적으로 계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남이 있는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이다.
Ⅰ.하나님의 인도를 소원함(Invocation for Divine guidance)
1.전 주(前奏)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교회 안에서의 전주(prelude)는 일반론적인 전주곡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무신론적인 타락한 인간의 유전, 전통, 관습에 의한 습성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즉 교회의 전주(prelude)는 신자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요 그들의 자리를 정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전주는 예배의 한 부분이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이끄심과 인도(introduce)하심을 나타내는 향기 나는 곡조이다. 신자는 이 전주곡을 들으면서 자신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께 접근(overture)하는 것이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이 전주곡을 들음으로인 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서로 다가서는(overture) 것이다. 그러므로 전주(前奏)는 무시되어서도 안되며 생략되어서도 안된다.
2.개회 찬송
개회 찬송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찬양으로 경배하는 것이다. 이 찬양과 경배 속에서 오로지 신자의 깊은 마음속에는 나의 어떤 공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소원해야 한다. 나는 이미 죽었다. 전적으로 타락한자이다. 조상 대대로의 타락한 그 유전 속에서 죄로 불결하며 무능함 그 자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나로 하여금 거룩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회 찬송으로 예배를 여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3.예배에의 부름
예배에의 부름은 하나님께서 예배 자를 부르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순서이다.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예배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의 부름에는 교회력(敎會歷)을 따라 적절한 성구를 택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말로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 생생한 말씀들을 낭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배에의 부름이 적절하게 선포되면 그 예배는 더욱 은혜롭게 진행되며 신자들이 예배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4.신앙 고백
신앙 고백은 4세기 이전에는 사도 신조라고 불려졌고 이것이 지금의 사도 신경이 되었다. 사도 신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인간이 하나님께 고백으로 응답하는 것으로 삼위 하나님을 의심 없이 고백하며 교회 및 성도의 교통과 속죄, 부활, 영생 등, 그 역사적이며 사실적인 내용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信仰告白)은 하나님께 대한 나 또는 우리의 생각하는 바를 믿음 안에서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거짓이란 있을 수도 없고 미온적이며 소극적인 중얼거림이 되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나 또는 우리의 내적, 외적 생활의 과실이나 약점을 하나님 앞에 기탄 없이 폭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자존심(pride)이나 자기만의 비밀(privacy)을 하나님 앞에서까지 굳게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5.기 도
1)기 원
예배의 진행자가 예배의 서두 부분에서 해야할 기도이다. 특히 이 기원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이 예배에 임재하시고 그 감동으로 함께 하시길 기도하여야 한다.
2)목회기도
목회자가 설교 전에 하는 기도로 회중을 대변하여 영광, 감사, 죄의 고백, 용서 기원, 확증 간구 등 회중 전체를 위한 기도이다.
3)설교 후 기도
설교 후 기도는 설교 내용과 연결된 기도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설교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이다.
4)대표 기도
이 기도는 주로 목회자이외의 성도들(장로, 권사, 집사 등등) 중에서 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 역시 회중을 대표하는 공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다음 다섯 가지 요소가 포함되도록 하여 회중 전체를 대변하는 기도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①감 사
기도의 첫 요소는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이다.
②고 백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실수하고 잘못한 것들을 듣는 이로 하여금 뉘우쳐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③간 구
감사와 고백 후에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만의 이익만을 주장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구하여야 한다.
④중재(중보)
대표 기도자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 요소 또한 중요한 것이어서 대표 기도자의 중보 기도에 서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⑤헌 신
신자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의 뜻하심대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으로서 빼 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5)주기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는 모든 기도의 형태중 가장 완전한 것으로 개인과 사회의 모든 문제를 집약하고 있다. 신자는 입으로만 암송할 것이 아니라 주기도의 참 뜻을 바르게 새기어 그 정신대로 생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중요한 주기도가 예배를 마치는 순서로 관례화 되어있는 것에 대하여 수정해야할 필요성도 있다.
Ⅱ.말씀의 선포(Proclamation God`s Word)
6.성경 봉독
성경봉독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 백성에게 주신 말씀을 그 백성들이 직접 받아서 봉독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은 그 메시지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사람들에게 임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에게 임한 말씀이라?(호1:1, 욜1:1). 오늘 우리에게 임한 이 말씀이 우리들 속에서 뚜렷한 반응으로 역사 하시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봉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배의 순서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7.말씀전함(설 교)
1)의의(意義)
설교라는 말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치 설교자가 베풀어 가르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23:8)고 하시었고, 또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23:10)라고 하셨다. 그리고 더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고 하시었다. 이제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설교의 진정한 의의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을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유교적 냄새를 풍기는 그 문자보다는 낮은 자세의 섬기자로 돌아가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많은 성도들을 섬기는, 부족하지만 오늘 주신 귀한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여 전달하는 자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에 나는 가르친다(I am teaching) 라고 하는 그 일반적인 당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무신론적 인간 욕망의 공통의 속성인 타락되고 저급한 나, 곧 백치(IDIOCY), 저능의 가장 심한 상태(IDIOT)가 되는 것이다.
2)설교의 핵심
초대 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은 그것이 종교적인 의무들이나 도덕적인 표준들 혹은 어떤 개혁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온갖 힘을 다 기울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잘 알고자 하였고 더 나아가서 그 예수님을 확실히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들의 설교 내용과 핵심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 이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영적 예배의 클라이맥스요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 전함(설교)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구원 사역을 명백히 전하는 데에 그 핵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임재와 축복에 대하여 신앙으로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을 소개할 때에는 신자들에게 친숙한 말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여 신자들이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3)설교의 역할
①설교의 핵심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여야 한다.
②신자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산 증거를 준비시켜야 한다.
③심령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결정적 시간이 되게 하여야 한다.
④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서의 말씀 전달이 되어야 한다.
4)설교의 2대 요소
성경의 메시지와 설교자의 인격과 감화력은 설교의 2대 요소이다. 메시지의 2대 요소는 내용(content)과 형태(form)이다. 내용의 2대 요소는 복음(kerygma)과 교훈(didake)이다.
Ⅲ.감사의 응답(Response of Thanks giving)
8.찬 송
찬송은 신자의 신앙적 정서를 하나님께 찬양으로 고백함이요 공동체 안에서의 공감적 은혜를 서로 나누는 신령한 노래이다. 구약에서는 시편을 통하여 찬송하였고 신약에서는 새로운 형식과 내용으로 은혜로운 찬송을 한다.
찬송은 개인의 신앙 생활에 큰 도움을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감을 일으켜 주며 신자들의 죄의식을 명백하게 하고 그러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게 한다. 또 그리스도를 대망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확신시켜준다. 그러므로 예배의 순서 순서에 찬송으로 계획하는 것은 찬양과 응답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찬송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엡 5:19에?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하였고, 골 3:16에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 하였다. 찬송은 신자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벅차 오르는 감정의 표현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간단없이 반복하게 하시는 신령한 노래요, 그 은혜에 응답하는 찬양이다.
성가대는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회중들의 찬송을 도와주고 고무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회중의 찬송을 인도하고 강화시키는 그들의 역할이야말로 중요한 것이어서 성가대는 신앙과 인격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악기를 사용은 예배의 찬양을 경건하고 아름답게 하여 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큰 소리의 재즈 밴드용 악기류들은 오히려 찬송을 불경건하게 하여 주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9.헌 금
1)성경적 근거
말3:10에?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이 말씀의 문자적 해석은 극히 위험하다. 특히 ?나를 시험하여?라는 문구인데 이 말의 히브리 원전은 ן?? 로 그 뜻은 탐색, 조사, 시험, 입증 등이다. 이 의미들 가운데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영적으로 완벽하게 죽어버렸기 때문에 전혀 불능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해석은 소위고전 영어에서 말하는 test(신의 힘을 시험하다)이다. 그것은 곧 temptation(유혹)이다. 즉 하나님을 시험하는 못된 짓으로 하나님을 노하게(provoke)하는 무모하고 쓸데없는 모험을 무릅쓴(defy) 행위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행동이며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행위이다. 그러므로 고전 영어에서 test 는 그 유사어 trial 로서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인간들의 믿음의 실제적인 유효성 여부를 미리 시험해보는 것이다. 그것은 시련과 어려움, 곤고(hardship)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정한 기준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인가를 실제로 해보아야만 한다(attempt,endeavor)는 의미이다. 바로 이것이 나를 시험하라 하신 ן?? 이다. 곧 십일조등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기초한 소득 분배의 의미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탐색, 조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시험 기준에 합격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입증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뒷받침하는 분명한 근거는 마23:23에 명확 관하 하게 밝혀 놓으셨다.?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울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구약의 성취 자로 임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온전한 십일조 개념을 명백하게 하신 말씀이다. 즉 온전한 십일조는 모든 소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드리는 자나 사용하는 자가 청지기 의식을 갖고서 감사함으로 드리고 역시 감사함으로 사용하여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곧 바치는 자는 청지기의 사명으로 바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금을 사용하는 자는 역시 같은 사명의식으로 불우한 이웃, 어려운 이웃들을 애쓰고 힘써서 찾아 나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의미가 바로 나를 시험하라 이며 이 말씀은 또한 명령형이라는 사실도 명심하여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스테판 본 원어분석자료에 의하면 인칭도 2인칭으로 나를 시험하라가 아니라 ?너를 시험하라?라고 하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10.축 도
1)축도의 성격
축도는 예배에서 신자들을 향한 축복의 선언이다. 이 선언은 목사가 자신의 권위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권위에 의해서 목사는 섬기는 자세로 겸손함으로 진실 되게 행하는 것이다. 축도의 끝맺는 말을 ```하노라 하면서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겸손함으로 신중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그 축복의 은총을 빌어야 한다. 죄인들을 대표한 죄인이 흠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그 축복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것이다. 마치 먹을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걸인이 부잣집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위해 간청을 하는 그 심정보다도 더 처량해 보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2)축도의 용어
①민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담당한 제사장의 축도이다. 이 축복 기도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임을 27절에 먼저 밝혀두고 있다. 그리고 그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명시하고(24 상반절), 보호(24 하반절), 은혜(25절), 평강(26절)을 주시기를 빌고 있다.
②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축도 중에서 가장 완비된 형태이다. 이 축도에는 삼위일체의 교리가 분명하다. 삼위의 순서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의 은혜가 앞서 있는 점이 문제가 되는 듯하나 이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신자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신자를 구원의 길로 이끄심을 빌고, 끝으로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그 구원의 상태를 궁극적으로 지속시켜 주시기를 빌고 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의 동작은 동시적이다. 이 축도의 형식은 당시의 초대 교회의 축도로 채용되고 점점 일반화되었다.
③고전16:23-2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축도 중에서 비교적 간략한 편에 속한다. 이 축도의 특징은 축도자 자신의 사랑이 첨가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질책을 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였다. 그러므로 질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정당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축도에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개인적 사랑을 첨가하였다. 이는 권위보다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어내며 그리스도와 친밀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다. 이렇게 간략하면서도 부드러운 축도는 개인 방문시, 또는 가정방문(심방)시나 소규모의 그룹 예배시 유효할 줄로 믿는다.
④축도 용어의 끝맺음 문제
지금까지 살펴 본 대표적 축도 용어의 끝맺음은 항상 권위적인 용어로 구사되고 있다. 이것을 목사의 권위로 보고 정당화시켜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인식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원전 어느 곳에도 그와 같은 권위적인 표현을 사용한 예가 없다. 다시 말하여 구약이나 신약에서 축도를 한 당사자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경의 번역이 그러한 것은 유교적인 한문 문화권에서 번역되는 과정의 문제이다. 즉 우리의 유전, 전통, 그 관습에 의한 것이다.
```원하노라, ```있을 지어다, ```할지어다, 등등의 언어 구사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 하는 자의 진정한 자세라고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언어들은 사뭇 명령적이고 자기 권위적인 특성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비는 간절히 간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라고 둘러대어 합리화시킬지 모르겠지만 그 축도의 끝말을 조금만이라도 힘을 주어서 강조해보라 그것은 엄청난 자기 주장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성삼위 하나님에게 마져도 축복하라는 신성 모독의 중죄까지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목사님들 가운데는 ? ```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축원 하옵나이다?, 또는? ```성부, 성자, 성령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하옵나이다?라고 축도 한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 하는 축도자의 마음은 매번 반복하면서도 떨림이 있고 송구스러움마저 있는 것이다. 이런 때는 당황하여 잘못되는 경우도 있는데, 비록 서툴게 되었을는지는 몰라도 그 떨림과 송구한 자세가 나타나 오히려 더 큰 은혜와 감동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워 합리화시키는 것은 절대 부당하다., 아 멘.
3)축도시 손의 위치
눅24:50에서 근거한다.?예수께서```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비유적(tropically)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곧 하나님은 창조자, 통치자, 심판자``` 로서 전능하신 분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머리이시며 만물의 주시며 만민의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축복의 권위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여 그대로 행하는 것뿐이다. 목사의 손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손을 들고 하는 것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김이요 아래로는 성도들을 섬김이다. 이것을 가지고 특별히 주장하여 목사의 고유권한 운운하는 것은 은혜롭지 못하다. 오히려 겸손히 섬길 때 하나님이 주신 그 고유 권한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사까지도 흠모한다 하였다.
제 5 장 말씀 전함(설 교)
서 론
이미 언급하였듯이 예배에 있어서의 말씀의 전달은 특별 계시로 나타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하여 인간이 복종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 복종과 응답의 실제적인 행위가 곧 말씀 전함(설교)이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말씀 전함(설교)은 예배에 있어서 어떤 형식이라고 하기보다 예배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예배의 모토(motto)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from God to man)이다. 곧 그 핵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며 영적인 일에 관한 한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신적 자기 수여(Divine self-giving)이다. 신자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켜 응답하여야 한다. 거기에 는 신자들의 변절될 수 없는 좌우명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은 신적 자기 수여로 친히 우리에게 다가와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만나 주시며 공유(共有, communion)하신다. 이 때에 말씀 전함(설교)은 하나님의 사상과 그 감정을 교환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며 가까운 사귐을 이루게 하여 영적 교섭(spirtual intercourse)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의 말씀 전함은 이러한 의미에서 절정이요 꽃이다.
말씀 전함(설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기 수여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미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바 되었고, 예언자들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으며 더더욱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언약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되었다. 말씀 전함은 바로 이것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본 장에서 말씀 전함(설교)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Ⅰ.성 경(the Holy Bible, the Scriptures)
1.성경의 환경
우리는 성경의 환경을 논하기 전에 무신론의 일반론적 주장을 먼저 말하여야 한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연과학과 순수과학을 전혀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전혀 정화하지 않고 보편 타당하다하게 바라보는 시각은 사실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전 우주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허락하지 않는 불가항력의 힘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환경 적인 면에서 고찰하면 소위 인간의 물리적 환경의 많은 부분들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반론적으로 주장하여 이르기를 ?인간은 스스로의 손으로 자연계 안에 또 하나의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라고 부르짖는다. 물론 여기에서 또 하나의 사회 창조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물리적 환경들이다. 이 물리적 환경의 조작 물들은 결국 불가항력의 힘으로 존재하는 자연 환경을 파괴시킴으로 태고 적부터 이미 위험을 무릅쓴 행위(tempt)로 존재했었다. 그렇다! 이것은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행위요 그 창조자이신 신을 노하게 하는 행위(tempt)로 이미 규정되어 있었다! 소위 그 진정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면서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덤벼드는(hold up) 무모한 행위인 것이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그 물리적 환경들은 태고적 부터 존재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세계 최초의 문명 발상지인 메스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명은 소위 인간 창조의 물리적 환경의 최초의 시발 지이다. 이곳에서는 B.C. 12,000년과 8,000년 어간에 최초의 농업의 초보를 배웠고 동물들을 길들였으며 최초의 농업 관계 시설을 만들었고, B.C. 5,000년 혹은 4,000년 어간에는 최초의 성읍들을 건축한다.
이 최초의 문명 발상지는 공교롭게도 더 앞서서 존재했던 성경의 환경이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한다. 그 사실 확인은 성경의 역사적 비평에 의하여 명확하게 증명된 바이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그 물리적 환경 이전에는 불가항력의 힘이요 자연의 힘인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전혀 파괴가 없는 에덴의 환경을 유지시키고 잘 보존하며 관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타락이후 이미 언급한대로 인간의 물리적 환경 조작 물에 의하여 지표의 식물을 파괴하고, 토양의 침식을 초래하였으며, 기후 조건까지 악화시켰다. 인간들은 이것을 또 하나의 사회 창조라고 주장하며 정당화 시켰던 것이다.
자연의 힘- 불가항력의 그 능력-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무시하고 제외시켜버린 인간의 물리적 환경 조작은 굉장한 위험을 무릅쓴 무모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사회 창조라고 일반론적으로 보편 타당하게 인식되는 것은 그 자체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그 유전, 전통, 관습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과감히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계명?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40)하는 진리의 대법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인 전 우주적인 모든 창조물들은 이 진리의 대법칙에 입각하여 운행되어져야 한다. 조금도 희생할 줄 모르는 인간의 그 타락한 정신 세계는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진정으로 복종하고 응답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현재에도 소위 인간 창조의 모든 유형 무형의 조작 물들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웃)에 대하여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조금도 희생할 줄 모르는 스스로의 덫 그 올무에 걸려 함정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진정한 면에서 자유가 아니라 속박이라고 하였다. 또한 마틴 루터도 말하기를 그것은 도리혀 의지의 굴레라고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적 환경은 명백한 것이며 타락한 인간에 의하여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 부연 강조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영원히 작동되고 있으며 그 타락한 인간의 유`무형의 모든 조작물들은 하나님의 시간이 임할 때에 심판 받을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바로 이렇게 명약 관하(明若觀火)하게 증명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연구하여 빠짐없이 전달하는 것이 말씀 전달자(설교자)의 사명이다.
2.하나님의 계약
창세기 3장과 4장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최초에 맺어졌던 약정(Covenant of Creation)이 인간의 타락한 죄로 말미암아 파탄에 이르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분명 인간 타락이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졌던 영적 관계의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타락이후 그 유전과 전통, 관습으로 익숙해진 우리는 이것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하
나님 말씀 상에 명약 관화(明若觀火)하게 나타나도 우리는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직접 나타나셔서 인간의 타락한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기까지 했어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손에 쥐어 주고, 먹여 주어도 먹지를 못하는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전적 타락이다! 너희들의 정신 세계의 근본인 영적 세계는 완벽하게 죽어버렸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사를 부를 능력도, 119 구급대를 요청할 능력도 없고, 손마디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다! 다시 말하여 타락이전의 인간 정신 세계의 그 근본을 완벽하게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타락한 그 정신 세계 안에서 자유의지를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hold up) 무모한 도전(tempt)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나는 지금 죽지 않았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을 뿐이며, 나는 지금 가벼운 타박상 정도밖에 입지 않았기 때문에 내 스스로 얼마든지 의사를 부를 수도 있고, 약만 사서 가볍게 치료하면 나는 정상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 속에는 나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내 이웃을 먼저 사랑하는 진리의 근본개념이 완벽하게 죽어버렸다. 또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그 물리적 환경들은 태고적부터 환경 파괴를 초래하였고, 동물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이용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더욱한 것은 정복과 살상이라는 엄청난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한 문명 발달의 역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제외시키며 그와 같이 내 이웃을 살상하고 파멸시키는 가장 크고 첫째 되는 죄악을 범하고 있으며, 악법도 법이다 라는 비진리의 일반론적 사상을 온 인간들이 보편 타당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녕코 잘못된 것이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엄청난 사상이 온 인간들의 정신 세계 속에 잠재하고 있다! 이 타락한 정신 세계를 온전케하는 것이 무엇인가? 과연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최초의 문명 발상지 메스포타미아 문명이 B. C. 12,000년 전인데 수천 년을 지나 A. D. 21세기를 맞이하는 지금까지 그 해결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질 않는다. 인간 창조와 함께 이것을 미리 아신 하나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 타락과 함께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하나님의 계약 사상이 작동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계약(契約)이라고 하는 말은 서로가 지켜야 할 의무에 관한 약속 또는 약정(約定)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나님 계약의 속성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맺어진 약정(Bond) < 피로 맺은 약정(Bond in Blood) < 주권
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이
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크게 둘로 나누어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여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글자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절대 주권적인 계약이다. 이 계약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여 어떤 특별한 약속과 약정을 하나님 주권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 글로 써서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은 두툼한 계약 증서이다. 어떤 특별한 약속과 약정을 하나님 주권적인 법률에 의해 틀림없이 그리고 변절함 없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에도 계약을 체결하고 그 보증을 위한 계약금까지 지불한다. 곧 틀림없이 그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뜻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인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계약 문서이다. 우리가 돈 몇 푼에 계약하는 부동산 계약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관계(神人關係)의 계약 문서인 성경보다 부동산 계약서 한 장을 더 가치 있게 여긴다면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귀중한 계약 문서의 내용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곧 설교이다.
그러므로 설교를 감히 월권하여 베풀어 가르친다(說敎)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유교적인 입장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기독교의 참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 절대 주권 하에서 이로워진 성경을 풀어 가르친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돼는 의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태도부터 고쳐야 한다. 설교는 설교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절대 주권이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이 설교자를 세운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를 섬기는 자세로 지극히 낮아져서 성경의 뜻을 열심히 연구하고 이해하여 진실 되게 말씀을 전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말씀을 연구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은 감히 말씀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그 귀중한 계약 문서인 성경을 들춰보자. 계약 사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취급하는 주된 원리로 작동된다. 이 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철저한 상호 관련성 안에서 인간과 맺어지는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이다. 이 구속의 계약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약정(Bond)이라고 했다. 약정 ?본드?(Bond)는 속박과 구속(拘束, shackles)의 뜻이다. 그러므로 약정이라고 하는 말은 ?구속력(拘束力)을 갖는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주권적인 계약의 첫째 조건은 단 한 번으로 영원한 약정, 그 벗어날 수 없는 황금의 속박, 황금의 구속, 황금의 감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잘아는대로 강력한 본드(Bond)보다 더 강력해서 한 번 약정함으로 영원한 약정이다.
하나님 주권적 계약의 두 번째 조건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피로 맺은```는?in-Blood?이다. 즉 피로 세운 약정 또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라는 뜻이다. 피(Blood)는 성경에서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도 없다?(히9:22) 라고 하였다. 생명이란 피 속에 있는 것이며 피흘림은 생명에 있어서 심판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할 때 죄사함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타락한 죄는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하나님 스스로의 피흘림 안에서만 용서가 된다. 인간 스스로는 절대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로우심(δικαιοσυνη)을 만족케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사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주권적 계약의 세 번째 조건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은 Sovereign(주권, 통치권)과 Administer(관리, 집행, 시행, 다스림)을 말한다. 즉 피조자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초월적(뛰어난 최고의) 권력인 그 주권과 통치권이다. 그리고 그 주권과 통치권으로 인간을 친히 취급한다는 그 주된 원리로서의 다스림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여기에는 타락한 인간의 의지가 전혀 작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예배하게 하시고, 더하여 궁극적 구원하심으로 영생까지도 주시는 그 주권적 사역을 우리 속에서 친히 행(취급 또는 사역)하실 때, 우리는 알량한 우리의 자유 의지(free will)라든지, 자존심(pride)이라든지, 마음속의 나만의 비밀(privacy)이라든지```, 등등이 전혀 발동되면 안된다. 그것은 ?Tempt?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자기를 쳐 복종시켜?(고전9:27,고후10:5)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응답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인간 타락이후 하나님의 계약(Covenant of God)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이다. 그것은 구속의 계약(Covenant of Redemption)이요, 은혜의 계약(Covenant of Grace)이요, 새 계약(New Covenant Realities)으로서 구속력(拘束力)을 갖는 약정이다. 이 모든 것의 총체적인 집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로워진 완성의 계약 또는 성취의 계약(Covenant of Fulfillment)이다.
이제 개혁 교회의 말씀 전함(설교)은 그 방향제시가 명확해졌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의 성취까지 성경의 뼈대는 분명해진 것이다.
성경의 뼈대, 하나님의 계약에는 그 절대 주권성을 파기하는 인간적인 흥정이나 교섭, 인간적인 방종이나 월권, 인간적인 도용이나 욕구충족``` 등등이 전혀 개입할 수 없다.
3.성경의 원전과 번역본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합 66권의 책들로 이로워진 하나의 거대한 전집이다. 그리고 그 원전들의 연대는 수천년 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5세기 인쇄술이 발견되기 훨씬 이전의 고대 서적의 재료들은 토판, 돌, 뼈, 나무, 가죽, 질그릇 조각, 파피루스, 양피지 등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66권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지기까지는 구전전승과 위에 열거한 고대 서적의 재료들, 특히 그 중에서도 파피루스와 양피지 등에 기록한 수 천만개의 고대 사본들로부터 철저한 검증과 비평을 하여, 역시 수 천세기에 걸쳐 확인된 결과의 귀중한 소산물이다. 물론 여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감독이 철저히 작동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절대 주권하의 신인 합작품(神人合作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성경에 관한 내력을 살펴보는 것은 그 중요성과 함께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경 문헌학(사본학)을 통하여 상세히 배우겠지만 본 장을 통하여 간략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1)구약의 원전(Text of Old Testament)
명확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의 원전(原典)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고대의 대부분의 자료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의 원전이 명확하게 존재했었다 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역사에서 증명되어진다. 태고적부터 그들의 역사 속에는 구전전승이나 기타 불가사의한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하였고, 이 말씀들은 그들 대대로의 역사을 따라 전승되었으며 급기야는 사본형태로 전해져 온다.
다시 말하여 오랜 역사 속에서 원전을 포함한 옛 사본들은 점점 없어졌으면서도 그 전통을 따라 새 사본들이 필사되었다는 말이다. 현시대에 있어서 수많은 사본들의 발견은 이와 같은 교감과 전달을 능히 밝혀주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사본은 20세기에 사는 우리가 바라볼 때는 이것 역시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태고적에 존재했던 구약의 원전에 비하면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훨씬 후에 나타난 복사 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 당사자인 히브리인들은 이와 같은 새 사본 필사작업에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님의 영감(靈感)이 작동하였다.
구약의 원전 39권을 우리가 완전하게 갖게 된 것은 지금부터 불과 52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1947년 사해 사본인 쿰란(Qumran) 문서의 획기적인 발견이 있
기까지는 많은 사본들 속에서 원전에 가까운 내용을 보전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왔다. 히브리인들의 역사 속에 나타나는 바는 그들이 바벨론 포로 귀
환후 B. C. 4세기에 율법서를 확립 시켰고, 그 후 B. C. 200년경에는 선지서 들을 확립 시켰다. 그 후 A. D. 5세기까지에는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서기관들이 구약성서를 더 정밀하게 보수한 기간으로 성경의 자수와 항목들을 표기하고 읽기와 구분도 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때부터 티베리아와 바벨론 등지의 경건한 맛소라 학자들(Masoretes)이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붙이고 주해를 다는 등, 구약 원전의 정확한 읽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구약 최초의 정식 사본이 이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편집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세오경과 역사서와 예언서 등을 기록한 A. D. 9세기의 사본들(略 MSS.) 이다. 이 사본의 명칭을 ?맛소라 원전(Massoretic Text,略 MT)?이라 하는데, 그것의 시초작업은 A. D. 500년경부터 편집된 것이다. 이 사본을 근거로 하여 후에 많은 사본들은 거의 일치를 이룬다. 다시 말하여 맛소라 원전은 구약 원전의 산 증거가 된 것이다. 그럼으로 후에 만들어진 많은 사본들이 9세기 원전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그만큼 히브리 원전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증거이다.
이에 대한 뒷받침을 이미 언급한대로 쿰란 문서(사해 사본)의 획기적인 발견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증명시킨 것이다. 쿰란 문서는 9세기 사본인 맛소라 원전보다 1,00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B. C. 1세기에까지 도달하게 하여준다. 이 쿰란 문서는 원전의 보존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그 증거로서 아주 큰 의의를 갖고 있으며 동시에 맛소라 원전에 대한 원전 보전성(保全性)을 증명해 준 것이다.
이러한 확증들로 인하여 우리는 성경이 수천 년의 시대를 내려오는 동안에 그 원전성(原典性)에 있어서 동일한 주의를 기울여 보전되어 왔다는 부가적인 확증을 얻는다. 아직도 더 오래된 구약 원전의 증거들을 찾아내야 하지만 성경을 그토록 정확히 보존해 왔다는 사실은 구약 원전의 신빙성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이다.
2)구약 원전의 번역본들
①70인역(Septuagint, LXX)
이 책은 헬라역(譯) 구약성서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원전보다 10세기나 앞서있는 최고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인용문구가 대체로 70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재 사용하는 구약성서의 구분이 70인 역에 의한 것임도 알아야 한다.
이 번역본의 편집 동기 및 시기는 B. C. 250년 알렉산더 대왕의 식민지 하에 있는 톨레미 2세의 명에 의하여 당시의 식민지 유대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당시의 대 제사장 엘리아젤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6명씩 72명을 택하여, 72개의 방에서, 72일간 번역했다하여 70인 역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후 이 책의 완성은 B. C. 130년 아퀼라에 의해서 이로워졌다. 그후 A. D. 2-3세기에 이 책은 다시 한 번 수정되었다. 현존하는 헬라어 구약성서의 사본은 바티칸 사본(B) 4세기 , 시내산 사본(א) 4세기, 알렉산더 사본(A) 5세기 등이 있다.
②탈굼역(Targums)
이 번역 본은 아람어 구약성서이다. 유대인들이 또한 아람어를 사용하게된 동기는 바벨론 포로시기에 의해서 이다. 편집 연대는 2세기에서 7세기 이전으로 본다. 특징은 문자적인 번역과 자유로운 설명역이 많고, 주해적 삽입구가 흔하다.
③수리아역(일명 페시도역,peshito)
히브리 원전과 70인 역을 참조하여 2세기경 그리스도인에 의하여 수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고대 번역 중에서 가장 정확한 것으로 그리스도교 번역의 효시로 꼽힌다.
④사마리아역
4세기경에 편집된 것으로 맛소라 원전 외에 유일한 히브리어 성경으로 모세오경만 있다.
⑤라틴역
라틴어 번역 본으로 고 라틴역(Old Latin Version)은 2세기경 아프리카에서 번역되었다. 이는 70인 역의 라틴어 번역 본으로 그 후 수정을 거쳐 제롬에 의해 그 결정판이 편집된다(A. D. 405년). 이 번역 본은 벌게트(Vulgate)라고도 하며 카톨릭 공인 성경이다.
이후 13세기에 들어서서 성경의 장(章)구분이 칸타베리 대감독 랑톤(Stephen, Langton)에 의해 시도되고, 절(節)수는 랍비 나단(Nathan)에 의해서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야 신구약전체와 외경까지 그 작업이 완성된다. 물론 이 시기에서 성경 자체는 맛소라 학자 판을 그대로 따랐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원전 보전 노력에 의하여 이미 언급한대로 1947년 사해사본의 결정문서인 쿰란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B. C. 1세기까지 추적해 올라가게 하는 이 고대 사본의 확증을 통하여 세세토록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보존 및 보전 가치를 높게 추구해 왔다는 사실이 재 증명되었다. 앞으로도 그 계속적인 연구와 발견이 있을 줄 믿는다. 더더욱 추가하여 부연 강조하는 바는 현대 세계 문화라고 하는 그 서구 문화의 발상지, 그 모체가 히브리인의 구약 원전 사상이며 이 사상이 신약 원전 사상에 의하여 더욱 완성되고 확실해져서 헬라인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고, 이것이 로마의 문화로 발전되면서 세계 문화를 형성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부분의 그 확실한 증거들은 수세기를 걸쳐 내려온 사본학 연구에서 증거 되어지고, 다음으로는 일반론적인 많은 책들 특히 어학 사전류의 언어 변천 과정과 그 어의에서 명증되어진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설교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본문의 문자에 비추어 일반 사전류의 문자의 어의를 따져보는 것도(대부분 비판적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업중의 하나이다.
3)신약의 원전(Text of New Testament)
신약의 원전 역시 고대서적의 재료인 파피루스와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을
한 권(Volume)의 책으로 만들기 위해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것들은 수천 가지나 되고 그 언어 역시 많은 나라들의 말로 기록된 사본(寫本)형태이다. 즉 원전을 필사한 고대 사본들(Manuscripts, 略 MSS, 또 다른 용어로는 the Codex.)이라는 말인데 역시 신약의 원전도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약 원전의 경우처럼 신약 원전의 그 근본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세심한 주위와 심혈을 기울여 왔다는 그 증거들은 명확하다. 여기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성경 문헌학(사본학)을 통하여 이로워질 줄 믿는다. 다만 본서에서는 간략하나마 그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신약의 수천 가지나 되는 대다수의 많은 사본들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또 라틴어 수리아어, 애굽어 등등 많은 나라들의 언어들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수천 종의 사본들을 놓고 수세기에 걸쳐 세심한 주의와 심혈을 기울여 원전을 복원키 위한 노력과 함께 본문 비평학까지도 서슴치 않고 동원하여 냉정한 평가작업을 거쳐 완성된 것이 신약 성경이다. 이러한 보존 및 보전성의 가치는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영감(靈感)에 의한 섭리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약의 헬라어 사본들의 증거는 다음의 4가지 방법에 의해서 결정된다. ①헬라어 파피루스 사본, ②헬라어 안샬 사본, ③헬라어 미나스쿨 사본, ④그 밖에 다른 사본들이다. 이 4종류의 사본들은 5,000여 헬라어 사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 중에서도 특히 ①,②,③은 그레고리 명수법(命數法) 체제에 따른 것이다. 이는 수학에서 어떤 수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이와 같이 그 사본의 다소(多少)에 의한 수단(手段)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명명(命名)하는 방법을 말한다. 여기에 신약 본문 비평학까지 가세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결과 A. D. 5세기에는 표준화된 본문을 갖게 되었다. 물론 몇몇 사본들은 이보다 훨씬 전에 편집된 것도 있다. 그 중에 특히 A. D. 4세기에 편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시내산 사본(?)은 신약성경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것은 A. D. 5세기의 표준 본문보다도 더 권위 있는 훌륭한 본문 보존으로 의견을 모은다.
이와 같은 세심한 노력을 2세기 반 동안이나 기울인 후에 신약성경을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확립시켜 놓기에 이르렀다. 계속된 노력 끝에 16-17세기 인쇄판 헬라어 성경이요 공인된 본문인 ?Textus Receptus?(Received Text)가 출판되고 이어서 영국의 제임스왕 번역 본에 기초를 둔 ?스테파누스?(Stephanus)가 출판되어 이것을 중심으로 비로소 수많은 번역 본들이 나타났다. 이어서 출판된 공인 번역 본은 우리가 잘아는대로?G.N.T. 3판?(Greek New Testament Third corrected edition)이다.
중세에는 교황의 권위에 묶인 체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답보상태로 오직 라틴어 성경(Vulgate)이 교회의 공식 번역 본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그 개혁자들이 성경을 각 나라말로 번역하여 각 나라 사람들에게 명백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는 욕구가 충만했다. 그와 동시에 원어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불일 듯 타올라 원어 성경에 기초한 새로운 번역 본들이 속속 나타났다.
4)영어 번역본들
영국에서는 베데(Bede, A. D. 7세기)와 알프렛 왕(Alfred, A. D. 9세기)과 위클리프(John Wycliffe)에 의해서 영어 성경 번역의 시도가 일어났다. 원전(Text)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직접 그 원전으로부터 번역하여 최초의 영문 신약성경을 내는 데 성공(1380-1400년)하였다. 특히 위클리프는 손으로 직접 쓴(필사본) 죤 위클리프의 역본을 편찬해 냈다. 현재 이 책들은 180권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인쇄판 영어 성경은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의 역본이다. 이 성경 역시 원전에서 직접 번역한 것으로 1525년 쾰른(Cologne) 초판이래 거듭 출판되어 1535년 『The New Testament yet once again corrected by William Tyndale』을 출판함으로, 이것은 모든 개정본의 기초가 되었으며 흠정역(欽定譯) 신약 성경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1535년 마일즈 카붜데일(Miles Coverdale)은 영어성경 최초로 신구약 전체를 출판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러나 이 성경은 틴데일 처럼 원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타 번역본들을 기초로 한 번역 본이다. 1539년 리챠드 테붜너(Richard Taverner)는 매튜(로저스) 성경의 개정 본을 출판하였는 데, 그는 헬라어 학자답게 헬라어 원전에 입각하여 매튜 역본의 일부를 수정하였다. 1557년에는 윌리암 훠팅엄(William Whittingham)에 의해 신약성경 개정 본이 출판되었고, 이 훠팅엄 신약성경 개정 본은 제네바역 성경전서에 포함되어 1560년에 간행되었다. 이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은 사실은 공인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인 받지는 못했지만 일반 백성들이 자주 애용하는 성경이 되었다. 그리고 이 제네바 성경은 대 문호 쉐익스피어(Shakespeare)의 성경이었고, 뉴 잉글렌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성경이었다. 이 성경은 또한 틴데일 역본 다음으로 흠정역본의 형성에 가장 많이 공헌하였다.
1568년 감독 성경(Bishops` Bible)이 출판되었고, 1569년에는 그레이트 바이블(Gleat Bable)나왔으나 여전히 우세한 제네바 성경에 밀려 사라졌다. 이후로도 1582년 라임스(Rheims) 역본, 1609년 두아이(Douai) 역본, 레미쉬(Rhemish) 역본 등은 로마 교황의 지배를 다시 꿈꾸는 라틴어(Vulgate) 역본의 영어 번역 본들로 조심해야할 성경들이다.
1611년에는 킹 제임스 성경이 출판되었다. 이 성경은 제임스 왕에게 바치는 장문의 헌정사를 실은 조금 이상한 출발을 보였다. 옥스포드 대학의 마일즈 스미드 박사에 의해 쓰여진 그 장문의 헌정사겸 제목(킹 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다.
『The Holy Bible, Conteyning the Old Testamentand the New. Newly Translated out of the Originall tongues: and with the former translations diligently compared and revised, by his Majesty`s Special Commandment. Appointed to be read in Churches. Im Most Excellent Majesty. Anno Dom. 1611.』
그리고 이 성경은 당시의 모든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강제성을 띤? 공인 역본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성경은 여전히 계속 인쇄되었고 신자 개개인의 독서용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몇몇 영국 국교회 주교들의 글이나 설교에서도 역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1868년 영국 국교회 웨스트코트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7세기 중엽부터 단순히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킹 제임스 성경이 전세계 영어 사용 국가들의 성경으로서 인정되어 왔지만, 개정 본 이후 10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개정 전의 절대군주의 칙령 하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절대적인 권위를 되찾았다』라고 하였다. 지금은 이 성경이 1962년 미국판(Simplified Helps for Bible Study, copyright ⓒ1962. by the Zondervan Corporation.)으로 출간된 이래 의미 있게 사용되어지고 있다.
☞보충 설명
*1611년 킹 제임스 성경(The Authorized, or King James` Version. 略 K. J. V.)을 흠정역(欽定譯)이라고 한다.
*1881년 개역본(Revised Version. 略 R. V.)이후, 그것을 다시 개정한 성경이 R. S. V.(Revised Standard Version)이다.
*원어에서 직접 옮긴 새로운 번역본 성경이 N. E. B.(New English Bible)와 T. E. V.(Today`s English Version), 그리고 J. B.(Jerusalem Bible)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사역 본이 쏟아져 나왔다.-Weymouth, Moffatt, Phillips, Taylor 등-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는 성경을 각 나라말로 번역할 목적으로 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W. B. T.(Wycliffe Bible Translators) 같은 특수 단체들은 아직도 건재하다.
5)20세기 영어 번역본들
*1903년: R.T.Weymouth, The New Testament in Modern Speech
품위 있는 현대영어로 옮긴 한 고전학자의 신약성경.
*1913년,1924년: James Moffatt, A New Translation of the Bible
원문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활기찬 관용구적인 번역 본.
*1927년: E.J.Goodspeed, The Complete Bible: an American Translation
아주 읽기 쉬운 번역 본.
*1944년,1949년: Ronald Knox, The Holy Bible
라틴어(Vulgate) 성경에 기초한 번역 본.
*1946년,1952년: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The Common Bible
1901년 American Standard Version 의 개역본인데, 원래 ASV는 Authorized/King James` Version의 개역본이었다. 그러므로 RSV는 KJV의 장점을 살리면서 현대 영어를 충분히 고려하였으며 32인의 학자 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1950년,1960년: The New World Translation
여호와의 증인들의 번역 본.
*1955년: H. J. Schonfield, The Authentic New Testament
저명한 유대학자의 번역 본으로 신약의 유대적 배경이 강조되어 있다.
*1958년: The Amplified Bible
미국 캘리포니아 12인의 편집자들의 공동 번역으로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양자택일의 낱말들을 제시해 놓았다.
*1958년: J. B. Phillips, The New Testament in Modern English
신약을 참신하고 활기차며 자유롭게 옮겨 놓은 번역본.
*1959년: The Holy Bible: The Berkeley Version in Modern English
신약은 한 학자의 번역, 구약은 20인의 번역으로 정확성 있는 보수적 개혁본.
*1961년,1970년: The New English Bible
학자들로 구성되어 가장 정확한 현대의 언어학적, 역사적 발견과 본문 의 발견을 고려하였고 영국의 교회들과 성서공회가 후원하였다.
*1966년: The Jerusalem Bible
학적인 번역으로 분명하고 정확하다.
*1966년: Today`s English Version
일반 영어로 번역하여 새롭고 참신하며 솔직한 면이 있다. 미국 성서 공회 출판.
*1971년: Kenneth Taylor, The Living Bible
가족의 성경 읽기와 보통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번역으로 구어체의 보수적이다.
*1974년: New Internationnal Version: The New Testament
초교파적인 복음주의 학자들의 번역 본이다.
영어 성경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특별히 어느 것이 좋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다. 비록 다른 교파의 번역문이라 할지라도 그 잘못된 점을 알고 참고한다면 타산지석이 될 줄 믿는다. 다만 번역의 필요조건에서도 나와 있듯이 정확한 번역문 몇 몇 권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조건은 1)정확한 원문에 의하였는가, 2)원어의 어휘, 문법, 관용어구 등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3)번역할 언어 즉 영어의 어휘, 문법, 관용어구 등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4)원전의 사상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가 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자는 평소 원어 공부를 부단히 하여 하나님의 사상을 통찰할 줄 아는 사명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사명의식의 결여는 말씀을 깊게 연구하지 않는데 있다. 지금도 우리말 번역 본만을 고집한 다면 수 천년 전에 이미 존재했던 원전의 모습들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중세기 로마 교황의 말씀에 대한 폐쇄 정책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그 당시 라틴어(Vulgates) 성경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이유로 당시의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사상이 정립될 수 없었다. 그것을 개혁한 개혁자들의 또하나의 큰 일은 원전에 입각하여 각 나랏말로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보고자 하는 개혁 교회의 설교자들이다. 원전이나 기타 영어 번역문에 비하여 훨씬 못 미치는 우리말 번역 성경들만을 고집 하는 것은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 목사의 설교는 말씀 연구에서부터 큰 개혁(Reformed)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성경도 다양한 형태의 질적 향상을 꾀하는 수준 높은 번역들이 일어나야 할 줄로 믿는다. 지금까지 살펴본바 신구약 원전과 그 사본들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세심한 주의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는 풍토가 널리 조성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지금 당신의 책상 위에는 히브리어 원전, 헬라어 원전, 다수의 영어성경, 그리고 우리말 성경, 여기에 따르는 각종 사전류들이 준비되어 있는가? 그리고 나서 후에 그 다음다음 준비될 것이 주석 류인 것이다. 이 주석 류는 참고만 하여야 한다. 주석을 그대로 베끼는 것은 사명자의 행위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으로서 소위 커닝(cunning)인데, 이 말은 Good News Bible, Gen 3:1에 쓰여진 동사로 ?the most cunning?, 가장 간교하더라(창3:1)가 된다. 뱀의 혀를 날름거리면서 남의 것만을 탐하지 말고, 스스로 깊이 연구하여 충만한 은혜를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혜의 물결을 흘러 넘치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깊은 그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어찌 설교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적 부흥, 심령부흥은 반짝 쇼가 아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그곳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아 멘.
제 6 장 기 도(Prayer)
Ⅰ.기도의 정 의
?기도는 사람의 영과 영이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영(πνεύμα)이라고 하는 말은 흠없고 순전하고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말한다.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드셨다. 물론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시는 그 창조자로서 피조자인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이전의 우리의 모습은 깨끗하고 순전하여 하나님과 쉽게 대화(conversation)하였다. 즉 하나님과 아주 가깝고 밀접한 흉금을 튼 대화(conversation)이다. 이러한 실 예는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모습 속에서 여실히 증명되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날마다 때마다 이로워져 그 때 그 때 하나님의 은혜와 유익을 받고 살았다.
그러나 타락이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영의 절대성이 죽고 말았다. 즉 전적타락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혼(ψυχή)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깨닫고 붙잡기보다는 이성과 합리, 자유의지를 부르짖으면서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정 반대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즉 혼적인 사람, 인간의 이성의 그 근거는 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정신세계의 그 근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영은 생명의 본원이요 생명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또한 기도는 생명의 호흡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선택하셔서 하나님을 믿게 하시는 그 사역, 성령님의 그 영향력 행사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독대할 때, 혼적인 자유의지와 자존심, 자기만의 비밀이 자기도 모르게 살아서 꿈틀거리지 못하도록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만 한다.
이제 기도의 정의는 내려졌다. 특히 타락이후의 혼적인 요소의 하나인 자기만의 비밀한 장소, 프라이드(Pride)가 바로 영적인 기도의 장소이다(마6:6,?골방?[ταμιείον]). 혼과 영의 혼돈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안된다. 우리는 혼돈된 기도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날마다 때마다 하는 기도는 혼적인 기도만 부르짖었다. 그저 나, 우리만 잘되기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기도로 돌아가야 한다. 나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이익을 먼저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나의 이익보다는 내 이웃의 이익을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 고삼병에 아무리 시달릴지라도```, 금방 죽게 생긴 암환자일지라도```, 사업이 망하여 당장 거리에 나 앉게 될지라도```, 지금 내가 부르짖을 기도는 하나님이 먼저요 그와 같이 내 이웃이 먼저인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였다(마22:37 -40). 이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영적인 기도를 하는 자요, 영적 부흥` 심령부흥이 된 자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영적인 기도는 흉금을 튼 대화(Conversation)라고 하였다. 혼적인 자기만의 욕구를 주장하는 모든 비밀한 것들을 차라리 하나님께 몇 시간이고 몇 날 며칠이고 아니 몇 해 몇 년, 죽을 때까지라도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이 백번 천번 더 나은 기도이다. 이것을 해결은 않고 나, 우리만을 부르짖는다면 성령님의 탄식과 한없는 질책만이 응답되어 올 것이다.
Ⅱ.기도의 유 형
예배에 있어서의 기도의 유형은 공식 예배의 특성상 영적인 형식과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음에 그 몇 가지 실 예를 들어본다.
1.숭경(崇敬, Adoration)
숭경이란 하나님을 높이 받들어 존경을 다하여 숭배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인식이 그러함 같이 그 외적인 태도에 있어서도 겸손히 엎드려 예배하는 자세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열애하는 예배 시작 전의 기도이다.
2.기원(祈願, Invocation)
기원은 하나님의 영감(靈感)을 구하는 기도이다. 예배의 시작과 함께 진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소원(for Divine guidance)하는 간절한 기도인 것이다.
3.고백(告白, Confession)
예배 시에 의례적으로 행하는 신앙고백(사도신경)에 대한 그 진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죄를 자인하고 그것을 자백하는 것이다. 오랜 전통에 의한 사도들의 고백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예배원리는 죄의 고백이다.
4.감사(感謝, Thanksgiving)
온 마음으로 하나님께 고마움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은혜에 대한 다 갚을 수 없는 진정한 사의(謝意)의 표명이다. 여기에는 형식이나 의식이 따를 수 없다. 이것은 예배자의 마땅한 응답이요, 예배의 기초이며 또한 기도의 핵심이다.
5.탄원(歎願, Supplication)
이것은 우리의 요구(要求)가 아니다. 간절히 빌면서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간청과 애원이 같이 따른다.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사정을 말하고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허락의 실권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나만의 , 우리만의 욕구는 탄원이 될 수가 없다. 기도 시에 특히 주의하여야 할 요소이다.
6.중재(仲裁, Intercession)
내 이웃을 위한 중보(仲保)기도이다. 중재의 모범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내 이웃을 위해 중재하는 기도는 죽기까지 희생하는 적극성이 요구된다. 불우한 이웃의 더 나은 형편을 위해 기도하였다면 이제는 그 일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희생하는 실천적 중재역활이 요구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켰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중재이다.
7.봉헌(奉獻, Oblation)
봉헌물(offering)과 봉헌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는 헌물이며 기도이다. 즉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드리는 봉헌이다. 이 봉헌의 근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봉헌(Oblation)함으로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성찬식 후에 봉헌 물과 봉헌 기도는 더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이제 예배 시마다 온 마음으로 바치는 봉헌물(offering)-헌금-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바치는 진정한 봉헌(Oblation)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성전에서 성전 예배 시마다 드렸던 피의 산 제사를 생각할 때에 오늘날의 예배에서 드리는 봉헌 물이 비록 헌금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신을 바치는 진정한 봉헌이 되어야 한다.
Ⅲ.기도의 필요성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격성 그리고 그 형상을 닮은 인간의 존재와 그 인격성이 영적인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서로 만나고 교제하는 가능성임을 생각할 때에 절대적으로 소홀히 한다거나 무시될 수 없는 것으로 인간이 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진정한 기도를 요구하시며 그렇게 기도하는 자를 애타게 찾으신다.
무신론자나 범신론자, 유물론자, 하나님의 인격성을 거부하는 자, 모든 종류의 비인격적 신을 믿는 자들은 기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타락한 혼적인 판단 하에서는 인간은 종교에 대한 한 자유다 라고 주장하겠지만 이것은 인간 정신의 근본 면(영적인 면)에 있어서 판단할 때에 비진리요 그 자유 의지에 의한 억지 주장인 것이다.
1.기도의 대상
3위일1체 하나님으로 특히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한다.
2.기도해야할 이유
칼빈은 기도를 해야할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하늘의 보화가 약속된 것을 실제로 소유하기 위함이다?(Inst.,3.20.1.)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도의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1)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붙게 하려함이다.
2)우리의 심정을 다 토로함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과 욕정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3)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하기 위해서이다.
4)구한 바를 얻게 하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기 위해서이다.
5)기도로 얻은 것을 더 큰 즐거움으로 누리고 확신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다.
6)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고 언제나 보살피심을 알기 위해서이다.
3.기도의 법칙
1)경외(reverence)심을 갖고 기도하여야 한다.
2)부족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3)자기의지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한다.
4)확신을 갖고 기도하여야 한다.
4.기도의 방법
1)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2)일상 언어로 똑똑한 말로 분명한 의식으로 기도한다.
3)일정한 시간에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기도한다.
4)감히 하나님을 조정하려들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조정 받도록 한다.
5)인내와 끈기로 갖고서 계속적으로 한다.
제 7 장 찬 송(Hymns, Psalms)
찬송(Hymns)은 예배의 의식에 있어서 하나님을 찬송(讚頌)하여 부르는 노래이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아름다움 노래로 찬미(讚美)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그 모든 섭리하심을 높게 칭송하여 시적인 가사와 곡조 있는 음악과 벅찬 감동으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하여 찬양(讚揚)하는 것이다.
시적인 가사로 찬송한다는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도의 노래?로서 찬송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그들이 때를 따라 느껴진 여호와께 대한 신앙고백, 감사, 참회 등을 시적 언어로 표시하여 노래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시편(Psalms)이다. 시편(Psalms)은 구약 성서 중에 있는 찬송가(讚頌歌)요, 성가(聖歌)이다. 특히 히브리 원전(MT)에서는 시편을 םילהת רפס 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찬양의 책?이다.
Ⅰ.시편과 찬송가
예배에서의 찬양은 시편과 찬송가로 이루워진다. 이미 언급한대로 예배에서의 최초의 찬송은 시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 특히 다윗(David)은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었음에도 150여편의 성가를 자작(the Psalms of David)하여 수시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1.시 편(Psalms)
시편은 최초의 찬송가 책(the Books of Psalms)이다.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다윗의 시편이전부터 하나님을 찬양해 왔으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는 다윗이후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시편을 사용하였다. 가령 성전 예배이전 회막 예배에서부터 이미 사용되어졌고(대상16:7-36), 솔로몬의 성전 예배에 그대로 계승되어졌다. 바벨론 포로이후에도 성전 예배에서와 회당예배에서 시편을 사용하여 찬송이 공적 예배의 새로운 요소로 그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시편 찬송은 공적 예배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행하여져 개인 신앙 생활의 경건한 지침이 되었다. 그러므로 시편 찬송은 오랜 세월동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초대 기독교회의 예배에서도 시편의 찬송을 자연스럽게 불렀고(마26:30, 행16:25), 어거스틴(Augustine) 같은 초대 교부도 대단한 열의로 시편 찬송을 장려하였다.
개혁자 루터는 특히 시편 성가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도록 권장하였으며 칼빈이 인도했던 개혁파 교회 역시 그 모인 회중들과 함께 시편으로 찬송을 불렀다. 이러한 의미 있는 전통들은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져 모든 교회가 예배 때에 시편을 교독하고 찬송하여 시편 사용은 기독교회의 일반적 예배 의식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시편은 산문 형태이든 운문 형태이든 예배에 있어서 찬양의 첫 자리를 차지하였고, 개회, 설교전`후, 봉헌 등, 예배 순서의 적절한 위치에 사용되어 진다. 특히 산문 형태의 시편은 교독용으로 사용되어 예배의 참뜻을 더하게 하여 준다.
2.찬송가
찬송가의 일반화는 종교 개혁의 영향이다. 종교 개혁의 중심 인물인 루터와 칼빈은 현대의 찬송가에 크게 공헌하였다. 루터는 시편 찬송을 권장한 것 외에도 찬송가를 직접 가사를 붙여 자작곡하였고, 칼빈은 회중의 찬송을 운문 형태의 시편에서만 하도록 제한시켰다. 칼빈의 이러한 노력은 더 경건된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해서 취한 열심이라고 본다. 근자에 들어 난무하는 복음 성가를 볼 때에 의미 있는 조치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찬송은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영국 찬송가의 창시자 아이삭 왓츠(Isaac Watts)은 새로운 형태의 찬송가를 만들어 교회의 찬송가를 혁신시켰다. 그 외에도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에 의하여 신앙 체험의 직관적 요소들을 삽입한 찬송가가 만들어져 찬송가는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찬송가 작가들이 나타나 성경적인 시문학과 종교 음악의 형태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영광 돌리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우리 나라의 경우를 보면 1885년 이후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면서 찬송가가 전래되었다. 1893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최초로 우리말 <찬송가>를 발간하였으며, 1897년에는 감리교에서도 <찬미가>를 발간하였고, 미국 북장로교에서는 <찬송시>를 발간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으로 <합동 찬송가>를 출판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성결교에서는 1911년에 복음가를 발간하였다. 이들은 1919년에 증보판으로 <신정 복음가>를 발간하였다.
1928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으로 또 다시 <신정 찬송가>를 발간하였으나 의견차이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장로교 총회에서는 400장으로 된 <신편 찬송가>를 따로 간행하였다. 이 때에 성결교에서는 자기들만 쓰고있던 <복음가>를 <부흥성가>로 개편하여 사용하였다.
해방과 그 이듬해 1946년에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세 교파가 연합하여 <합동 찬송가>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는 장로교 합동 측에서 <새 찬송가>를 간행하였고, 뒤이어 <개편 찬송가>를 간행하였다.
1977년부터 지금까지는 각 교파가 연합한 찬송가 통일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합하여 선을 이루라는 말씀이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합하여 하나되는 일이 속히 이루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Ⅱ.찬송가 사용법
찬송은 위로는 하나님을 높게 칭송하여 찬양하는 것이요, 아래로는 그 백성인 성도의 경건 생활의 지침이다. 이는 첫째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를 가르쳐 준다. 둘째 죄 의식을 명백하게 하고 철저하게 회개하게 한다. 셋째 그리스도를 대망 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확신하게 하여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올바른 찬송가 사용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 그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한다.
1.찬양의 응답(테힐라[ה???])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찬양의 응답이다. 찬양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더 크게는 하나님의 계시의 응답인 예배의 응답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찬송은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예배의 응답의 그 표현을 노래로서 나타내는 독특한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찬송이 참된 예배의 진수로서 나타나야 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찬양(讚揚)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칭찬하여 기리어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로부터 출발을 한다. 다윗이 시편을 기록할 때에 주야로 하나님께 호소하던 그 간곡한 태도가 바로 이러한 절대 신앙을 격동시켜 준 것이다. 우리가 주야로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언약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신 그 다 갚을 수 없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그 절대 신뢰로 진실 되게 찬양하였다(시86, 88, 115, 145편). 그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를 우리는 높게 칭송하여 앙망하며 찬양해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죄 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하여야 한다. 시편에도 7회개 시라고 하는 찬양의 응답이 있다(시6, 32, 38, 51, 102, 130, 143편).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찬양의 응답이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그리스도를 대망하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확신하는 것이다(시2, 8, 16, 18, 20, 132, 144편).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를 앙모하여 대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찬양의 응답이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찬양으로 응답해야만 하는 인간의 마땅한 행위이다. 찬양의 응답 그것은 하나님 편의 정당한 요구요, 인간편의 마땅한 응답이다.
2.찬송의 기도(터필라[ה???])
찬송은 기도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시편 및 찬송가는 기도의 모든 요소를 내포하며 곡조 있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열납되어 진다는 뜻이다(시5, 10, 12, 17, 20, 31, 39, 41```등).
3.신앙 고백
시편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뢰의 고백이듯이 찬송가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다. 곧 창조와 구원 섭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에 관한 신앙 고백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시편과 찬송가는 우리들의 신앙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곡조 있는 신앙 고백이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의 찬송을 통한 신앙 고백은 찬송가의 사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제 8 장 성 례 전
Ⅰ.성례 개관
성례는 세례와 성만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명령(마26:13, 막14:9, 눅22:19, 고전11:25)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 택하신 참된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행함으로 순종의 원리와 영적 유익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1.성례의 용어 및 의의
성례의 용어 Sacrament 는 신비, 비밀을 나타내는 말로서 그 어원은 헬라어(Gk.) μυστήριον 이다. 이 말을 라틴역(Vulgate) 성경에서 sacramentum 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영어에서 sacrament 가 되어 성례전의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원래의 말을 그대로 음역하여 mystery 라는 말로도 사용한다. 그러니까 그 어원적 기원은 μυστήριον(Gk)이며 mystērion(L) - mystery(E), sacramentum(L) - sacrment(E)로 되었다. 그 어의는 다 같은 뜻으로 감추워진 것, 비밀, 신비로서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초자연적 은혜의 비밀임을 말한다. 이 신비적 은혜의 표지(sign)요, 보증(seal)이 바로 성례(세례와 성만찬)이다.
2.성례의 정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 Ⅳ권(하권), 제 14장 1-6절에는 성례의 정의가 잘 내려져 있다.?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 치시는 외형적인 표이고, 우리편에서는 그 표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A sacrament is a holy ordinance instituted by Christ, in which by sensible signs the grace of God in Christ, and the benefits of the covenants of geance, are represented, sealed, and applied to believers, and these, in turn, give expression to their faith and allegiance to God. Inst., Ⅳ. 14. 1-6.)
3.성례의 구성 부분
1)외면적 유형적 표시(sign)
개혁 교회의 성례의 구성은 2개 부분이다. 그것은 세례와 성찬인데 세례는 죄 씻음의 표시인 물세례와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떡과 포도주의 성찬이다.
2)내면적 영적 의미
성례의 영적 의미는 구원의 은혜 언약, 믿음의 의, 사죄, 신앙과 회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3)표지와 사물의 연합
성례의 표지와 그 사물의 연합이라는 차원에서 비교하면 개혁 교회는 영적인 연합이요, 실제적인 연합이다. 반면에 카톨릭은 물리적 연합과 본체 변화를 주장한다. 루터파는 장소적 연합과 통일 공간을 주장하고, 쯔빙글리파는 단순한 상징과 비연합을 주장한다.
3.신구약 성례의 비교
신약과 구약의 성례는 그 본질상 동일하다. 다만 구약의 성례는 영적 의미 외에 국가적 측면이 있고, 메시아 사상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장차 나타날 인호(seal)로 보았다.
여기에 비하여 신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의 제사를 표시하여 기억케하고, 더 풍성한 영적 은혜를 누리게 한다.
4.성례의 횟수
개혁 교회의 성례 횟수는 구약과 비교할 때에 이미 언급한대로 그 본질상 동일하다. 즉 구약에서의 상징적 의미인 할례와 유월절의 의식이 신약에서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더욱 완성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으로 성취되었다.
이에 반하여 카톨릭은 자기들 나름대로 7성사(셰례,성찬례,견신례,고해례,안수례,결혼례,종유례 등)를 만들어 인간의 공력(功力)을 주장한다.
Ⅱ.세 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후 제정하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중보적 권위로 제정하시고 또 모든 시대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셨다.
1.세례의 의미
세례는 죄 씻음의 표지(sign)로서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연합하는 그 인증(seal)이다. 이는 그 실제적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 분이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인증이다. 이로써 신자는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것으로, 그 목적은 첫째로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며, 둘째로 신앙의 고백에 도움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주께서 제정하신 이 세례를 의심 없이 받음으로 인하여 죄로 오염되었던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증표(seal)를 받는 것이다. 아울러 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 되고 용서되어 소멸되었다는 그 확인(seal)이 되는 것이다(마28:19, 행2:38). 이제 우리는 주께서 정하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인증을 받으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와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 있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그 표지(sign)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례의 더욱 중요한 의미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16:16) 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확정적인 약속에 있다.
2.세례의 시행
세례의 시행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공인된 목사가 시행한다. 그러나 목사의 세례 집행은 목사 자신의 어떤 가치에 의하여 성례(세례와 성찬)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한가지 사실은 성령의 세례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의 참 의미는 합법적으로 공인된 목사가 주께서 정하신 세례의 의식으로 집례할 때에 그 곳에는 성령께서 함께 임하신다 라는 의미이다(행1:5, 11:16, 19:6). 그러므로 세례를 집례한 자나 받은 자나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3.세례의 양식 문제
세례의 집례 의식을 놓고 세례 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라는 타당성이 없는 세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세례의 용어 βαπτίξω의 의미는 살짝 잠그다(to dip), 물 속에 집어넣다(to immerse), 물로 씻어 깨끗케 하다(to wash), 목욕하다(to bath) 등, 다양한 뜻으로 죄를 씻는 상징적 표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뒷받침의 확실한 증거는 신약 성경의 곳곳에 나타나는 βαπτίξω와 함께한 전치사이다. εἰ?와 함께 할 때는 요소 표시(막1:9), 끝을 표시(마3:11, 행8:16), 효과를 표시(고전12:13)하고, ἐν과 함께 할 때는 사람이 잠기는 사물 표시(요1:31), 세례 때 사용하는 물건 표시(마3:11) 등으로 역시 죄를 씻는 상징적 표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는 세례의 의식이 그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 분이 보내신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이루어져 믿고 죄 씻음의 확증을 얻었느냐가 더 큰 문제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양식 문제는 나라와 문화가 다른데 따라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인도 아래서 교회가 자유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4.유아 세례 문제
유아 셰례 문제 역시 신약 교회 여러 교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제세례파 (침례교)의 주장은 완강하여서 유아 세례를 전적으로 배척한다. 그들의 배척 이유는 유아 세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하여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를 같은 의식으로 간주한다. 즉 구약의 유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죄를 깨끗케 하는 증표로서 죄의 덩어리 육을 쳐 복종시키는 표증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첫째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 이르러 그리스도로 인하여 세례의 기초로 되었음을 말하면서 은혜에 인(seal)을 치는 그 표징임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칼빈은 유아 세례의 정당성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다는 성경적 증거(마19:13-15, 막10:13, 눅18:15)와 초대 교회에서의 유아 세례는 복음적 전통의 관습으로 인정했다.
또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즉 세례를 허락할 이유도 없다는 반론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주장하면서 세례는 유아가 영적으로 중생 한다는 표지(sign)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증(seal)된다고 하였다.
또 다음으로는 초대 교회 당시 가장이 회심할 때,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행16:15, 33. 고전1:16, 16:15)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5.세례의 신`구약적 비교
구약에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할례(circumcision)라는 한 제도 속에서 가시적 표현으로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신약에 있어서의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세례의 성례전을 통하여 보증을 받은 것이다. 이는 세례가 하나님 은혜 계약에 대한 표적이요 증인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세례는 할례와 옛 언약의 관계처럼 새 언약에 대한 관계로 존재한다.
6.세례의 집행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의식의 성례로서 교회의 완전한 예배 때에 집행되어야 하며 극단적인 필요불급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집행될 수 가 없다.
세례의 집례는 주로 주일 낮 예배 설교 후에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 순서는 세례 의식용 찬송을 부른 후, 목사는 성경을 봉독(마28:18-20, 막10:13-16)하고 세례의 의미에 관해 간단히 권면한다. 그 후 세례 받을 사람에게 신앙 고백을 하게 하고 난 후 세례식을 베푼다. 유아 세례인 경우 그 부모에게 신앙 고백을 하게 하고 난 후 세례식을 베푼다. 이 때에 모든 회중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집례가 끝나면 목사는 세례 교인이 된 것을 하나님 앞에와 만인 앞에 선언하고 축복 기도를 한다.
Ⅲ.성 만 찬(Lord`s Supper)
성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구약 유월절의 중심적 요소와 긴밀히 연결된다. 다시 말하여 구약에서 양고기와 함께 먹은 떡과 포도주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실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영적 양식을 상징하는 새 의미로 바쳐졌다. 그 가시적 표현의 상징성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참된 양이 죽음으로서 유혈 성례에서 무혈 성례로 성취된 것이다.
1.성찬의 의미
1)주님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전11:26).
2)신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것을 표시(sign)한다.
3)신자의 영에 생명, 능력, 기쁨을 줌으로써 영적 양식의 효과를 나타낸다.
4)예수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연합하는 것을 확증(seal)한다.
2.성찬의 날인(Seal)
1)참여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인(seal)쳐 준다.
2)구원의 축복이 현재적으로 참여자 자신의 것임을 확증(seal)해 준다.
3)언약의 모든 약속과 복음의 축복이 참여자 자신에게 소유된 것을 믿는 믿음을 보증(seal) 한다.
4)믿음으로 참여하는 자에게 신앙 고백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왕으로 고백하여 충성하고 그 명령에 순수히 순종할 것을 서약 날인(seal)하게 하는 것이다.
3.성찬에서의 임재 문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떡과 포도주에 고착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국한해서는 안된다. 또 그리스도의 존재를 여러 조각으로 만들어 여러 곳에 분배하거나 무한한 부피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
도 안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배치된다. 우리가 성찬을
행함에 있어 이러한 일들에 주의하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돌려서는 안된다는 그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찬에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확신 있게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한 신자들이 참으로 또 실질적으로 연합하는 하나의 ?영생을 위한 영양으로서의 본체의 표시?(sign)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근거는 성찬 예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축사하신 후에 떡에 대해서는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11:24) 라고 하셨고, 또 잔을 가지사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막14:24),?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고전11:25, 눅21:20) 라고 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일반론적인 법칙이나 문법적으로 검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로 연합하는 저 비밀한 교통의 신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의 언약에 결합함으로 우리에게는 영적 유익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성찬을 향한 그리스도의 말씀의 이 제정은 참으로 놀라운 영적 임재(Spiritual presence) 그 자체다.
4.성찬 참여자의 기준
성찬은 참여자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로마 교회, 영국 교회, 루터 교회들은 ex opere operato 라 하여 인간 스스로의 공력(믿음의 발동)에 의해 성찬에 참여함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그 제정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그르치는 망령된 생각이다. 성찬은 분명히 신자를 위해서만 제정되었다. 그리고 성찬은 하나의 도구요 수단으로서 결코 은혜의 시작이 아니다. 오히려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참여한 신자에게만 주시는 은혜의 강화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표징으로서 이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자만 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신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영적 의의를 아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찬 참여자의 바른 기준이다.
성찬에 참여치 못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분별력이 없는 어린이, 불신자, 권징 규례에서 수찬이 정지된 자, 완고한 진리의 배교자 등이다.
5.성찬의 합당한 집행
우선 공중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설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목사가 성찬의 제정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사는 우리들에게 이 거룩한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며, 원래 이런 잔치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서 시편을 노래하든지 또는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하며,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이 끝난 후에는 진지한 믿음과 신앙 고백을,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권고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한다.
6.성찬의 회수와 주의 사항
칼빈은 성찬의 횟수는 자주 집행하라고 하였다. 그것도 더 구체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그 의미는 신자가 자주 성찬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게 하고, 믿음을 강화시키며 감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자의 의미에 더욱 마음을 두어야 할 줄로 믿는다.
특히 칼빈이 말하는 성찬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은 1)성체 숭배 등 떡 자체를 숭배하는 행위, 2)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 3)한가지만 행하는 성찬, 4)말씀이 없는 성찬, 5)믿음으로 받지 않는 마술적 성찬 등이다.
제 9 장 교 회 력(敎會曆)
일반적으로 Calender(달력)는 고대 로마(Roman)에서 사용되었던 로마력(曆) 중에서 율리우스력(Julius Calender)을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1년을 12개월로 수정한 태양력으로 제정하였다. 이 달력을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이라고 하는데, 이 달력이 교회력이 되었으며, 또 현대의 달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력(Calender a Church)은 그레고리 13세에 의하여 채택되고, 당시의 세계에 소개되어 스페인, 포루투칼, 프랑스, 독일 등 카톨릭 영역의 많은 나라들에서 채택하였다.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신`구력의 차이로 인하여 일대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1.유대력(曆)
유대력은 고대 히브리인의 달력이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상에 입각한 그들만의 달력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 유대력은 교회력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유대력에서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하여 아침으로 끝난다. 이는 성경의 창조 기사?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에 입각한 제정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루에 시간은 24시간으로 정하였다. 그러므로 역서(曆書)의 첫 단위는 하루(24시간)이고, 두 번째 단위는 주간(週間)이다. 이것도 역시 성경대로 한 주간을 7일로 하여 첫째 날, 둘째 날```` , 이라고 불렀으며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하였다. 이 안식일은 예수님께서도 지키셨다(눅4:16).
해(年)는 음력(陰曆)이다. 달(月)을 중심으로 매월 1일은 신월(新月)이라 하였고, 15일은 만월(滿月)-보름-이라 하였다. 한 달은 29일 혹은 30일이었다. 그리고 이 달을 12개월로 구분하였다.
또한 유대력에는 성력(聖曆)과 민력(民曆)이 있다. 성력은 종교 관계의 사용으로, 민력은 정치와 농사에 사용되었다. 성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기가 있었다. 이 절기 중에서 유월절과 오순절(칠칠절)은 오늘날의 교회력과 관계가 있다. 유월절은 주의 성만찬 일로 되고, 오순절은 강림절로 된 것이다.
2.중세기의 교회력
중세기에는 일반력이 교회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 경축일이 일반 공휴일이 되었다. 현행 달력에서의 일요일은 이 때에 제정된 것으로 주님의 부활하신 날에 근거한 것이다. 당시의 교회는 이 날을 기준으로 매주 예배를 드렸고 일반력은 자연히 이 날을 공휴일로 따르게 되었다.
중세 초기에는 부활절에 있었던 파스카절(Pascha)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였다고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부활절 7주 후에 드리는 오순절이었다. 그리고 부활절과 오순절의 사이 기간을 유제절기(有祭節期)라하여 지켰다.
다음으로 큰 절기는 현현절(Epiphany)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3.교회력의 정립
교회력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한 고대 히브리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인들처럼 하루의 시작을 저녁부터 할 정도였다. 이 전통은 7세기까지도 지켜졌었다. 그리고 박해와 고난이 많았던 이 시기에는 교회력에 순교자들의 추모일이 많이 들어 있었다. 7일로된 주 제도(週制度)는 이미 언급하였듯이 하나님 말씀에 의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영향이다.
고난과 박해의 세월을 넘기고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274?-337)의 밀라노 칙령에 의한 신교의 자유가 선포됨에 따라 자유로운 신앙 활동과 함께 교회력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즉 파스카절은 부활절과 성 금요일로, 현현절은 크리스마스로, 오순절은 승천 일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수난절(Lent)이 확립되어 부활절을 준비케하고, 수난절 주간을 특별히 인정하여 성주간(Holy Week)이라 하였다. 그리고 강림절(Advent)도 만들어 크리스마스 이전(4주 이전부터)의 준비 기간으로 정착시켰다.
교회들은 이러한 새 절기들을 받아들여 해마다 거의 반년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하는 주기를 따르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강림, 탄생, 시험, 고난,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오순절의 성령 강림 등이다. 이 반(半)주기 안에 교회력의 중요한 절기들이 거의 다 포함되어 있다. 이 반주기 후반부 주일을 세는 삼위일체 주일이 1570년 이후부터 교회력에 계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6세기 개혁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교훈과 성경이 보증하지 아니
하는 소위 축제와 절기들을 제거하였다. 이후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와서 세계 평화 주일, 어머니 주일, 어린이 주일 등등을 만들어 교회력에 첨가시켰다.
우리는 교회력 자체의 의식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 의식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과 은혜를 찾을 때, 우리는 교회력의 참된 의의와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력을 예배에 바르게 적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4.교회력의 적용
1)대강절(Advent)
대강절, Advent는 내려온다 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즉 크리스마스 이전 준비 기간으로 11월 27-12월 3일까지의 기간이다.
2)성탄절
대강절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서 기쁨으로 맞이하는 성탄절이다. 성탄절의 유래는 구미 각국에서 분분하였으나, 우리 나라에는 1885년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12월 25일로 지켜지게 되었다.
3)신년과 현현일
①신년
신년 정월 초 하루, 새 해`새 날`새 마음으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며 새로운 각오로 한 해를 결심하는 감사 예배이다. 송구영신 예배로 병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한해 동안의 도와주심에 감사하고 그 마음으로 새 해를 맞이하는 기도와 결심이 있는 절기이다.
②현현일(the Epiphany)
현현, Epiphany는 나타낸다, 밝혀 진다의 뜻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한다. 이 날은 신년 정월 초하루 같은 날로써, 성탄절로부터 8일째 되는 날로 구약에 의하면 할례를 받으신 날이요, 예수라는 이름을 명명한 날로서 현현일이라는 절기 이름이 붙게되었다.
4)사순절(Lent)
부활절을 앞둔 성회 수요일로부터 주일 6일을 뺀 40일간을 사순절(四筍節)이라고 부른다. 이 40일의 기간을 영어에서는 Lencten(봄)과 Long(길다)에서 Lent(사순절)로 온 말이다.
사순절의 유래는 60년 - 70년경 초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절기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기가지 희생하신 그 구속의 은혜를 기리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참회와 내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 성찬의 참여, 죄와 죽음의 세계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들로 지켰다.
5)부활절
사순절 기간의 성스러운 준비로 새롭게 맞이하는 기독교 절기의 가장 큰 날이다. 부활절의 날자는 3월 21일 - 4월 25일 중에서 정하여 진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는 자의 생명을 보증하는 첫 열매이며, 이 날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체험케 하고, 우리의 삶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향하도록 기억케 하신다.
이 날의 행사로는 전 날에 철야 기도를 하며, 새벽에 촛불 예배를 드리고, 어린이들에게는 삶은 계란에 예쁜 칠을 해주기도 한다.
6)성렬 강림절
이 날의 유래는 구약의 오순절(칠칠절,맥추절)에서 유래한다. 이 구약의 추수 감사의 절기는 신약에 와서 놀라운 감격의 절기로 완성되었다. 곧 성령 강림절인데 이 절기가 오순절과 연관되어지는 유래는 초대 교회에서 정한 것인데 주님의 부활일로부터 50일만에 임한 성령 강림을 기념하기 위해서 구약의 오순절과 같이했던 데서 기인한다. 이 날에는 세례와 성례를 베풀며 전도와 선교에 주력해야 한다.
7)삼위일체 기간
성령 강림절을 끝으로 교회력의 전반부는 마쳐진다. 그리고 성령 강림절 그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이라고 하여 교회력 후반부가 시작된다.
삼위일체 기간은 대강절까지의 20여 주일인데 이 기간 동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찬양을 올리며 적극적인 신앙 생활에 주력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별 다른 행사가 없기 때문에 무제기(無祭期)라고 하기도 한다.
8)기념일
개혁 교에서는 종교 개혁 기념일만을 인정한다.
5.교회의 행사
1)어린이 주일
이 날의 유래는 미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5월의 첫 주일에 지킨다.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방법을 지도하기 위해서이다. 행사로는 유아 세례를 베풀고, 어린이와 그 부모가 합동으로 예배하며, 서로 교제하게 하여 어린이의 신앙을 돈독하게 하도록 한다.
2)어버이 주일
그 유래는 미국의 어머니 주일에서 부터이다. 우리 나라는 어버이 주일로 지킨다. 이 날에 우리는 어버이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보이는 부모를 섬기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3)추수 감사절
그 유래는 구약 시대로부터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넘치는 감동으로 추수감사를 하였다(삿9:27, 신16:13-17, 레23:30, 느18:15-18). 이 전통을 유럽 각국의 교회들과 미국의 청교도들이 지켜왔다. 우리 나라는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래되었고 11월 셋째 주일을 감사절로 지킨다.
제 10 장 예 배 의 처 소
예배의 처소 문제를 놓고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끊임없는 반목을 하여왔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의 전통을 따라 그리심 산만이 바른 예배의 처소라고 주장하였고, 유대인들은 그 곳을 저주받은 산이라 하며, 예루살렘 자기들의 성전만이 바른 예배의 처소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물질적 존재 중심의 자기 우상화를 전적으로 파기시켜 버리셨다. 진정으로 참된 예배의 처소는 물질적 존재 중심의 이것이나 저것이 아닌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하였다. 참된 예배, 참된 성전의 실체가 우리 앞에 선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예배의 본질에 맞는 환경 요건을 조성하여야 한다.
Ⅰ.외부적 환경
외부적 환경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시대에 적응되고 그 지역에 조화되는 새로운 시도를 창안하여 선교하는 교회로서 봉사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신한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1.지역적 환경 특성
지역적 환경의 특성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쫓아 교회를 설립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번화가, 화려한 곳에만 우후죽순처럼 몰려있는 현 교회들의 실태가 지역적 환경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그 증거이다. 사명자가 하나님의 전을 세울 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지역적 환경에 맞는 특성을 하나님 말씀 속에서 찾아 실천하여야 한다. 그 지역적 환경 특성이란 빈부귀천(貧富貴賤)`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서 그 지역적 환경 특성에 맞게 선교와 봉사를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그 지역적 환경 특성에 맞게 세운 농어촌 교회들이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지역적 환경 특성에 맞게 선교하고 봉사하지 못하는 대도시의 교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때, 지역적 환경 특성은 충분히 고려(考慮)된다.
2.특성 있는 환경 조성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하였다. 특성 있는 환경 조성, 그것은 불가항력의 힘 하나님의 섭리를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다. 초막이라는 환경을 특성 있게 개발하여야 할 책임이 있는 자가 궁궐을 꿈꾸고 물질적 환경 조성만을 꾀하고 있다면, 이것은 특성 있는 환경 조성이 될 수없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타락한 인간 정신의 무모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위험을 무릅쓴 행위를 할 때가 많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생각하심과 그 의도를 앞세우고, 알량한 내 자유 의지는 사정없이 내려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가정에서 지역에서 사회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세계화 속에서 특성 있는 환경 조성을 하나님의 의도하심대로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드려야 한다. 우리가 참된 예배의 처소를 지향한다고 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욕구가 발동되면 그것은 스스로의 올무, 덫,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 그 교회를 위한 특성 있는 환경 조성은 하나님의 자유 의지대로 내가 움직여지는 것이요, 그 황금의 굴레 안으로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3.교회의 외부
교회의 외부는 누구든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건축되어져야 한다. 교회 건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그 지역의 조건에 맞게 참신한 시도를 하여 새로운 양식과 기술에 따라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이미지가 충분히 들어 나도록 하여야 한다.
Ⅱ.교회의 시설
1.설교단
설교단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장엄하게 장식하는 그릇된 폐단이 없어야 한다. 설교 단을 높게 하여 위압적인 효과를 꾸며내서는 안된다.
근래에는 음향 기기의 발달로 설교 단의 높이가 오히려 낮아지는 추세이다. 이는 설교자와 회중이 더 가깝고 친근한 교류를 이끌어 내는 큰 효과를 가져온다. 예수님은 야외에서 설교단도 없이 설교를 하시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위 보이지 않는 권위선, 위엄선을 긋고서 회중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는 극히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는 지극히 높고 높은 하나님이 지극히 작고, 낮고, 천하게 오셔서 지극히 가깝게 다가오다 사실이다. 또 개혁 교회의 설교 단은 통상 하나만 사용한다.
2.성찬대
성찬대는 제대(祭坮)나 제단(祭壇)이 아니다. 성찬대는 주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시작된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이 행하셨던 그 모습 그대로 식탁에 둘러서서 진지한 마음으로 성찬을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성찬탁(卓)이라고 하였다. 그 위에는 촛불 등을 둘 수 없다. 성찬보는 깨끗한 흰 보를 사용하여야 한다.
3.회중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회중석이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회중석은 설교자와 회중들이 서로 잘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회중석의 자리가 잘 정리되면 예배 순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4.성가대
성가대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회중의 찬송을 도와주는 예배 순서의 한 담당자이다. 성가대석은 설교대 옆에 위치하여 설교자와 회중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적당하다. 성가대는 잘 알 수 없고 어려운 성가곡들을 선택하여서는 안된다. 오히려 일반 찬송곡 중에서 은혜롭고 아름답게 부르는 것이 더 이상적이다.
5.교회 내부의 전반적 구조
교회 내부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경건함을 진작시켜야 한다. 교회 내부의 구조가 조잡하고 거리의 소음이 그대로 들어오면 경건함의 분위기는 어렵게 된다. 이 때문에 내부의 창문 하나 하나에까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또한 조명이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데, 너무 밝거나 어둡지 않도록 시설해야 한다. 음향 기기 역시 내부의 크기에 맞는 것으로 장치하고 볼륨 조절을 잘하여 너무 시끄럽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교회 내부의 구조가 조화롭고 체계 있게 조성되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연 구 문 제
1.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무엇인가를 논하라.
2.예배의 근본 원리를 논하라.
3.족장 시대 이전의 안식 개념을 논하라.
4.신약 시대 예배의 기초는 무엇인가? 논하라.
5.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를 논하라.
6.예배의 주체는 누구인가? 논하라.
7.예배의 순서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소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논하라.
8.설교(說敎)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논하라.
9.십일조 헌금 봉투에 거리낌없이 쓰고있는 ?나를 시험하라?(말3:10)를 철저 하게 논하라.
10.축도 용어의 끝맺는 말에 대하여 논하라.
11.성경의 환경에 대하여 말하고 일반론적 관념을 비판하라.
12.하나님의 계약을 논하라.
13.구약의 원전을 논하라.
14.신약의 원전을 논하라.
15.구`신약의 헬라어 번역 본들은 무엇 무엇인가? 논하라.
16.영어 번역 본들을 논하라.
17.기도의 정의를 논하라.
18.시편의 표제어를 상세히 논하고 그 뜻을 정리하라. 교향곡의 표제어와 어떤 차이점이 있나를 논하라.
19.성례전에 대하여 논하라.
20.현대의 달력에 그 기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가? 그리고 현대의 달력의 그 연수는 정확하다고 보는 가? 정확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21.예배의 처소에서 외부적 환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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